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장의 가르침

부처님의 깨달음은 아라한 선언으로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 2. 16:52

 

부처님의 깨달음은 아라한 선언으로

 

 

오늘은 성도절이다. 생일이기도 하다. 음력으로 128일이다. 불교에 입문하고나서 음력 생일날이 성도절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국불교에서 사대명절에 해당되는 날 중에 하나가 생일인 것이다. 이런 것도 불교와의 인연이라면 인연일 것이다.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율장대품을 보면 부처님의 성도순간이 묘사되어 있다. 부기를 포함하여 모두 다섯 권에 달하는 율장은 승가에 대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제1권이라 볼 수 있는 율장대품을 보면 제1장 제1절에 해당되는 부분에 부처님의 성도순간이 묘사되어 있다. 왜 율장 가장 첫머리에 부처님의 깨달음이 설명되어 있을까? 이는 다름 아닌 승가의 성립과도 관련이 있다. 부처님의 교단의 형성은 부처님의 깨달음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율장 제1장 제1절에 부처님이 깨달음이 소개되어 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어떤 것일까? 한마디로 연기법이라고 볼 수 있다. 율장 제1장 제1절에 소개되어 있는 깨달음에 대한 것을 보면 부처님은 십이연기를 깨달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고 십이연기의 유전문에 해당되는 순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십이연기의 환멸문에 해당되는 역관도 함께 소개되어 있다.

 

부처님은 연기법을 설할 때 무명을 조건으로 인하여 형성이 생겨나고,…”라 하여 순관만 설하지 않았다. 반드시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라 하여 역관도 동시에 설했다. 여기서 순관은 보통사람들의 삶에 대한 것이다. 일반사람들은 연기적 존재임을 말한다.

 

연기적 존재로서 일반사람들은 결국 절망에 이른다. 이는 연기의 순관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Vin.I.1)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지금 여기 이렇게 있게 된 것은 갈애에 따른 것이다. 이는 십이연기에서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느낌 단계에서 좋고 싫음, 무덤덤함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때 연기는 회전된다. 대상에 대한 갈애가 더욱 강화되면 집착이 된다. 집착단계가 되면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행위에 대한 업을 짓기 때문에 업보로서 태어남이 있게 된다.

 

한번 태어난 존재는 늙고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다. 한존재가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다는 것은 절망이다. 그래서 십이연기 순관에서 가장 마지막은 절망으로 끝난다.

 

 

사람들은 절망이라는 종착지를 향하여 달려가는 열차와도 같다. 어느 누구도 절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금 이순간이 행복한 느낌이어도 결국 절망이라는 종말에 이른다. 그렇다면 절망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 부처님은 연기를 거꾸로 회전시키면 된다고 했다. 절망의 원인이 되는 태어남이 없다면 죽음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거꾸로 올라가는 것에 대하여 역관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십이연기의 순관과 역관으로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까?

 

존재의 근원 갈애와 무명

 

위빠사나 수행처에 가면 늘 듣는 말이 있다. 느낌단계에서 알아차리라는 것이다. 낙수, 고수, 불고불락수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연기가 회전되어 고통에 이르게 됨을 말한다. 그래서 갈애가 고통과 윤회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무명으로 설명한다는 것이다. 과거 전생의 원인으로 인하여 그 과보로서 여기 이렇게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여기 이렇게 있게 된 것은 과거 전생에서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업 때문이다. 설령 그 업이 선업이든 불선업이든 몰라서 지은 것이다. 재생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은 것이다. 그래서 무명이라고 한다.

 

무명은 부처님 가르침을 모르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몰라서 세세생생 윤회한 것이다. 어떤 때는 천상에서 태어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지옥에서 태어나기도 했다.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초기경전에서는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 무명이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을 모르는 것이 무명인 것이다. 이 말은 역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알면 무명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존재의 근원이라 볼 수 있는 무명이란 무엇일까?

 

무명은 무지가 중첩된 것으로 설명된다. 사성제라는 부처님 가르침이 있지만 이를 모르면 무지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이 있는 줄조차 모른다면 이는 무지에 무지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정법이 변질되어 사라져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다음 부처님이 출현할 때까지는 마치 암흑의 시대를 사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것도 몇 겁, 몇 십겁이나 되는 아득한 세월이다. 이런 암흑의 시대에서는 결코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연기가 회전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그 끝은 항상 절망에 이른다. 그렇다고 죽음이 끝이 아니다. 이전에 지은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각자 자신이 지은 적합한 세계에 재생하는 것이다.

 

정법이 사라진 세계에서는 나고 죽는 일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일상적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연기가 순방향으로 회전되어 감을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오고 감을 모르니

 

테리가타에 따르면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는 죽은 아들을 슬퍼하며 빠따짜라 장로니를 찾아 갔다. 장로니는 “오고 가는 것의 길을 그대는 알지도 못하니, 그 뭇삶이 어디서 왔는지, 그대는 ‘나의 아들’이라고 울부짖는다.(Thig.127)라고 말했다. 범부는 아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슬피우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슬퍼서 우는 것이다.

 

온 것을 모르면 가는 것도 모른다. 아기가 어떻게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내 아기라고 여겼으나 나의 품에서 떠났으니 슬플 뿐이다. 만약 어디서 왔는지 알았다면 슬피 울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오고감을 모르는 것에 대하여 과거와 미래의 존재의 생성을 알지 못한다.”(Thig.A.119)라고 했다.

 

젊은 사람이 죽으면 슬프다. 나이를 먹어 살만큼 살다가 죽은 사람은 그다지 슬프지 않다. 한국에서는 호상이라고 하여 잔칫집 분위기가 나는 곳도 있다. 더구나 자신의 핏덩이와 같은 아기가 죽었다면 더욱 더 슬플 것이다. 이에 대하여 빠따짜라 장로니는 슬퍼하지 말라고 했다. 오고 감도 모르는 여인에 대하여 그렇게 말한 것은 뭇삶의 운명이 그러할 뿐이다.”(Thig.128)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장로니는 오고감도 모르는 여인에 대하여 슬퍼하지 말라고 했다. 설령 오고감을 알아도 슬퍼하지 말라고 했다. 모든 삶의 운명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절망을 말한다. 연기가 회전하면 그 종착지는 절망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기는 어디서 왔을까?

 

동물의 왕국을 보면 발정기가 되면 짝을 이루어 새끼를 낳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때 되면 결혼하여 아기를 낳는다. 그러나 이 아기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기 때문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빠따짜라 장로니는 여인에게 청하지도 않았는데 이곳에 와서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이곳에서 떠났다. 도대체 어디에서 와서 며칠동안 지내다가 여기서 다른 곳으로 가고 그곳에서 또 다른 곳으로 간다.” (Thig.129)라고 게송으로 말했다.

 

아기는 청하지도 않았는데 왔다가 허락도 받지 않고 갔다. 이는 이곳저곳으로 윤회함을 말한다. 그래서 장로니는 죽어서 인간의 모습으로 윤회하며 갈 것이니라.”(Thig.130) 라고 말한다. 주석에 따르면 지옥 등에서 며칠동안 이 세상에 살다가 다른 존재로 결생(paisandhi)하여 간다.”(Thig.A.119)라는 뜻이라고 했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더 이상 슬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장로니는 오는 것처럼 갔으니, 거기에 어떠한 슬픔이 있겠는가?” (Thig.130)라고 했다.

 

아기를 잃은 여인은 모르기 때문에 슬퍼했다. 그러나 알면 더 이상 슬퍼하지 않는다. 오고감을 모르는 것은 무지하기 때문이다. 오고감을 모르니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그래서 오면 기뻐하고 가면 슬퍼한다. 이런 무지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도 해당된다. 어느 것 하나 아는 것이 없어서 무지에 무지가 쌓이면 이를 무명이라고 한다.

 

무지한 자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른다. 당연히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흘러간 대로 산다. 연기의 흐름대로 사는 것이다. 이렇게 살다 보면 갈애로 살게 된다. 그래서 끊임 없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이곳저곳으로 윤회하게 된다. 윤회의 고리를 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연기가 회전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느낌이 갈애로 넘어가지 않도록 알아차려야 한다. 근본적으로는 무명을 타파해야 한다.

 

지금 여기에 있게 된 것은 무명 때문이다. 모든 것이 무명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런 무명은 어디서 온 것일까? 맛지마니까야에 따르면 “무명이 생겨나므로 번뇌가 생겨나고, 무명이 소멸하므로 번뇌가 소멸합니다.(M9)라고 했다. 이 말은 무명은 번뇌에 의해서 조건 지어진 것이고, 또한 번뇌는 무명에 의해서 조건 지어져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무명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S15.1)라고 한 것이다. 이처럼 제일원인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고 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아라한 선언으로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연기법이다. 연기법을 순관과 역관으로 관찰하여 무명과 갈애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가르침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다섯명의 경’(S22.59)이 있다. 이 경을 무아상경이라고도 하는데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무아상경에서는 무아에 대하여 설하고 있다. 오온이 무아라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이 물질이 나라면 이 물질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물질에 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S22.59)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온 중에 물질이 내 것이 아님을 말한다.

 

오온이 나의 것이라면 내 마음대로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통제되지 않는다면 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단지 조건에 따라 발생하고 소멸할 뿐이다. 이는 오온에서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도 차례로 적용된다. 이렇게 오온이 내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때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이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알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알게 되었을 때 마침내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라고 그는 분명히 안다.”라며 스스로 선언을 하게 된다. 이를 아라한의 선언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아라한 선언을 함으로써 완성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무아의 선언이라고도 볼 수 있다. 모든 번뇌의 원인이 자아가 있다는 관념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번뇌가 발생한다. 번뇌는 무지의 조건이 되고, 또한 무지는 번뇌의 조건이 된다. 무지의 무지를 더한 중중무지가 무명이라고 했다. 오온에 대하여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한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고, 또한 윤회할 수밖에 없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알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다. 아기를 잃은 여인은 아기가 자신의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슬피 운 것이다. 오온을 자아와 동일시하면 연기의 순환적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오온이 내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면 연기의 역관적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게 된다. 부처님은 우리들을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나도록 깨달음을 주신 것이다.

 

 

2020-01-0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