외워야 힘이 생긴다
코로나19 2차확산위기에 직면해 있다. 질병본부에서는 3단계를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3단계는 신중해야 한다.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놓은 것이 2.5단계 조치이다.
질본에서는 ‘딱 일주일만 멈추어달라’고 당부했다. 가능하면 밖에 나오지 말고 집에 있어 달라는 것이다. 모이지 않는 것이 상책임을 말한다.
멈추기가 쉽지 않다. 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치달리고 있을 때 멈추려 하면 잘 멈추어지지 않는다.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이 일상이 된 사람들에게 집에서만 있으라고 한다면 감옥과 같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자가격리를 요청받은 사람들이 태연히 돌아다니다가 구상권을 청구받았다는 뉴스를 접한다.
종종 멈추고자 한다. 수행을 하면 멈추게 된다. 앉아서 좌선을 하면 멈출 수밖에 없다. 멈추어서 무엇을 하는가? 자신에게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을 멈춤과 통찰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 사마타와 위빠사나라고 한다.
작은 수행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단 일주일도 생업을 떠나서는 살 수 없기 때문에 집중수행은 요원한 것이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순 없다. 작은 공간에 작은 수행공간을 만들어 놓으니 자연스럽게 앉게 된다. 그러나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결정바라밀
평좌를 하고 앉아서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이때 결심을 해야 한다. 한시간 앉아 있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품과 꺼짐을 놓치지 않겠다고 마음먹는 것이다. 이를 ‘결정바라밀’이라 해야 할 것이다.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서 결심을 해야 한다. 결심 없이는 도중에 그만 둘 수 있다. 어느 정도 결심을 해야 할까? 십바라밀에 결정바라밀이 있다. 테리가타 서문을 보면 담마빨라 존자가 쓴 “디빵까라 부처님의 발 아래 위대한 결단을 내려 서른 가지 초월의 길을 세우고”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서른 가지 초월의 길은 십바라밀을 말한다.
서른 가지 바라밀은 정도에 따라 일반적, 우월적, 승의적 바라밀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눈다. 이 세 가지에 열 가지 바라밀을 곱하면 서른 가지 바라밀이 된다. 이 중에서 결정바라밀이 있다. 승의적 결정바라밀을 보면 “그들의 생명의 파괴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방해받지 않는 결정이 승의적 초월의 길의 결정이다.”라고 했다.
승의적 결정바라밀은 목숨걸고 하는 것이다. 한번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목숨바쳐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흐지브지될 것이다. 하다가 그만두고를 반복하다 보면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
좌복에 평좌를 하고 앉는다. 이번에는 한시간 앉아 있어 보겠다고 결정한다. 그리고 부품과 꺼짐을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치고 들어오는 잡생각에 여지없이 깨진다. 목숨걸고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음을 말한다.
생각의 무게
잡념도 법이다. 이 세상에 법 아닌 것이 없다.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법이다. 눈을 감고 조용한 곳에 앉아 있으면 마음의 문으로 법이 들어온다. 잡념이 치고 들어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알아차림해야 할 것이다.
잡념은 사띠를 놓치면 여지없이 빈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그런 잡념은 언어화 된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개념화’ 된 것이다. 그런데 잡념이 일어나면 피곤하다는 사실이다.
일상에서는 생각이 일어나도 피곤하지 않다. 삶 자체가 개념화된 것이기 때문에 개념속에 살아서 일 것이다. 그래서 한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눈은 늘 두리번 거리고 귀는 늘 쫑긋 세운다. 즐길거리를 찾기 위해서이다. 책을 보거나 유튜브를 보는 등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좌복에 앉아 있다 보면 생각의 무게를 알 수 있다. 늘 즐기는 삶을 살다가 멈추었을 때 생각이 마음으로 문으로 들어온다. 그런데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일어났을 때 몹시 피곤하다는 사실이다. 언어화된 개념에는 무게가 있는 것이다.
밧줄로 꽁꽁
모든 것을 차단하고 앉아 있을 때 생각이 치고 들어오면 피곤하다. 이럴 때 호흡에 따른 부품과 꺼짐에 마음을 실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런 상태를 계속유지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호흡이라는 기둥에 밧줄로 꽁꽁 묶어 두어야 할 것이다. 이를 사띠빳타나(satipaṭṭhāna)라고 한다. 마음을 대상에 꽁꽁 묶어 두는 것을 말한다.
마음은 내버려 두면 제멋대로가 된다. 이를 미쳐날뛰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대상에 묶어 두면 제어가 된다. 그래서 “호흡의 기둥에 새김의 밧줄을 묶으면, 그 마음이 여기저기로 날뛰어도 이전에 습관화된 대상을 얻을 수 없고 새김의 밧줄을 끊고 도망갈 수가 없다.”(Vism.8.153)라고 했다. 마치 날뛰는 송아지를 제어하고자 기둥에 묶어 두는 것과 같다.
대상에 집중하면 마음이 편안하다. 대상을 집중한다는 것은 대상을 관찰한다는 말과 같다. 대상을 벗어나지 않고 관찰함을 말한다. 호흡이나 통증 같은 것이다. 이렇게 관찰했을 때 잡념이 치고 들어오지 않는다. 개념화된 잡념에서 해방되었을 때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낀다.
담마를 기억하는 것도 사띠(sati)
아직까지 좌선은 익숙하지 않다. 앉아 있는 시간이 오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생활화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생활인에게 있어서 잠시 멈추고 앉아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일없이 수행하는 것이 일상이 된 수행자와는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다.
수행에 있어서 사띠는 매우 중요하다. 좌선과 행선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사띠가 요청된다. 그런데 사띠에는 수동적 기능과 능동적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수동적 기능은 집중수행 할 때 알 수 있다. 대상에 대하여 집중했을 때 잊지 않고, 기억하고, 주의기울이고, 마음이 머물게 하고, 마음을 지키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상에 대하여 통찰하는 경우에는 알아차리고, 지각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사띠의 능동적 기능이라고 볼 수 있다.
사띠라 하여 반드시 좌선, 경행, 그리고 일상사띠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띠는 기억이라는 제1의 뜻이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도 사띠가 된다. 이는 마흔 가지 사마타명상주제 중의 하나인 ‘불수념’을 보면 알 수 있다.
불수념은 부처님의 열 가지 덕성에 대한 것이다. 불수념을 하려면 먼저 부처님의 덕성 열 가지에 대하여 외워야 한다. 상윳따니까야 ‘깃발의 경’에 있는 것처럼 “세존께서는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들은 님,…”(S11.3)이라고 암송하는 것이다. 이는 법수념도 마찬가지이고 승수념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수념은 기본적으로 외는 것부터 시작된다.
부처님의 핵심가르침은 암송하고 있어야 한다. 암송하는 것이 바로 사띠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늘 기억하고 새기고 사유해야 함을 말한다.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도 사띠이다.
부처님 그 분이 어떤 말씀을 했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부처님 그 분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경전에 의존해야 한다. 그런 경전은 단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니다. 부처님이 설한 담마는 그 자체로 진리이다.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은 암기해야
사띠수행을 해야 한다. 사띠수행이라 하여 반드시 명상수행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도 사띠에 해당된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칠각지에서 사띠삼보장가(satisambojjhaṅga)에 대한 설명을 보면 “그는 그와 같이 멀리 떠나서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멀리 떠나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면, 그 때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가 시작된다.”(S46.3)라고 했다.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을 담마라고 한다. 담마는 한번 듣고서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이 설법할 때 주의를 기울여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이 설법할 때 기침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고 경전에서는 전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의 담마는 기억해야 하는 것이지 한번 듣고 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뿐니야여, 수행승이 믿음을 갖추었고 , 찾아 와서, 가까이 앉아, 질문하고, 귀를 기울여 가르침을 듣고, 가르침을 기억하고, 기억한 가르침의 의미를 탐구하고, 의미를 알고 원리를 알아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한다면, 여래가 기꺼이 설한다. 뿐니야여,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원리를 갖출 때, 오로지 여래가 가르침을 기꺼이 설한다.”(A9.82)
깨달음을 이루려면 명상만 해서는 안된다. 깨달음을 이루려면 먼저 부처님이 무엇을 말했는지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잘 기억해야 한다.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은 암기해 두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알아야 실천할 수 있다. 가르침을 모르고 앉아만 있다면 엉뚱한 길로 가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이 믿음을 갖추었고, 찾아와서, 가까이 앉아, 질문하고, 귀를 기울여 가르침을 듣고, 가르침을 기억하고, 기억한 가르침의 의미를 탐구하고, 의미를 알고 원리를 알아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한다면, 여래가 가르침을 기꺼이 설한다. 뿐니야여,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원리를 갖출 때, 오로지 여래가 가르침을 기꺼이 설한다.”(A8.82)라고 말씀했다.
모든 학문은 외는 것부터
모든 학문은 외는 것부터 시작된다. 언어를 알고자 할 때 먼저 단어를 외워야 한다. 산수를 잘하고자 하려면 먼저 구구단을 외워야 한다. 화학을 잘 하려면 주기율표를 외워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실천하려면 먼저 외워야 한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부처님이 설법한 것을 듣고 흘리지 않았다. 그래서 기억하고자 노력했다. 아난다는 법의 장군 사리뿟따에게 이렇게 말했다.
“벗이여 싸리뿟따여, 이 세상에 많이 배우고 배운 것을 기억하고 배운 것을 쌓아나가는 수행승이 있습니다. 그는 처음도 착하고, 중간도 착하고, 끝도 착하고, 의미를 갖추고, 표현을 갖추고, 충만하고 순결하고 청정한 삶을 설하는 그러한 가르침들을 많이 배우고 기억하고 언어로써 습득하고 정신으로 탐구하고 견해로써 통찰했습니다. 그는 잠재적인 경향을 제거하기 위하여 사부대중에게 원활하고 유창한 언어로써 가르침을 말합니다. 벗이여 싸리뿟따여, 이러한 수행승이 이 고씽가쌀라 숲을 밝힐 수 있습니다.”(M32)
부처님의 제자들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귀담아들었다. 그리고 잊지 않기 위해서 외웠다. 배운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렇게 담마를 배우고 기억하고 익히는 것은 누구에게나 장려되었다.
외워야 힘이 생긴다
부처님 당시에 재가불자들도 담마를 배웠다. 배우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익히는 것 역시 장려되었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학인의 경’(M53)에서 고귀한 제자의 일곱가지 성품 중에서 기억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일곱 가지 중에 네 번째 항을 보면 다음과 같다.
“많이 배웁니다. 그는 배운 것을 기억하고 배운 것을 저장합니다. 처음도 착하고, 중간도 착하고, 끝도 착하고, 의미를 갖추고, 표현을 갖추고, 충만하고 순결하고 청정한 삶을 설하는 그러한 가르침에 대하여 많이 배우고 기억하고 언어로 외우고 마음으로 탐구하고 올바른 견해로써 꿰뚫어봅니다.”(M53.11)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부처님이 어떤 말을 했는지 알아야 한다. 이는 경전을 접하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경전에 쓰여 있는 말에 대하여 단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정도로 본다면 이는 부처님과 가르침에 대한 모독이다. 부처님은 분명히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했다. 기억해야 실천하는 것이다.
외워야 힘이 생긴다. 이는 부처님의 오력법문에서 사띠에 대한 것을 보면 "새김의 힘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고귀한 제자가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면, 수행들이여, 이것을 새김의 힘이라 한다.”(A5.14)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기쁨으로 충만하여
부처님의 가르침과 함께 십년 이상 글쓰기를 하며 살아왔다. 매일 의무적 글쓰기를 하면서 하루 일과 중의 반을 보냈다. 이번에 십년전에 쓴 글을 소환했다.
2010년 상반기 블로그에 쓴 글을 하나의 파일로 만들었다. 그리고 책 두 권을 문구점을 이용하여 출간했다. 이로서 열세 번째 책이 되었다. 책 제목은 ‘담마의 거울 2010 I’이다 주로 아비담마 논장을 중심으로 하여 글을 쓴 것이다. 피디에프(PDF) 파일로도 만들었다. 주로 교학과 교리에 관한 글이다. 특히 교리와 관련하여 수많은 도표를 만들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제대로 불교를 접했다. 세상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위대한 인류문화유산이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모르고 살았던 것이다. 오로지 자신만의 세계에 살다가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치 미지의 세계를 발을 들여 놓은 듯했다.
누구라도 빠알리삼장을 접하면 기쁨으로 충만할 것이다. 과거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고 앞으로 미래도 그런 사람이 있을 것이다. 부처님의 담마를 만난 것은 행운이다. 기쁨으로 글을 썼다. 처음 접하는 불교의 진수를 접하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하루 종일 매달린 날도 있었다.
재가불자로 살면서 여러 가지 장애가 있다. 생업에 종사하면서 수행도 겸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먼저 교학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부처님 그분이 어떤 말씀을 했는지 알아야 한다. 핵심 가르침은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가르침을 기억해야 수행도 잘 할 수 있다.
가르침을 배우고 기억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더 좋은 것은 글로서 남기는 것이다. 모두 46가지 주제로 516페이지에 달한다. 보통불자의 삶의 결실이다.
2020-09-0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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