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장의 가르침

승려가 재물을 모아 보시했을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20. 2. 11. 15:46

 

승려가 재물을 모아 보시했을 때

 

 

경전을 읽다보면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 현실에서 접하는 것들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마치 예언서를 읽는 것 같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미래의 시기에

최후의 시대가 오면,

수행승들과 수행녀들의

행실이 이와 같으리라.”(Thag.977)

 

 

테라가타에서 풋사장로가 읊은 게송이다. 테라가타는 테리가타와 함께 부처님의 직제자들이 해탈과 열반에 대한 기쁨을 시로서 노래한 것을 모아 놓은 경전이다. 그렇다고 모두 다 그런 내용은 아니다. 승단의 현실에 대한 비판도 볼 수 있다. 특히 계행을 지키지 않는 수행승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그것이다. 풋사장로가 읊은 삼십련시집(Thag.949-Thag.980)도 그 중의 하나이다.

 

풋사장로는 미래를 예측하고 있다. 미래 승단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하여 게송으로 표현해 놓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최후의 시대라고 했다. 최후의 시대(kālamhi pacchime)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다섯 시대가 있다고 했다. 해탈의 시대, 삼매의 시대, 계행의 시대, 학습의 시대, 보시의 시대 이렇게 다섯 시대를 말한다.

 

왜 보시의 시대가 최후의 시대인가

 

주석에 따르면 해탈의 시대가 사라지면, 삼매의 시대가 전개된다고 했다. 그래서 차례로 계행의 시대, 학습의 시대, 보시의 시대 순으로 전개된다고 했다. 여기서 보시의 시대가 게송에서 말하는 최후의 시대가 된다. 왜 보시의 시대를 최후의 시대라고 했을까?

 

어느 시대에서는 말세라는 말이 있었다. 불교에서도 말세라는 말이 있다. 주석에 따르면 불교에서의 말세는 학습의 시대부터 시작된다. 해탈의 시대도 지나고 삼매의 시대도 지나고 계행의 시대도 지나서 학습의 시대가 되면 탐욕 등의 욕망 때문에 계행이 완전히 청정하지 못하고 학습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Thag.A.III.89)라고 했다. 학습의 시대는 수행은 없고 교학만 남아 있는 시대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학습마저 끝나는 시대가 있다는 것이다.

 

논의의 주제를 끝으로 하는 학습이 일체 사라지면 그로부터 부처님 가르침은 흔적만 남을 것이라고 한다. 승가에 더 이상 부처님 가르침이 남아 있지 않을 때 승려들은 그때부터 재물을 모아 보시로서 베푼다고 보았다. 이를 보시의 시대라고 하는데, 이 보시의 시대가 최후의 시대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보시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보시는 지계, 수행과 함께 공덕 쌓기에 해당된다. 그런데 최후의 시대가 되면 지계와 수행은 사라지고 오로지 보시만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승려들이 재물을 모아서 보시한다는 것이다. 재가자들이 해야 할 일을 승려들이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풋사장로는 이렇게 게송으로 말했다.

 

 

금화와 황금 그리고

전지와 택지, 염소와 양,

남자노비와 여자노비를

미래에 어리석은 자들이 받아들이리라.”(Thag.957)

 

 

마치 예견서를 보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도 불교가 전래된 이래 이런 시기가 있었다. 왕으로부터 땅을 하사 받고 노비를 부리던 시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게송이 나온 것을 보면 부처님 직제자 시기에도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재산이 축적되었을 때 보시로서 베푸는 시대를 최후의 시대라고 했다.

 

비법이 득세하였을 때

 

불교계 뉴스에서 종종 듣는 미담이 있다. 스님이 큰 돈을 쾌척했다는 소식이다. 큰 불교단체를 이끌고 있는 어느 스님은 수억이나 되는 돈을 종단에 흔쾌히 냈다. 이런 미담 기사에 사람들은 흐믓해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대체 스님들이 어떤 돈이 있어서 보시하였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모두 신도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왔을 텐데 스님이 스님이름으로 보시했을 때 의아해 보였던 것이다. 이런 의문은 고대 인도 부처님 직제자 시기에도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최후의 시대 전조는 어떤 것일까?

 

풋사장로의 삼십련시집을 보면 어느 수행승이 뿟사 장로에게 미래에 일어날 일을 물어본다. 그 수행승은 미래에는 어떠한 욕망의 사람들, 어떠한 의도의 사람들, 어떠한 행동의 사람들이 있겠소?”(Thag.950)라고 물어본다. 이에 풋사장로는 분노하고, 원한에 차고, 위선적이고, 완고하고, 교활하고, 질투하고, 또한 다른 의견을 가진 자들이 다가오는 미래에는 많을 것이오.”(Thag.952)라고 답한다.

 

풋사장로는 미래의 불교를 예측했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가득 찬 자들이 승단을 점령했을 때 최후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다른 의견을 가진 자들이라고 했다. 가르침이 아닌 비법이 득세하였을 때를 말한다. 전조는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풋사장로는세상에 많은 위험이 다가오는 미래에 나타나리니, 잘 설해진 가르침을 어리석은 자들이 오염시키리라.”(Thag.954)라고 했다. 정법이 힘을 못쓰고 비법이 득세하였을 때를 말한다.

 

승가가 분열하는 요인은

 

풋사장로는 가르침의 오염을 걱정했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후대로 갈수록 변질되어 결국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는 테라가타 주석에서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서 선설하신 처음도 훌륭하고 등으로 설해진 가르침을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자들이 오염시킬 것이다.”(Thag.A.III.85)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가르침은 어떻게 오염될까?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우빨리여, 세상에 수행승들이 가르침이 아닌 것을 가르침이라 설하고, 가르침을 가르침이 아닌 것이라고 설하고, 계율이 아닌 것을 계율이라 설하고, 계율을 계율이 아닌 것이라고 설하고, 여래가 말하지 않고 설하지 않은 것을 여래가 말하고 설한 것이라고 설하고, 여래가 행하지 않은 것을 여래가 행한 것이라고 설하고, 여래가 행한 것을 여래가 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설하고, 여래가 규정하지 않은 것을 여래가 규정한 것이라고 설하고, 여래가 규정한 것을 여래가 규정하지 않은 것이라고 설한다.”(A10.37)

 

 

이 구절은 율장소품 참모임분열의 다발과도 병행한다. 부처님은 승가의 분열에 대하여 함께 살고 있고 동일한 결계에 있는 일반수행승들이 승가를 분열시킨다고 했다. 비구니나 정학녀, 사미, 사미니, 재가의 남자신자나 여자신자는 승가를 분열시킬 수 없다고 했다. 승가를 구성하고 있는 비구들이 승가를 분열시키는데 18가지를 들었다. 18가지를 몇 개로 요약해 놓은 것이 위에 언급된 가르침이 아닌 것을 가르침이라고 설하고로 시작되는 구절이다.

 

승가가 분열하는 제일의 요인은 가르침이 아닌 것을 가르침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율장소품에서는 원칙이 아닌 것을 원칙이라고 밝힌다.”(Vin.II.204)라고 되어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풋사장로의 시에서와 같이 수다스럽고 배운 것이 없는 자들이 참모임에서 힘을 얻게 되리라.”(Thag.955)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승가에 부적격자들이 넘칠 때 가르침이 왜곡되어서 가르침을 거꾸로 해석했을 때 가르침이 오염될 것이라고 했다. 이런 현상은 현실에서도 발견된다.

 

불교는 정말 진화해 온 것일까?

 

요즘 유튜브에서 A스님의 강연을 재미 있게 듣고 있다. 박사 타이틀을 여러 개 가진 학승으로서 스님은 매우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일까 요즘 불교TV를 주름잡는 것 같다. 가히 A스님의 전성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A스님의 강연을 들어 보면 매우 자신만만하다는 것이다. 때로 농담을 하며 청중을 웃음바다로 만들기도 한다. 이런 여유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이전 방송에서 스님이 한 말이 있다. 그것은 청중을 개무시하면 됩니다.”라는 말이다. 강사가 우물쭈물 자신 없게 말하면 전달이 안된다는 것이다. 청중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으로 치라는 것이다. 이는 청중을 장악하라는 말과 같다. 그래서 개무시라는 말을 쓴 것 같다.

 

A스님은 유튜브강연에서 불교는 진화의 산물이라는 취지로 말한 적이 있다. 이는 A스님이 대승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소승이라는 말이 거침없이 나온다. 현재 테라와다불교는 부파불교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니까야라고 말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근거로 드는 경전은 한역 아함경이다. 경속에 등장하는 인물도 한문식 이름이다. 사리뿟따존자를 사리불이라고 하고, 목갈라나존자를 목건련이라고 칭하는 식이다. 스님의 말대로 불교는 정말 진화해 온 것일까?

 

불교를 진화의 산물이라고 본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은 덜 완성된 것이고 불완전한 것이 된다. 후대 깨달은 사람들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정하고 보완했다는 이야기밖에 안된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깨달음은 완전한 것이고 완성된 것이라고 본다. 만약 부처님이 덜 깨달았다면 깨달음을 선언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네 가지의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린 열두 가지의 형태로 있는 그대로 완전히 청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수행승들이여,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하게 깨달았다고 선언하지 않았다.”(S56.11)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사성제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을 때 깨달음을 선포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것을 여러 차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검증했다. 경에서는 사성제를 세 번 굴려서 열 두 번 검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부처님은 자신의 깨달음에 대한 확신이 섰을 때 법을 선포했다. 이는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있는 그대로 청정해졌기 때문에, 수행승들이여,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히 깨달았다고 선언했다.”(S56.11)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것을 자신에게 적용해 보아 스스로 검증했다. 그 결과 나에게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는 앎과 봄이 생겨났다.”(S56.11)라는 확신을 얻었다. 이른바 아라한선언을 말한다.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하여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고 한다.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특히 위없다(anuttara)는 말은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아눗따라삼마삼보디(anuttarasammāsambodhi)라라고 한다. 한자어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한다. 그럼에도 부처님의 깨달음을 의심하여 후대에 수정되고 보완되었다고 말한다면 이는 가르침의 오염에 해당될 것이다.

 

이교도의 가르침에 귀 기울였을 때

 

풋사장로가 말하는 최후의 시대는 보시의 시대를 말한다. 승려들이 재물을 모아 신도들에게 베푸는 시대를 최후의 시대로 본 것이다. 최후의 시대가 되면 가르침은 사라지고 흔적만 남게 될 것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가르침의 오염이다. 이는 가르침이 아닌 것을 가르침이라 설하고, 가르침을 가르침이 아닌 것이라고 설하고”(A10.37)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가르침이 아닌 것을 가르침이라 설한다는 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삼십련시집에서 구리 빛으로 물들인 자신의 깃발을 비난하고, 어떤 자들은 이교도의 흰색 깃발을 착용하리라.”(Thag.965)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흰색깃발은 자이나교도, 즉 니간타들 가운데 흰옷을 입은 파를 말한다.

 

말세가 되면 부처님 가르침 보다는 이교도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검은 원리에 빠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것들이 설해질 때, 그들은 잘 듣지 않고 귀를 기울이지 않고 알고자 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배워서 통달하고자 그 가르침에 관해 사유하지 않을 것이다.”(A5.79)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에 대하여 더 관심을 가질까? 이에 대하여 검은 원리 중의 하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교도의 제자가 설한 아름다운 단어와 아름다운 말귀로 이루어진 경전이나 시문을 낭독하고, 그것들이 설해질 때, 그들은 잘 듣고 귀를 기울이고 알고자 하는 마음을 내고, 그것들을 배워서 통달하고자 그 가르침에 관해 사유한다.”(A5.79)

 



 

부처님의 가르침은 심오하다. 부처님의 법문은 심오하여 그 뜻이 깊고 출세간적이고 공과 상응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잘 귀 기울여 듣지 않고 알고자 마음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대신 아름다운 문장이나 아름 다운 문구로 이루어진 이교도의 경전이나 시문에 더 관심을 갖는다고 했다. 이렇게 이교의 가르침에 빠졌을 때 담마는 힘을 쓰지 못할 것이다. 담마 아닌 것이 득세하는 비법의 시대가 되었을 때 최후의 시대라고 볼 수 있다.

 

가사가 흔적만 남아 있는 것처럼

 

풋사장로는 미래를 예견하는 게송을 남겼다. 정법은 언젠가는 사라지고 마는데 정법이 오염되었을 때 사라진다고 했다. 수행승이라 하지만 재가자와 구별이 없어 졌을 때 더 이상 정법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재물을 모아 보시하는 수행승에 대하여 교만하고, 허세부리며, 어리석고, 계행이 없는 자에게는 흰옷이 어울리지 어찌 가사가 어울리겠는가?”(Thag.973)라고 말 했다.

 

일본불교 가사를 보면 흔적만 남은 것 같다. 머리를 기른 스님이 가사를 입고 있는데 가사흔적만 남은 것이다. 승려가 재물을 모아 보시를 하면 사실상 재가자나 다름 없다. 마치 가사가 흔적만 남아 있는 것처럼 가르침은 흔적만 남게 된다. 정법은 사라지고 그 대신 이교도의 가르침이 그 자리를 차지 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불교에서는 정법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결집이 이루어졌다. 1차 결집을 주도한 마하깟싸빠존자는 이렇게 말 했다.

 

 

벗들이여, 우리는 가르침과 계율을 결집합시다. 예전에 가르침이 아니었던 것이 번영하고 가르침이었던 것은 쇠퇴하고, 예전에 계율이 아니었던 것이 번영하고 계율이었던 것은 쇠퇴하고, 예전에 가르침이 아니었던 것을 설하는 자가 강해지고, 가르침이었던 것을 설하는 자가 약해지고, 예전에 계율이 아니었던 것을 설하는 자가 강해지고, 가르침이었던 것을 설하는 자가 약해집니다.”(Vin.II.285)

 

 

담마아닌 것이 득세할 때 정법의 위기 상황이 된다. 담마 아닌 것이 지속되어서 담마가 오염된다면 정법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담마아닌 것이 득세할 때 결집이 이루어졌다.

 

정법이 머무는 시간은 매우 짧다

 

역사적으로 제1차 결집은 부처님 사후에, 2차 결집은 부처님 입멸후 100년 정도가 지난 다음에 이루어졌다. 3차 결집은 부처님 입멸후 250년 가량되었을 때 열렸는데 정법과 비법을 가려내었다. 4차결집은 기원전 1세기에 스리랑카에서 열렸는데 구전되어 오던 삼장을 문자화한 것으로 알려 졌지만 대륙에서 유행하는 새로운 사조로부터 정법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5차결집은 미얀마에서 영국식민지 통치가 시작될 때 이루어졌고, 6차결집은 미얀마가 영국에서 독립되고 나서 이루어져 있다. 모두 비법으로부터 정법을 지켜 내기 위하여 결집이 이루어진 것이다.

 

대부분 결집은 정법을 지켜 내기 위해서 이루어졌다. 정법이 비법에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율장에서 보는 갈마제도 역시 정법을 지켜내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법이 위기에 처했을 때 승가에서는 결집을 하여 정법을 지켜 낸 것이다.

 

정법은 결국 사라지고 말 것이다. 과거 부처님이 출현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정법이 사라지면 다음 부처가 출현할 때까지 암흑의 시대가 된다. 정법이 머무는 시간은 매우 짧고 비법이 득세하는 시간은 매우 길다. 풋사장로는 최후의 시대는 보시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했다. 승려가 재물을 모아 보시하는 시대가 말세라는 것이다. 우리는 말세시대에 살고 있는 것일까?

 

 

2020-02-1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