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복의 악순환을 끊으려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있다. 함무라비법전에 있는 말이다. 상대방을 눈을 해쳤다면 눈을 뽑아 버리는 것이고, 이빨을 해쳤다면 이빨을 뽑아 버리는 가혹한 형벌이다. 그때 당시에는 이렇게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이 아마 가장 공평한 판결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살인을 했을 때 어떻게 될까? 함무라비 법전식으로 따지면 당연히 사형이다.
오늘날 사형제도는 거의 폐지되는 수순으로 가고 있다. 상당수 나라들이 사형제를 폐지하고 있다. 눈에는 눈식으로 대응하는 사형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얼마되지 않는다. 왜 이렇게 바뀌었을까? 그것은 사람들의 의식수준과도 관련이 있다. 또 민주화와도 관련이 있다. 과거 봉건제나 군주제 시대 때와는 다르게 인권이 크게 강화되었다. 그래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보복적 판결은 보이지 않는다.
인내의 실천에 대한 가르침
보복은 보복을 부른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오랜 적대관계에서도 볼 수 있다. 팔레스타인에서 테러를 감행하면 이스라엘은 전투기 등을 동원하여 즉각 보복에 나선다. 팔레스타인도 가만 있지 않는다. 자살폭탄 테러와 같이 더 큰 보복으로 맞서기 때문이다. 보복의 악순환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다.
“수행승들이여, 인내의 실천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의 어떤 사람은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고, 분노를 분노로 갚지 않고, 욕지거리를 욕지거리로 갚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인내의 실천이라고 한다.”(A4.164)
부처님의 인내의 실천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를 인내도(忍耐道)라고 할 수도 있다. 인내바라밀이라고 할 수도 있다.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고, 분노를 분노로 갚지 않고, 욕지거리를 욕지거리로 갚지 않는다고 했다. 인내도가 없는 사람은 반대로 “모욕을 모욕으로 갚고, 분노를 분노로 갚고, 욕지거리를 욕지거리로 갚는다.”가 될 것이다. 오늘날 실시간 소통의 시대에 딱 맞는 가르침이라고 본다.
실시간 소통의 대명사는 카톡이나 페이스북 등과 같은 에스엔에스이다. 마치 전화 통하 하는 것처럼 즉각즉각 반응을 보인다. 어떤 정치인은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구독자가 깐죽거리며 비난하자 즉각반응을 보이자 막말과 욕설을 해 대는 것이었다.
막말과 욕설을 하면 그 순간은 시원할 것이다. 그러나 쾌감은 오래 가지 않는다. 심각한 후유증을 남긴다. 왜 그런가? 분노에는 양면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뿌리엔 독이 있지만 꼭지에 꿀이 있는 분노”(S1.71)라고 했다.
분노하면 그 순간 쾌감을 느낀다. 그러나 몸에서는 독이 나온다. 그 독은 자신을 파멸로 이끈다. 분노하면 인간관계가 파탄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정치인은 선거를 앞두고 자신의 유튜브채널에서 막말과 욕설을 함에 따라 결국 사과해야 했고, 그 일로 인하여 결국 정치판을 떠나게 되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욕지거리를 욕지거리로 갚고, 분노를 분노로 갚고, 모욕을 모욕으로 갚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라면 인내해야 한다. 마치 함무라비 법전식으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으로 대응하면 전근대적이다. 인격적으로 성숙했다면 인내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고, 분노를 분노로 갚지 않고, 욕지거리를 욕지거리로 갚지 말라고 했다. 보복을 금지하는 것이다.
개장군 도쿠가와 츠나요시(德川綱吉)이야기
보복금지와 관련하여 ‘개장군’ 이야기가 있다. 일본 도쿠가와 막부시대 때 제5대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德川綱吉, 1646년~1709)를 말한다. 도쿠가와 츠나요시를 왜 개장군이라고 했을까? 그때 당시 시대적 배경과도 관련이 있다.
도쿠가와 츠나요시가 장군이 되었을 때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끼가하라 전투(1600년)로 전토를 평정한지 약 백년 가량 되었을 때이다. 백년간의 전국시대를 거쳐 백년간의 평화시대가 전개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무사들이 할 일이 없어졌다.
무사의 상징은 칼이다. 그러나 평화의 시대에 칼은 그저 폼으로 차고 다니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무술 수련을 했어도 써 먹을 데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지나가는 개라도 베어서 자신의 실력을 확인하고자 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츠나요시는 ‘동물살상금지령’을 내렸다. 일본역사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츠나요시는 유학에 정통했다. 그래서 유교의 도덕적 덕목을 정치에 반영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그는 생명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겼다. 그래서 지나가는 개도 죽이지 말라고 했다. 이후 츠나요시는 ‘개장군(犬公方)’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개장군 츠나요시가 집권시절 커다란 사건이 벌어졌다. 그것은 억울하게 죽은 주군을 복수하기 위하여 47인의 사무라이들이 복수극을 벌인 것이다. 일본에서는 추신구라(忠臣藏)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가부키 공연으로도 유명하다.
개장군은 추신구라사건 처리에 고심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관련자 전원에게 할복을 명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보복의 악순환을 막기 위해서였다.
츠나요시 당시 일본에서는 주군이 억울하게 죽으면 가신들이 복수하는 것이 아름다운 미덕이었다. 그러나 보복은 보복을 낳는다. 보복을 당한 측에서는 복수를 맹세할 것이다. 보복의 악순환이다. 마치 월왕구천과 오왕부차의 와신상담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개장군 츠나요시는 보복의 뿌리를 뽑아 버리기 위하여 가담자 전원에게 할복을 명한 것이다.
율장대품 디가부이야기(Dīghāvuvatthu)
보복은 보복을 부른다. 싸움에서 이긴 자는 원한을 부른다. 그래서 “승리는 원망을 낳고 패한 자는 잠을 못 이루네.”(S3.14)라고 했다. 싸움에서 패한 자는 복수의 칼날을 갈 것이다. 죽이는 자는 죽임을 당하고 이기는 자는 패한다. 돌고 도는 것이다. 보복의 고리를 끊어 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율장대품에 디가부이야기(Dīghāvuvatthu)(Vin.I.341)가 있다. 꼬삼비다발에 실려 있는 이야기로서 복수에 대한 것이다. 꼬살라국의 왕자 디가부가 자신의 부모를 무참하게 살해한 까시국의 브라흐마닷따에게 복수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 사실을 눈치챈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사랑하는 디가부야, 너는 길게도 짧게도 보지 말라.
사랑하는 디가부야, 원한은 원한으로 쉬어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디가부야, 원한은 원한을 여읨으로써 쉬어진다.”(Vin.I.345)
아버지는 원한은 원한으로 갚을 수 없다고 했다. 복수하지 말라는 것이다. 만약 원한을 원한으로 갚으면 어떻게 될까? 복수를 하면 복수를 당한 쪽에서는 보복하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죽이는 자는 죽임을 당하게 되고 이긴 자는 패하게 된다. 싸움 그칠 날 없는 것이 된다. 그래서 디가부의 아버지는 간곡하게 “원한은 원한을 여읨으로써 쉬어진다.”라고 말했다.
디가부 왕자는 아버지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원수를 갚기로 했다. 부모를 무참하게 살해한 까시국의 왕 브라흐마닷따에게 복수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까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왕의 측근이 되었다. 그것도 신뢰할 수 있는 측근 중의 측근이 된 것이다. 마치 영화의 한장면을 보는 것 같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어느 날 왕이 사냥을 가게 되었는데 본진과 떨어져서 둘만남게 되었다. 왕은 피곤 했는지 디가부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그리고 이내 잠에 빠졌다. 디가부에게는 복수할 절호의 찬스가 온 것이다.
디가부는 부모의 원수를 갚고자 칼을 빼 들었다. 칼로 목을 베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아버지가 처형 직전에 한 말이 떠 올랐다. 그 말은 “사랑하는 디가부야, 너는 길게도 짧게도 보지 말라. 사랑하는 디가부야, 원한은 원한으로 쉬어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디가부야, 원한은 원한을 여읨으로써 쉬어진다.”(Vin.I.345)라는 말이었다. 이 말이 떠 오르자 디가부는 칼을 다시 칼집에 넣었다.
왕은 꿈속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디가부를 보았다. 이에 디가부는 자신이 왕을 죽이려고 했음을 말했다. 그리고 다시 죽이려고 하자 왕은 벌벌 떨면서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디가부는 조건을 제시했다. 아버지의 마지막 간청도 있고 해서 “제가 어떻게 폐하의 목숨을 살려줄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저의 목숨을 살려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왕은 화답으로서 “사랑하는 디가부야, 그대가 나의 몸숨을 살려다오. 내가 그대의 몸숨을 살려 주마.”라고 말했다.
디가부와 브라흐마닷따왕은 서로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했다. 만일 디가부가 부모의 원수을 갚기 위해 왕을 죽였다면 자신도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죽이지 말자고 약속한 것이다. 보복의 악순환고리를 끊어 버린 것이다. 서로가 윈윈한 것이다.
율장대품에서는 디가부의 아버지가 한 말에 대한 해설이 있다. 그 중에서도 “너는 길게도 짧게도 보지 말라.”라고 했다. 이 말은 어떤 의미일까? 이 말을 포함하여 아버지가 한 말에 대하여 디가부는 왕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폐하, 아버지께서 돌아 가실 때에 ‘길게도 말라.’라고 한 것은 ‘오래 원한을 품지말라.’는 것입니다. 폐하, 이것을 두고 아버지께서 돌아 가실 때에 ‘길게도 말라.’라고 한 것입니다. ‘폐하, 아버지께서 돌아 가실 때에 ‘짧게도 말라.’라고 한 것은 ‘급하게 친구와 갈라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폐하, 이것을 두고 아버지께서 돌아 가실 때에 ‘짧게도 말라.’라고 한 것입니다. 폐하, 아버지께서 돌아 가실 때에 ‘사랑하는 디가부야, 원한은 원한으로 쉬어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디가부야, 원한은 원한을 여읨으로써 쉬어진다.’라고 한 것은 ‘폐하께서 나의 부모를 죽였다고.’라고 제가 폐하 목숨을 빼앗는다면, 폐하를 위하는 사람들이 저의 목숨을 빼앗을 것이고, 저를 위하는 사람들이 다시 그들의 목숨을 빼앗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원한은 원한으로 쉬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폐하는 저의 목숨을 살려주었고, 저는 폐하의 목숨을 살려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해서 원한은 원한의 여읨에 의해 쉬어졌습니다. 폐하 이것을 두고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에 ‘사랑하는 디가부야, 너는 길게도 짧게도 보지 말라. 사랑하는 디가부야, 원한은 원한으로 쉬어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디가부야, 원한은 원한을 여읨으로써 쉬어진다.’라고 한 것입니다.”(Vin.I.348)
부처님이 수행승들에게 디가부이야기를 들려준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꼬삼비에서 승단의 분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분열은 부처님도 말리지 못했다. 이에 싸움과 투쟁과 분쟁을 일삼는 수행승들에게 디가부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수행승들이여, 그만하라. 다투지 말고 언쟁하지 말고 논쟁하지 말고 분쟁을 일으키지 말라.”(Vin.I.348)라고 했다.
수행들은 부처님의 당부에도 말을 듣지 않았다. 세상에 부처님 말도 듣지 않은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 이 어리석은 자들은 몽매하다. 이 자들은 설득하기가 쉽지 않다.”(Vin.I.348)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떠났다.
승단에서 수행승들 간에 다툼이 일어났을 때 그치지 않는다면 부처님도 어찌 할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은 원한은 원한으로 갚지 않는 것이고, 한은 원한을 내려 놓았을 때 원한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다툰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도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부처님은 꼬삼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진리는 심플하다
개장군이야기와 디가부이야기를 보면 보복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자 하는 것이다. 원한을 원한으로 갚지 않는 것이다. 개장군 츠나요시는 47인의 사무라이들에게 할복을 명함으로서 보복의 고리를 끊었다. 개도 죽이지 말라고 하여 개장군으로 잘 알려진 츠나요시는 가담자 전원을 죽임으로서 연결고리를 끊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달랐다. 디가부이야기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살인까지 이르지 않게 한 것이다. 서로 원한을 내려 놓음으로서 보복에 대한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원한을 원한으로 갚는다는 것은 가장 폭력적이고 원시적인 방법이다. 함무라비 법전시대때나 통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근세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일대일 대응방식은 유효 했다. 아니 최근까지도 그랬다. 사형제가 폐지 전까지는 유효할 것이다. 살인한 자에게 사형을 처하는 것은 원한을 원한으로 갚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욕설하는 자에게 욕설로 맞서는 것은 하수나 하는 방법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라면 욕설하는 자에게 욕설하는 것이 아니라 욕설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고, 분노를 분노로 갚지 않고, 욕지거리를 욕지거리로 갚지 않는다.”(A4.164)라고 한 것이다. 이 말은 원한을 원한으로 갚지 않는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이런 논리는 모든 면에서 통용된다.
근심이 있는 사람이 있다. 근심한다고 해서 그 근심이 없어질까? 만일 근심을 해서 근심이 없어진다면 근심이 없어 져서 좋을 것이다. 여기 슬픈 사람이 있다. 슬퍼만 하고 있다고 해서 슬픔이 사라질까? 그래서 “미혹한 자가 자기를 해치며, 비탄해한다고 해서 무슨 이익이라도 생긴다면, 현명한 자라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Stn.583)라고 한 것이다.
현명한 자들은 근심과 걱정을 하지 않는다. 또 슬퍼하지도 않는다. 근심한다고 하여 근심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걱정한다고 걱정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또 슬퍼한다고 하여 슬픔이 가시는 것도 아니다. 현자들은 근심하고 걱정하고 슬퍼하기 보다는 근심을 놓아 버리고, 걱정을 놓아 버리고, 슬픔을 놓아 버려서 근심과 걱정과 슬픔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원한은 원한의 여읨으로 그치나니 이것은 오래된 진리이다.”(Dhp.5)라고 했다.
진리는 어렵지 않다. 진리는 매우 심플하다. 진리는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다. 단지 내려 놓는 것이다. 내려 놓는 것이 진리인 것이다. 원한은 원한을 내려 놓았을 때 그치듯이, 근심은 근심을 내려 놓았을 때 근심이 그치고, 슬픔은 슬픔을 내려 놓았을 때 슬픔이 그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으로 대응한다.
싸움에서 이기려면
사람에 대하여 좋고 싫음이 분명한 사람들이 있다. 좋으면 ‘죽어라’하고 좋아하고, 한번 싫으면 ‘죽어도’ 싫은 것이다. 이렇게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분명하면 쾌불쾌 역시 분명하다. 자신에게 조금이라고 불편하게 하거나 불쾌하게 대하면 보복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여기에 말려 들면 하수가 된다.
화내는 이에게 화를 내지 말라고 했다. 상대방은 지금 나에게 타격을 가하기 위하여 한손에는 숫불을 들고 있고 또 한손에는 똥을 들고 있다. 만일 반응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숯불을 맞을 것이고 똥바가지를 뒤집어쓸 것이다. 그러나 현명한 자들은 이런 밥상을 받지 않는다. 일체대응을 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연민의 마음만 낼 것이다. 그렇게 했을 경우 상대방의 숯불을 든 손은 타 들어 갈 것이고, 또 한쪽에서는 구린내가 진동할 것이다. 그래서 “분노하는 자에게 다시 분노하는 자는 더욱 악한 자가 될 뿐, 분노하는 자에게 더 이상 화내지 않는 것이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네.”(S7.2)라고 했다.
싸움에서 이기려면 인내해야 한다. 화내면 지는 것이다. 흥분해도 지는 것이다. 화내고 흥분하며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으로 반응한다면 하수이다. 싸움을 하면 백전백패하게 된다. 백전백승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인내하는 것이다. 특히 힘을 가지고 있을수록 인내해야 한다. 힘있는 자가 참는 것이다. 그래서 “참으로 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힘 없는 자에게 인내하네. 그것을 최상의 인내라 부르네. 힘 있는 자는 항상 참아내네.”(S11.5)라고 했다. 이처럼 힘 있는 자가 인내하는 것을 ‘제석천의 리더십’이라고 부를 수 있다.
제석천의 리더십이 있다면 아수라의 리더십이 있을 것이다. 아수라의 리더십은 힘으로 제압하는 것이다. 힘이 있으면 힘을 행사하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으로 대응한다. 원한으로 원한으로 갚는 식이다. 가장 저급한 하수의 리더십이다.
보복의 악순환을 끊으려면
율장대품에서 디가부의 아버지는 “사랑하는 디가부야, 너는 길게도 짧게도 보지 말라.”라고 당부했다. ‘길게도 말라.’라고 한 것은 ‘오래 원한을 품지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짧게도 말라.’라고 한 것은 ‘급하게 친구와 갈라서지 말라.’는 것이다. 길게도 말고 짧게도 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기분에 따라 또는 감정에 따라 호불호와 쾌불쾌에 휘둘린다면 하수이다. 오래 원한을 품지 말아야 하고, 짧게 갈라서지 말아야 한다. 그 바탕에는 인내가 깔려 있다. 원한을 원한으로 갚지 않는 것이다. 특히 힘 있는 사람이 인내해야 한다.
힘 없는 사람은 항상 인내하게 되어 있다. 힘 있는 사람이 인내해야 평화와 행복이 온다. 리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리더는 힘 있는 사람이다. 그럴수록 겸손해야 한다. 그리고 잘 들어주어야 한다. 이른바 ‘겸청(兼聽)의 리더십’이다. 이는 다름 아닌 인내의 리더십이다.
누구나 힘이 있으면 힘을 과시하고 싶어진다. 힘을 가지면 힘을 주체하지 못하여 힘을 행사하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권력을 가지게 되면 권력을 행사하고 싶어진다. 마치 조폭의 주먹이 근질근질 한 것과 같다. 이런 현상을 이번 총선에서 승리한 민주당 열성 지지자들에게서 본다.
과거에 당했기 때문에 보복해야 한다면 하수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은 그 어떤 경우에도 원한은 원한으로 갚아서는 안된다고 했다. 원한을 내려 놓음으로서 원한이 그친다고 했다. 이렇게 진리는 단순하다. 보복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원한을 내려 놓아야 한다.
2020-05-2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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