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장의 가르침

식카빠다를 왜 학습계율이라 하는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9. 11. 27. 14:37

식카빠다를 왜 학습계율이라 하는가?

 

 

전화를 한통 받았다. 식까빠다(sikkhāpada)에 대한 것이다. 빠알리어 식카빠다는 한글로 학습계율로 번역되어 있다. 빠알리성전협회 번역어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학습계목으로 번역했다. 빅쿠보디는 영역에서 ‘training’으로 번역했다. 식카빠다에 대한 빠알리사전을 보면 ‘steps of training’의 뜻이고, 한자어로는 학처(學處) 또는 학칙(學則), 계조(戒條) 등으로 설명되어 있다.

 

전화에서는 오계에 대하여 학습계율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했다. 예를 들어 불살생계에 대하여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는 학습계율을 지키겠나이다. (Adinnādānā veramaīsikkhāpada samādiyāmi)”라고 했을 때, 살생도 학습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다.




학습계율, 식까빠다(sikkhāpada)


사람을 죽였다면 살인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사회법적으로 처벌받아야 할 것이다. 승가에서라면 승단추방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더 이상 계를 지켜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살인도 학습에 의한 것이라면 학습계율이라는 말은 모순이 된다. 그러나 학습계율이라는 말은 보다 높은 계행의 배움에 대한 것이다. 이를 학습효과로 설명할 수 있다.

 

학습효과라는 말이 있다. 이 말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특정한 작업을 여러 차례 반복하여 그 일에 익숙해지는 효과를 말한다. 학습계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술을 마시지 말라는 불음주계는 빠알리오계에서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 있는 것에 취하는 것을 삼가는 학습계율을 지키겠습니다. (Surāmerayamajjapamādaṭṭhānā veramaī sikkhāpada samādiyāmi)”라고 해석된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불음주계가 매우 지켜지기 힘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삼가는 뜻의 베라마니(veramai)로 알 수 있다. 영어로는 ‘Abstaining from’의 뜻으로 ‘절제하다’는 뜻도 있다.

 

오계는 지키기 어렵기 때문에 삼가하라거나 절제하라고 말한다. 삼가지 못하여 또는 절제하지 못하여 어기게 되었을 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일까? 참회하고 다시 받아 지니면 된다. 테라와다불교 법회나 행사에서는 삼귀의와 오계가 빠지지 않는데, 이는 오계가 학습계율이기 때문이다.

 

평생 지녀서 배우고 익혀야

 

오계는 학습효과로 완성된다. 어기면 참회하고 새로 받아 지니면 된다. 매번 법회할 때 마다 받아 지니는 것은 평생동안 걸쳐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습관이 있기 때문에 단번에 고쳐 지지 않는 것이다.

 

불살생계, 불투도계, 불망어계, 불사음계 모두 학습계율이다. 여기서 불살생계를 불살인계라 하고 하지 않는다. 기독교에서는 살인하지 말라라고 하여 인간에게만 적용되어 있으나 불교에서는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는 학습계율을 지키겠나이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불살생계는 비폭력적인 계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아힘사를 불살생계의 범주에 넣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든지 도둑질을 학습하지 않는다. 불투도계라 하여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을 삼가는 학습계율을 지키겠나이다.”라고 했을 때 도둑질을 학습하는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도둑질이 잘못된 것임을 알아 뉘우치고 참회하여 다시는 짓지 않겠다고 맹세했을 때 학습계율이 된다. 이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정언명령과는 다른 것이다.

 

오계가 학습계율인 이유

 

기독교에 십계명이 있다. 열 가지 항목 모두가 명령어로 되어 있다. 도둑질에 대해서는 도둑질 하지 말라라고 명령조로 말하는 것이다. 만일 정언명령을 어겼을 때 어떻게 될까? 매우 심한 죄책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신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불교에서 오계는 정언명령이 아니다. 불교의 오계는 학습계율이다. 어기면 참회하고 다시 받아 지니면 된다. 지금 당장 지키지 못하더라도 지키려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지켜 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평생 배우고 익힌다고 하여 학습계율이라고 하는 것이다.

 

오계가 학습계율인 이유는 초기경전에 실려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식카빠다경(sīlasikkhāsutta)’(A3.85-87)이 바로 그것이다. 모두 세 개의 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 번째 경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한 수행승이 계행을 구족하였더라도 삼매가 그만하고 지혜가 그만하다면, 그는 작고 사소한 학습계율이 있을 때 마다 그것을 범하기도 하고 복귀하기도 한다.”(A3.85)

 




 

출가하면 비구계를 받게 된다. 비구계를 구족계라고도 한다. 그래서 가능한 계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살다보면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그는 작고 사소한 학습계율이 있을 때 마다 그것을 범하기도 하고 복귀하기도 한다.”라고 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계율이라는 것이 범하기도 하고 지키기도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범하고 나면 참회하고 다시 받아 지니면 된다. 학습효과에 의하여 다시는 계를 범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있다. 살생과 같은 바라이죄를 범했을 때이다.

 

승단추방죄를 범했을 때

 

승가에서는 바라이죄를 범하면 승단에서 추방된다. 바라이죄를 저지른 자에게 더 이상 학습계율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승단추방죄를 제외한 작고 사소한 학습계목(khuddānukhuddakāni sikkhāpadāni: 小小戒)’이 학습계율에 해당된다고 했다. 그래서 승단잔류죄는 사소한 계이다. 승단잔류죄보다 더 가벼운 참회죄나 고백죄도 소소계에 해당된다.

 

학습계율은 소소한 것이다. 보름날 마다 빠띠목카(pātimokkha)를 합송하지만 빠띠목카를 학습계율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빠띠목카를 의무계율이라고 하는데 의무계율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조문이 있다. 이를 식카빠다라고 한다. 그래서 모든 학습계율은 의무계율이 될 수 있지만, 모든 학습계율이 의무계율이 되는 것은 아니다.”(율장대품해제 16, 한국빠알리성전협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학습계율은 지키기가 쉽지 않다. 설령 계행이 구족한 자라 할지라도 어길 수 있다. 출가한 수행승은 백가지가 넘는 계목에 실려 있는 조문을 어길 수 있음을 말한다. 학습계율은 범하기도 하고 복귀하기도 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다만 바라이죄는 제외한다. 승단에서 추방되면 학습계율 자체가 의미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범하기도 하고 복귀하기도 하는 학습계율은 경전적 근거가 있는 것일까?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앙굿따라니까야 식카빠다경에 따르면 매 반월마다 이익을 원하는 양가의 자제들이 배우는 백오십 가지의 학습계율이 독송된다.”(A3.85)라는 구절이 있다. 이로서 알 수 있는 것은 백 가지 이상의 학습계율이 있다는 것이다. 보름마다 독송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지키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재가불자들이 지키는 오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계는 단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마치 시지프스 신화를 보는 것 같다. 계를 어기면 바닥에 떨어지는 것과 같기 때문에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하기를 무수하게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완전히 계를 지킬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살인을 하면 어떻게 될까? 마치 승가에서 승단추방죄를 짓는 것과 같은 결과가 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오계에서는 살인계가 아니라 불살생계이다.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는 것이다.

 

오계는 범하기도 하고 복귀하기도 한다. 만일 범해서 복귀하지 못했다면 더 이상 오계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범하면 참회하고 다시 받아 지니면 된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오계를 지킨 과보라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오계를 어길 때 멈칫 하는 것 같다. 함부로 살인을 하지 못하는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보다 높은 계행에 대한 배움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계행을 지키고, 의무계율을 수호하고, 올바른 행위의 경계를 갖추고, 사소한 잘못에서 두려움을 보고, 지켜야 할 학습계율을 수용하며 배운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보다 높은 계행에 대한 학습계율이라 한다.(A3.88)

 

 

2019-11-2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