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잘못은 보기 쉬워도 자신의 잘못은
승가에 대한 글을 쓰면 지적 받는다. 재가자가 스님의 허물에 대하여 말 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는 것 같다. 아마도 전통적인 불교관에 따른 것이라 본다.
대승 범망경에서는 삼보를 비방하지 말라고 했다. 여기서 삼보는 불, 법, 승 삼보를 말한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는 승을 스님으로도 보기 때문에 승가에 대하여 비판하는 것을 스님에 대한 비난으로 보는 것 같다. 설령 그것이 원리에 따른 정당한 비판일지라도 스님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불편한 것을 넘어서 불쾌를 유발하는 것 같다.
음주계에 대한 글을 하나 썼다. 페이스북에서 어느 스님이 막걸리를 하루에도 몇 통씩 매일 마신다는 글을 보고서 이에 자극받아 쓴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글이 누군가에게는 불편과 불쾌를 야기한 것 같다.
지적한 님은 성철스님과 경봉스님의 말을 인용하여 반론을 펼쳤다. 성철스님은“너 밥그릇 뺏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시비하지 말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경봉스님은 “네 밥그릇이나 씻어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부처님 가르침에 답이 있다. 성철스님이나 경봉스님이 한 말은 남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는 뜻으로 본다. 먼저 자신의 허물을 보라는 말과 같다. 그런데 이런 말이 법구경에 있다는 것이다.
“남의 잘못은 보기 쉬워도
자신의 잘못은 보기 어렵다.
남의 잘못은 왕겨처럼 키로 켜지만,
자신의 잘못은 덮어 버린다.
교활한 도박꾼이
잘못 던진 주사위를 감추듯.”(Dhp.252)
남의 잘못은 보기 쉬워도 자신의 잘못은 보기 어렵다고 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발견하기 쉽지만 자신의 잘못은 아무리 큰 것이라도 발견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남의 잘못이나 태만은 쉽게 눈에 띈다. 이를 참지 못하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다. 조용히 당사자에게 이야기해 주면 문제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저기 알리고 다닌다면 문제가 된다. 이에 대하여 “왕겨처럼 키로 켠다.”라고 했다. 곡식을 키로 켜서 바람에 날려 보내는 것처럼, 승가 안에서 잘못을 퍼뜨리는 것을 말한다.
“남의 잘못을 보고서
항상 혐책의 상념을 지니면,
그의 번뇌는 증가하니,
번뇌의 부숨과는 거리가 멀어진다.”(Dhp.253)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그에게서 잘못을 보았기 때문이다. 잘못을 보았기 때문에 미워함을 넘어서 혐오한다. 그래서 항상 참견한다. “이것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으로 떠벌리고 다님을 말한다. 그래서 “혐책의 상념(ujjhāna saññā)을 지니면 번뇌는 증가한다.”고 했다.
사람을 혐오하면 어떻게 될까? 마음이 동요될 것이다. 혐오는 분노에 뿌리 박은 마음이다. 이는 다름 아닌 번뇌이다. 남의 잘못만을 찾아서 말하고 다니는 자는 번뇌가 많은 자이다. 이런 자는 “명상수행에서 어떠한 원리도 계발하기 힘들다.”(DhpA.III.377)고 했다.
이 게송과 관련하여 인연담이 있다. 이는 ‘장로 웃자니싼니와 관련된 이야기(ujjhānasaññīttheravatthu)’를 말한다.
장로 웃자니싼니는 남의 결점만 찾고 다녔다. 그래서일까 빠알리사전을 보면 웃자니싼니(ujjhānasaññī)에 대하여 ‘willing to blame’이라고 풀이해 놓았다. 이는 혐책의 상념이라는 뜻을 지닌 ‘웃자나 산냐(ujjhāna saññā)’에서 유래한 말이다. 늘 비난거리를 찾는 자를 말한다.
장로는 여기저기서 지적질을 했다. 장로는 “이분은 이와 같이 속옷을 입고 이와 같이 겉옷을 입는다.”라는 식으로 잘못만 찾아 다닌 것이다. 지극히 사소한 것도 눈에 띄면 지적질한 것이다. 이를 보다 못한 수행승들이 부처님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무엇보다 해야 할 일을 하면서 그와 같이 충고하는 자는 혐책하는 자가 아니다. 혐책하는 자는 남의 잘못을 찾아 그것을 말하면서 돌아다니는데, 그러한 자는 특별히 선정 등의 어느 하나도 성취하지 못한다.”(DhpA.III.376-3777)
인연담 중에서 일부만 옮긴 것이다. 분명한 것은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충고하는 자는 혐책하는 자가 아니다.”라는 사실이다. 자신의 할 바를 다하는 자가 지적하면 이는 진심어린 충고라는 말이다.
진심어린 충고를 하는 자가 있다. 이는 “잘못을 지적하는 님, 꾸짖어 충고하는 님, 현명한 님, 숨겨진 보물을 일러주는 님을 보라. 이러한 현자와 교류하라.” (Dhp.76)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그럼에도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남의 잘못만 지적한다면 어떤 소리를 들을까? 아마 “너나 잘하세요!”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불음주계에 대한 글을 썼다. 어느 스님이 매일 막걸리를 마신다고 하여 이를 비판한 글이다. 어느 특정한 스님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 승가에 만연되어 있는 음주문화에 대하여 고발하고자 한 것이다.
승가에는 곡차문화가 있다. 술을 곡차라 하여 아무렇지도 않게 마시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느 한 스님이 곡차를 즐겨 마셨을 때 전체 스님을 욕보일 수 있다.
“곡주나 과일주 등에
취기있는 것에 취하는 사람,
그 사람은 바로 이 세상에서
자신의 뿌리를 파낸다.”(Dhp.247)
수행자가 음주를 하면 자신의 뿌리를 파내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는 무슨 말일까?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과 같다. 마치 밭에 작물이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과 같다. 그런데 술을 마시면 마치 농작물의 뿌리를 뽑아 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음주를 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뿌리내리지 못하고 저 세상에서도 뿌리내리지 못한다. 스스로 뿌리를 파 버렸으니 의지할 데가 없어서 말라 죽을 것이다. 그래서 곡주나 과일주 등에 취해서 사는 자는 자신을 파멸시킨다고 했다.
스님이나 승가에 대한 비판을 종종한다. 주로 경장이나 율장에 근거한 것이다. 이런 행위가 스님이나 승가를 모독하는 것으로 구업이 될 수 있다. 심하면 “너나 잘 하세요!”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스님의 허물은 작은 것도 크게 보인다. 왜 그럴까? 청정한 삶을 사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묻지 않는 사람, 언제나 청정함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머리털만큼의 죄악이라도 구름처럼 크게 보이는 것이네.”(S9.14)라고 했다. 승가의 잘못 역시 작은 것이라도 구름처럼 크게 보인다.
스님들은 청정한 삶을 살아간다. 이백수십가지 비구계를 받은 스님들은 청정한 삶 그 자체가 될 수밖에 없다. 스님을 보면 합장공경하고 때에 따라 공양하는 것도 청정한 삶을 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곡차를 마시는 등 계를 가볍게 여기는 스님이 있다면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은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충고하는 자는 혐책하는 자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재가자가 승가의 잘못을 지적하면 허물이 되고 구업이 되는 것 같다. 나는 스님의 허물과 승가의 잘못을 지적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2021-03-2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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