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 무엇인지 알려거든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사람들은 “깨달음, 깨달음”이라 말하지만 깨달음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 불교를 10년, 20년, 30년 아니 평생을 접해도 ‘깨달음은 이런 것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는 것 같다. 대체 깨달음은 무엇일까?
유튜브에서 깨달음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다. 젊은 여성이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해 차분히 설명했다. 부처님이 고행을 마치고 네란자라 강가에서 깨닫는 장면을 설명한 것이다. 속된 말로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진다’는 말이 있다. 그녀의 말이 그랬다. 그녀는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해 ‘참나’를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를 변성으로 설명했다. 도중에 극적인 성품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를 합일이라고 했다. 전체감 내지 전지감 같은 것이라고 했다. 이런 이야기는 현존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종종 들을 수 있다.
참나를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선사들도 이런 얘기를 많이 한다. 진짜 나를 아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이를 한자어로 ‘본래불(本來佛)’이라고 한다. 그래서 본래 내가 부처인 것을 아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참나나 본래불이나 같은 개념이다. 존재의 근원이 있어서 존재의 근원과 합일되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브라만교에서 말하는 범아일여를 연상케 한다.
불교는 역사적으로 브라만교를 비판하면서 성립되었다. 이는 니까야를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영원주의로 대변되는 브라만교는 연기법에서 조건소멸을 관찰하면 성립되지 않는다. 당연히 모든 것을 있게 한 존재의 근원도 있을 수 없다. 존재의 근원에서 나온 영원불변하는 자아도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누구인가?’라며 나를 찾는 여행을 한다면 오리무중에 빠지고 말 것이다. 본래 없는 것을 찾기 때문이다. 있다면 자신의 마음 속에 있을 것이다. 마치 ‘토끼뿔’처럼 상상속에 만들어 놓은 대상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깨달음에 대해 알려거든 율장을 보아야 한다. 율장대품 첫 장에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해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그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부처님은 ‘연기법’을 깨달았다.
연기법이란 무엇인가? 이는 연기송으로 설명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연기송을 말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라는 상호의존적 연기와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는 조건발생적 연기를 말한다. 이를 유전연기라고 한다. 이런 일반연기가 더욱 확장된 것이 십이연기이다.
율장대품에서는 십이연기가 설해져 있다. 이는“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식으로 원인과 조건과 결과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열 두 가지 마디로 흘러가는 것에 대하여 유전연기라고 한다.
유전연기의 종착지는 무엇일까? 이는“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라는 구절로 알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삶의 방식을 설명한 것이다. 흘러가는 대로, 되는 대로 살면 결국 절망에 이르는 삶이 된다.
부처님은 우리의 삶이 괴로움으로 가득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라 하여 고성제를 설했다. 그렇다면 괴로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그것은 유전적 연기의 삶과 반대의 삶을 살면 되는 것이다. 이는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라는 연기의 환멸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십이연기를 보면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라는 식으로 환멸적 연기를 설했다.
환멸연기는 세상사람들과 사는 방식이 다른 삶의 방식을 말한다. 세상사람들이 무명과 갈애로 인하여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삶을 살 때 이와는 반대로 흐름을 거스르는 무탐, 무진, 무치의 삶을 말한다. 이렇게 살았을 때 결국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소멸한다.”라고 했다. 괴로움과 윤회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율장 1장에서는 부처님이 깨달은 것이 연기법이라고 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십이연기를 소개하고 있다. 그것도 유전적 연기와 함께 환멸적 연기를 쌍으로 설명해 놓은 것이다.
울장대품 1장에서는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해 십이연기를 세 번 설명해 놓았다. 이를 초야, 중야, 후야로 구별하여 설명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깨달음이 단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말한다.
초야의 깨달음은 무엇일까? 이는 맛지마니까야에서 “이와 같이 마음이 통일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전생의 기억에 대한 앎으로 향하게 했습니다.”(M4.31)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네 번째 선정에서 숙명통의 지혜가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이 나는 나의 전생의 여러가지 삶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기억했습니다.”(M4.31)라고 한 것이다. 부처님은 초야에 숙명통의 지혜로 무수한 부처님의 과거 전생을 본 것이다.
중야의 깨달음은 무엇일까? 이는 “나는 마음을 뭇삶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앎으로 향하게 했습니다.”(M4.33)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천안통의 지혜로 중생들이 업으로 태어나고 죽은 것은 본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이 나는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 눈으로 뭇삶들을 관찰하여, 죽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귀하거나 천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업보에 따라서 등장하는 뭇삶들에 관하여 분명히 알았습니다.”(M4.33)라고 한 것이다. 부처님은 중야에 천안통의 지혜로 업과 업의 과보에 따른 업생으로서 중생을 본 것이다.
후야의 깨달음은 무엇일까? 이는 “나는 마음을 번뇌의 소멸에 대한 앎으로 향하게 했습니다.”(M4.35)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누진통의 지혜로 번뇌를 소멸한 것이다. 그래서 “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은 사성제로 번뇌를 소멸한 것이다. 이렇게 번뇌가 소멸되었을 때 “내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자,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의한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고, 존재에 의한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고, 무명의한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습니다.”(M4.35)라고 했다. 무명과 갈애서 해방된 것이다. 그래서 “나의 태어남은 부수어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M4.36)라고 당당하게 선언한 것이다. 부처님은 누진통의 지혜로 번뇌를 소멸하여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난 것이다.
깨달음의 클라이막스는 세 가지 명지(tevijja)에 대한 것이다. 이는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으로 삼명(三明)이라고 한다. 여기서 숙명통과 천안통은 네 번째 선정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누진통은 위빠사나 수행으로도 가능한 것이라고 했다. 궁극적으로 누진통의 지혜가 있어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연기법을 아는 것이다.
사성제는 원인과 결과라는 연기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고와 고의 소멸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고를 소멸하기 위해서는 팔정도를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성제에서 도성제는 팔정도이고, 팔정도에서 정견은 사성제이다. 이렇게 사성제와 팔정도는 서로 맞물려 있다. 사성제는 연기의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은 연기와 사성제, 팔정도가 핵심이 된다. 연기법을 알고, 사성제를 철견하고, 팔정도를 닦아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한다.
부처님은 숙명통의 지혜로 전생을 보았고, 천안통의 지혜로 업생을 보았고, 누진통의 지혜로 번뇌를 끊어 버렸다. 이렇게 십이연기를 세 번 굴려서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깨달음이라 볼 수 있다.
현존을 말하는 자들이나 본래불을 말하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왜곡하고 있다. 경전을 읽어 보지 않아서일 것이다. 빠알리 삼장을 읽어 보면 모든 것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먼저 깨달음이 무엇인지 궁금하면 율장을 읽어야 한다. 율장대품 1장 1절에는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래서 누군가 “깨달음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율장대품 1장 1절에 있는 내용을 알려 주어야 한다.
부처님의 승가는 부처님의 깨달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율장 첫머리에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해 설명되어 있다. 부처님의 승가는 부처님의 깨달음으로부터 성립되었기 때문에 율장 1장1절에 부처님의 깨달음이 설명되어 있는 것이다.
깨달음이 궁금하거든 먼저 율장을 읽어 보아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빠알리위나야(律藏)를 우리말로 번역해 놓았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발간된 율장은 모두 네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품, 소품, 비구계, 비구니계를 말한다. 네 권을 모아 놓으면 칠천페이지 가까이 되는 방대한 분량이 된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최근 대품, 소품, 비구계, 비구니계, 부기를 하나로 엮어서 통합본을 출간했다. 여기서 부기는 일종의 부록이라고 볼 수 있다. 가장 최근에 번역된 것이다. 부기 교정작업에 참여한 바 있다. 니까야강독모임 멤버들 중의 일부가 통합본 교정작업에 참여했다. 통합본은 부기번역을 포함하여 2년 동안 작업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통합본은 2020년 3월에 출간되었다. 약 3,300페이지가량되는데 2단 칼럼으로 되어 있다. 누구든지 서서 볼 수 있다. 율장이라 하여 출가자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재가자도 율장을 볼 수 있다. 다만 출가자와 함께 합송하는 것은 금하고 있다. 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불교인이라면 부처님이 무엇을 깨달았는지 알아야 한다. 누군가 “깨달음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때 자신있게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빠알리삼장을 읽어 보아야 한다.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율장 서두에 있는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불교는 부처님의 깨달음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승가는 부처님의 깨달음으로부터 성립되었다. 깨달음이 무엇인지 알려면 먼저 율장을 보아야 한다.
2020-04-0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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