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장의 가르침

밭 가는 수행자

담마다사 이병욱 2020. 5. 4. 12:57

 

밭 가는 수행자

 

 

요즘 농사철인 것 같다. 페북에는 텃밭에 고추, 감자 등을 심었다는 포스팅을 종종 볼 수 있다. 한번 심어 놓으면 자연이 키워 줄 것이다. 물론 풀을 뽑는 등 보살핌이 있어야 한다. 땅은 정직하다. 팔의 힘과 이마의 땀과 근면한 노력으로 결실을 보게 될 것이다.

 

도시인의 텃밭농사와 달리 은둔자형 농사도 있다. 요즘 TV에서 40대에게 가장 인기 있다는 자연인을 보면 은둔자형 텃밭농사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다. 자급자족 하며 살지만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깊은 산골에서 쌀농사를 할 수 없다면 쌀은 사서 먹어야 한다. 특산품이 있다면 물물교환 형태로 쌀을 사 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숨어서 사는 듯한 사람을 은둔자라고 한다. 그런데 출가수행자 중에도 은둔자형이 있다는 것이다. 깊은 숲속이나 깊은 산중에서 텃밭을 일구며 사는 수행자를 말한다. 그렇다면 은둔자형과 비구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우 조띠까 사야도의 마음의 지도를 보면, 사야도는 한때 은둔자로 6년을 살았다. 단지 평화롭고 조용한 인생을 보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람 만나는 것을 싫어 했다는 것이다. 비구로 살다 보면 사람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고 또 사람을 가르쳐야 하는 의무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둔자는 채소를 재배하고 음식을 하고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데 비구는 사람들에게 너무 의존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마음의 지도, 251)라고 말했다.

 

네 가지 바라이 죄가 있는데

 

부처님은 수행승(Bhikkhu)들에게 농사를 짓지 못하게 했다. 또 음식을 만들어 먹지도 못하게 했다. 만일 수행승이 농사를 짓거나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면 부처님 가르침과 어긋나는 것이다.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발견된다.

 

디가니까야 수행자의 삶의 결실에 대한 경을 보면 수행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 중에 하나를 보면 종자나 식물을 해치는 것을 여읩니다.”(D2.42)라고 했다. 오계 등 기본계율을 지키는 것은 기본이다. 여기에다 소소한 규정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종자나 식물을 해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경에 따르면 이런 것도 계행이라고 했다. 이는 바라이죄에서도 언급되어 있다.

 

율장대품을 보면 바라이죄에 대한 설명이 있다. 이를 승단추방죄라고 한다. 네 가지 바라이죄가 있다. 구족계를 받은 수행승이라면 성교를 해서는 안되고, 주지 않는 것을 취해서도 안되고, 의도적 살생을 해서는 안되고, 마지막으로 깨달음을 사칭해서는 안된다. 이 네 가지를 어기면 마치 목이 잘린 것처럼 승단에서 추방된다.

 

네 가지 바라이 죄는 오계를 근간으로 한 것이지만 음주에 대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음주를 하라는 것은 아니다. 음주는 오계를 어기는 근원이고 만악의 근원이다. 무엇보다 집중을 방해한다. 술을 마시고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할 수 없다. 육체노동이라면 가능할지 모른다.

 

직장에서 낮술 한잔 하고 일에 임했을 때 집중이 안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수행자가 음주를 해서는 안되는 것은 수행집중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음주한 상태에서 좌선한다고 앉아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깨달음사칭에 대하여

 

네 가지 바라이죄 중에서 특이 한 것 중의 하나는 깨달음을 사칭하는 것이다. 이는 망어죄 중의 하나로 본다. 그것도 대망어죄라고 본다. 선정 등을 말하면서 인간을 뛰어넘는 경지(Uttarimanussadhamma)’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이는 율장비구계 승단추방죄법 제4조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어떻게 사칭하는가? 재가자들에게 저 수행승은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한 자이고,..”(Vin.III.87)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초선정에초부터 네 번째 선정까지 사칭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저 수행승은 흐름에 든 경지를 성취한 자이고,..”식으로 사향사과가 또 사칭의 대상이 된다. 이 뿐만이 아니다. 세 가지 명지와 여섯 가지 곧바른 앎, 즉 신통도 사칭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재가자들에게 인간을 뛰어넘는 경지를 사칭하면 탁발음식 등 공양을 받을 것이다. 부처님은 이렇게 사칭하는 자에 대하여 인간을 뛰어넘는 상태를 성취했다고 선언한다면, 그것이 최상의 큰 도둑이다.”(Vin.III.87)라고 했다. 망어죄 중에서 최악의 망어죄가 자신이 깨달았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율장비구계에서 이렇게 말했다.

 

 

수행승으로서 악한 욕망을 가지고 탐욕으로 가득차고 존재하지 않고 실재하지 않는 인간을 뛰어넘는 상태, 즉 선정이든지 해탈이든지 삼매이든지 성취이든지 길이든지 경지에 이른 것을 사칭한다면, 그는 수행자가 아니고 싸끼야의 아들도 아니다. 이것은 목숨을 다하도록 행해서는 안될 일이다.”(Vin.III.96)

 

 

풀잎이라도 주지 않은 것이라면

 

네 가지 바라이죄 중에서 두 번째 것은 도둑질에 대한 것이다. 율장대품에서는 구족계를 받은 수행승은, 심지어 풀잎이라도 주지 않은 것을 훔칠 목적으로 갖지 말아야 한다.”(Vin.I.96)라고 했다. 산천에 있는 초목 어느 것이든지 주지 않는 것은 가져 가야 하지 말아야 함을 말한다. 가져 가면 도둑질에 해당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율장비구계에서는 오두막을 짓고 살던 수행승을 경책하는 이야기가 있다.

 

어떤 수행승이 산록에 오두막을 지었다. 수행승은 출가하기 전에 도자를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두막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래서 진흙을 이겨서 집을 만들었다. 그것도 마치 무당벌레처럼 아름답게 만든 것이다. 어느 날 부처님이 이런 모습을 보았다. 부처님은 수행자의 삶이 아니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이다.” (Vin.I.96)라고 했다.

 

오두막을 만드는 과정에서 나무와 풀, 그리고 곤충이나 벌레와 같은 생명체를 다치게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그 어리석은 자에게 뭇삶에 대한 자애와 연민과 불상해가 없는 것이 아닌가?”(Vin.III.42)라며 오두막을 부수라고 말했다. 그리고서는 수행승들이여, 순전히 진흙으로 만든 오두막을 지어서는 안된다. 짓는다면 악작죄를 저지르는 것이다.”(Vin.III.42)라고 했다.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은 수행승은 산천에 있는 초목하나도 다치게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주지 않는 것을 먹어서도 안된다. 설령 산천에 있는 나무열매도 따 먹어서도 안된다. 심지어 땅에 떨어진 열매도 먹어서는 안된다.

 

마하 띳싸 장로와 망고열매 이야기

 

수행승은 땅에 떨어진 주인 없는 열매를 먹어서도 안된다. 이는 청정도론에서 찌라꿈바 사원에서 지내던 마하 띳싸 장로가 망고를 먹었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게송으로는 믿음으로 출가한 총명한 행자라면, 삿된 구함에 마음을 일으키지 말고 생활을 정화해야 한다.”(Vism.1.122)라고 했다. 그러나 이 게송은 주석이 없으면 이해하기 힘들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을 보면 암바바다까 마하 띳싸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각주 해 놓았다. 초기불전연구원본에는 각주가 없다.

 

 

빠라맛타만주싸에 의하면, 그는 기근이 들었을 때 여행을 했다. 음식을 먹지 못해 피곤하고 허약해졌다. 그는 열매로 뒤덮인 망고나무 아래에 누웠다. 여기저기 망고가 떨어졌다. 주인 없는 망고가 근처의 바닥에 떨어졌으나, 그것들을 집어서 줄 누군가가 없었기 때문에 먹지 못했다. 그때 그보다 나이가 많은 한 재가신도가 그가 지친 것을 알고 그에게 망고즙을 마시도록 주었다. 그는 그를 등에 업고 집으로 데려갔다. 그때 그 장로는 그에게 설법을 했다. 그리고 그의 등 위에 있을 때 앎과 봄을 통해서 길을 따라 거룩한 경지를 얻었다.”(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 청정도론, 306번 각주)

 

 

장로와 망고열매 이야기를 보면 잔잔한 영상을 접하는 것 같다. 계행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는 장로와 장로를 등에 업고 가는 재가신도의 아름다운 모습이 연상된다. 그런데 암바바다까 마하 띳싸 이야기는 청정도론에서 한번 더 언급되어 있다. 그것은 이러한 참사람의 새김을 버리지 않고 목숨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학습계율을 어기지 않고 무한청정적 계행에 의지하여 재가신도의 등에 업혀 거룩한 경지를 얻었다.”(Vism.1.133)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장로는 계행을 지키고자 무척 노력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가르침대로 살고자 한 것이다. 배가 고파도 떨어져 있는 망고열매를 주어 먹지 않았다. 주지 않은 것을 취하는 것은 도둑질이기 때문이다. 재가신도가 주어서 공양으로 올렸을 때 비로서 먹을 수 있었다. 다만 즙으로 해서 마신 것이다. 아마 오후불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로는 기진맥진하여 탈진한 상태였기 때문에 재가신도의 등에 업혔다. 재가신도의 집에 도착해서는 법문을 해 주었다. 재가신도는 물질로 보시하고, 출가 수행승은 가르침을 알려 준 것이다. 아마 법문을 하고 나서 아유 완노 수캉 발랑이라고 축원했을지 모른다.

 

축원 중에 최고의 축원은 장수축원일 것이다. 그런데 법구경에서는 장수축원 뿐만 아니라 네 가지 축원문이 있다. 이는 “예경하는 습관이 있고 항상 장로를 존경하는 자에게 네 가지 사실이 개선되니, 수명과 용모와 안락과 기력이다.(Dhp.109)라는 게송이다. 장로에게 공양하고 예경 했을 때 아유 완노 수캉 발랑(āyu vaṇṇo sukha bala)” (Dhp.109)이라고 축원해주는데, 이 말은 “장수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건강하기를!”라고 바라는 것이다. 오래오래 살아서 오래 산만큼 선업공덕을 많이 지으라는 축원문이다.

 

무한청정적 계율에 의지하여

 

장로는 재가신도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땅에 떨어져 있는 주인 없는 망고를 먹지 않은 것은 계율을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긴 것이다. 그래서 목숨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학습계율을 어기지 않고 무한청정적 계행에 의지”(Vism.1.133)했다고 한다. 여기서 무한청정적 계율(apariyantapārisuddhisīla)’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계율에는 여려 가지가 있다. 청정도론에서는 한정청정적, 무한청정적, 원만청정적, 안식청정적 계율을 설명하고 있다.

 

한정청정적 계율은 오계 등과 같이 숫자로 제한이 있는 계율을 말한다. 이백개가 넘는 비구계나 비구니계도 한정청정적 계율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무한청정적 계율은 숫자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숫자로 한정되어 있지 않은 계율을 말한다.

 

본래 계율이라는 것은 수범수제로 된 것이다. 죄를 범하면 계율이 생겨나는 식이다. 그렇게 하다 보니 율장이 방대해졌다. 세세한 것까지 규정하다 보니 대품, 소품, 비구계, 비구니계, 부기 로 다섯 부로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죄를 지으면 계속 생겨나게 되어 있다. 이를 죄를 악작죄(惡作罪: dukkaa)’라고 한다.

 

악작은 잘못된 행위를 말한다. 그런데 악작을 계율로 만든다면 끝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숫자로 한정된 것을 한정청정적 계율이라 하고 숫자로 규정되지 않은 것에 대하여 무한청정적 계율이라고 한다.

 

사소한 잘못에서 두려움을 보는 것도 무한청정적 계율에 해당될 것이다. 사실 모든 행위가 무한청정적 계율에 해당된다. 무한청정적 계율을 만든다면 얼마나 될까? 청정도론에서는 구천 하고도 또한, 백팔십 꼬띠와 오백만 하고도 또한,

삼만육천이 있다.”(Vism.1.132)라고 했다. 무한청정적 계율을 만든다면 수없이 많다는 것이다.

 

계율을 한없이 만들 수 없다. 그래서 한정적으로 만든 것에 대하여 이들 제어의 계율들은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서 설했고, 율장 가운데서는 생략을 통해 학습계율로 시설되었다.(Vism.1.132)라고 했다. 오늘날 숫자로 한정되어 있는 것이 비구계나 비구니계와 같은 학습계율인 것이다.

 

무한청정적 계율을 지키려면 모든 행위에 있어서 두려워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수행승은 사소한 행위에서도 두려움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윤회의 두려움이다. 그래서 수행승을 뜻하는 빅쿠라는 말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윤회에서(samsare) 두려움을(bhayam) 보기(ikkhati) 때문에 비구(bhikkhu)라 한다.(Vsm1.7)”라고 했다.

 

재가신도의 등에 업혀 아라한이

 

사소한 행위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나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는 계행을 자연스럽게 지킬 것이다. 허기에 지친 장로가 망고열매가 떨어져 있음에도 주어 먹지 않은 것은 무한청정계율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비록 숫자로 한정된 계율에는 들어가 있지 않지만 목숨을 걸고 청정한 삶을 살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아버지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니고

친지도 아니고 친척도 아니다.

계행을 지닌 자인 까닭에 그대를 위해

이와 같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외경을 일으켜서

이치에 맞게 사유하니

그대의 등에 업혀 있으면서

거룩한 경지를 얻었다.”(Vism.1.133)

 

 



마하 띳싸 장로는 재가신도의 등에 업혀 가면서 아라한이 되었다. 목숨 걸고 계행을 지킨 과보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무한청정적 계율은 숫자로 다 언급할 수 없다. 그럼에도 초기경전과 율장에서는 문자로 표현해 놓았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수행승은 농사짓지 말라는 것이다.

 

밭 가는 수행자

 

수행승과 은둔자는 차이가 있다. 탁발에 의존하면 수행승(Bhikkhu)이고 농사에 의존하면 은둔자라고 볼 수 있다. 깊은 산속에서 텃밭을 일구고 살아 가는 수행자가 있다면 마치 TV에서 보는 자연인처럼 은둔자라고 볼 수 있다.

 

은둔자의 삶을 살다보면 사실상 재가의 삶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농사짓다 보면 아내를 맞을 수도 있고, 아내가 있으면 자식이 생겨나는 것이다. 세월이 흐른 어느 시점에서 처음 의도했던 것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수행승도 밭을 갈 수 있다. 텃발을 가져야만 밭을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밭을 가는 것이다. 그래서 바라문 농부가 “그대는 밭을 가는 자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그대가 밭을 가는 것을 보지 못했네. 밭을 가는 자라면 묻건대 대답하시오. 어떻게 우리는 그대가 경작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Stn.76)라고 물었을 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믿음이 씨앗이고, 감관의 수호가 비며,

지혜가 나의 멍에와 쟁기입니다. 

부끄러움이 자루이고, 정신이 끈입니다.

그리고 새김이 나의 쟁기 날과 몰이막대입니다.(stn77)

 

“몸을 수호하고 , 말을 수호하고,

배에 맞는 음식의 양을 알고,

나는 진실을 잡초를 제거하는 낫으로 삼고,

나에게는 온화함이 멍에를 내려 놓는 것입니다.(stn78)

 

“속박에서 평온으로 이끄는

정진이 내게는 짐을 싣는 황소입니다.

슬픔이 없는 곳으로

도달해서 가서 되돌아오지 않습니다.(stn79)

 

“이와 같이 밭을 갈면

불사의 열매를 거두며,

이렇게 밭을 갈고 나면

모든 고통에서 해탈합니다.(stn80)

 

 

수행자는 마음의 밭을 갈아야 한다. 텃밭을 가꾸며 은둔자로서 삶을 산다면 일하는데 시간을 많이 빼앗길 것이다. 갈 길은 먼데 구족계 수지자로서 해서는 안될 일을 하는 것이다.

 

테리가타를 보면 소녀 로히니가 아버지와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아버지가 그들은 일하기 싫어해서 게으르고 남들이 보시한 곳으로 살고 잔뜩 기대하며 맛있는 것만을 원하는데, 왜 네게 수행자가 사랑스러운가?”(Thig.273)라며 물었다. 이에 훗날 장로니가 된 로히니는 일하기 좋아하며 게으르지 않고 최상의 일을 행하는 자로서 그들은 탐욕과 성냄을 보냅니다. 그 때문에 저는 그들이 사랑스럽습니다.”(Thig.274)라고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수행승들은 일하기 싫어 하는 게으른 사람으로 비추어진 것 같다. 부처님 당시나 오늘날이나 이런 생각에는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불교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 다면 걸식하며 사는 수행승들은 게으름뱅이거나 사회의 무능력자로 볼지 모른다. 그러나 진정한 수행자는 마음의 밭을 가는 수행자이다.

 

마음 밭을 가는데 있어서 게으름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의 목숨은 짧다. 훌륭한 사람이라면 그 목숨을 경시하라. 머리에 불이 붙은 듯 살아야 하리. 죽음이 다가오는 것은 피할 수 없네.(S4.9)라고 했다. "밤낮으로 피곤을 모르는 현자들은 남김없이 완전한 열반에 들어 남김없이 괴로움을 뛰어 넘는다.(It.92)라고 했다. 진정한 수행자는 마음밭을 가는 자이다.

 

 

2020-05-0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