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장의 가르침

카니까사마디(瞬間三昧)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9. 6. 13. 16:42

 

카니까사마디(瞬間三昧)에 대하여

 

 

지금 건강한 것에 감사해야 한다. 몸에 이상이 생기면 괴롭다. 육체적 고통은 고통 그 자체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어서 낫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런데 장기가 망가져서 재생불능이라면 어떻게 될까? 꼼짝없이 죽음을 맞이 해야 될 것이다. 주변에서는 그렇게 떠난 사람들이 많다.

 

부처님은 빤히 얼굴만 쳐다 보는 박깔리에게 한마디 했다. 부처님의 32 80종호에 반하여 얼굴만 쳐다 보는 박깔리에게 “박깔리여, 그만두어라. 나의 부서져 가는 몸을 보아서 무엇하느냐? (Ala vakkali. Ki te iminā pūtikāyena diṭṭhena, yo kho vakkali)”(S22.87)라고 말했다. 여기서 부서지다라는 말은 ‘pūtikāyena’을 번역한 것이다. 빠알리어 ‘pūtikāya’‘the body which contains foul thing’의 뜻으로 오염으로 가득찬 육체라는 의미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썩어 문들어질 이 몸이라고 번역했다.

 

오로지 육체의 아름다움에 빠져 있는 박깔리에게 몸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찬 혐오스런 것이고, 더구나 부서지는 것이라고 했다. 마치 오래된 자동차의 부품이 닳아 낡아서 부서지는 것과 같다. 부서지면 어느 순간에 멈추어 버릴 것이다. 그래서 몸에 집착하지 말고 가르침에 집중하라고 했다.

 

부처님은 제자에게 말하는 것을 잘 기억하고 사유하고 되새기어서 내 것으로 만들라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박깔리여,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박깔리여, 참으로 진리를 보면 나를 보고 나를 보면 진리를 본다. (yo kho vakkali, dhamma passati so ma passati, yo ma passati so dhamma passati, dhamma hi vakkali, passanto ma passati. Ma passanto dhamma passati)” (S22.87)라고 했다.

 

초기경전에서는 몸이 무너진다거나 몸이 파괴된다라는 표현이 종종 나온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몸이 부서진다라는 표현이 와 닿는다. 자동차 부품이 하나 둘 망가지듯이, 몸의 장기도 하나 둘 부서지는 것이다.

 

망가지기 전까지는 자동차는 잘 달린다. 그러나 부품이 망가지면 자동차는 서 버린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장기가 부서졌을 때 어느 순간 멈추게 될 것이다. 자동차가 망가지면 부품을 갈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오래 되어서 손을 쓸 수 없을 정도가 되면 폐차처분하게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너무 나이를 먹어 장기가 모두 부서졌을 때 죽음만을 기다리게 된다.

 

부서지기 전에 무언가 이루어 내야 한다. 몸이 튼튼할 때는 건강의 교만으로 인하여 즐기는 삶을 사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주변에서 죽어 가는 사람을 보면 건강의 교만으로 살 수 없다. 몸이 부서지기 전에 공덕을 쌓아야 한다. 보통 지계공덕, 보시공덕, 수행공덕 이 세 가지를 말한다.

 

세 가지 공덕 중에서 가장 수승한 것은 수행공덕이다. 수행공덕을 쌓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아홉 가지 출세간법을 증득하기 위해서이다. , 사향사과와 열반을 말한다.

 

아홉 가지 출세간법이 바로 부처님의 몸이다. 그래서 법신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육체의 아름다움에 빠져 빤히 쳐다 보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몸으로서 부처님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부처님의 몸을 보아야 할까?

 

율장 부기를 보다가 기억해 두고 싶은 구절을 발견했다. 부기 12검문자의 실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계율은 제어를 위한 것이고, 제어는 회한의 여읨을 위한 것이고, 회환의 여읨은 만족을 위한 것이고, 만족은 희열을 위한 것이고, 희열은 평온을 위한 것이고, 평온은 행복을 위한 것이고, 행복은 삼매를 위한 것이고, 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앎과 봄을 위한 것이고, 있는 그대로의 앎과 봄은 싫어하여 떠나기 위한 것이고, 싫어하여 떠남은 사라지기 위한 것이고, 사라짐은 해탈하기 위한 것이고, 해탈은 해탈에 대한 앎과 봄을 위한 것이고, 해탈에 대한 앎과 봄은 취착없이 완전한 열반에 들기 위한 것이다.”(율장 부기 제12)

 


 

율장 부기에 인용된 경전구절은 매우 중요해서일 것이다. 주석을 보면 앙굿따라니까야 ‘AN.V.2’에도 실려 있다. 찾아 보니 무엇을 위하여의 경’(A10.1)이다. 내용을 보면 단계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계율부터 시작하여 열반에 이르기까지 15단계이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앎과 봄을 위한 것이고라는 구절이다.

 

아난다가 세존이시여, 삼매에는 어떠한 이익과 어떠한 공덕이 있습니까?” (A10.1)라며 물어 보았다. 이에 부처님은 아난다여, 삼매에는 있는 그대로 앎과 봄의 이익과 봄의 공덕이 있다.” (A10.1)라고 했다. 여기서 삼매는 어떤 것일까? 선정삼매를 말하는 것일까? 네 가지 선정삼매 정형구에서 있는 그대로 앎과 봄(如實智見)’에 대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알고 본다는 것은 지혜의 영역에 속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현상을 관찰해야 한다.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면 있는 그대로 알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무 빨리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마음은 더 빠르다. 고도로 집중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관찰해야 한다. 이렇게 순간적으로 집중하는 것에 대하여 카니까사마디(khaika samādhi)라고 한다.

 

마음의 청정은 몰입집중으로만 얻는 것은 아니다. 순간집중으로도 가능하다. 몰입집중은 고정된 대상에 집중하지만, 순간집중은 움직이는 대상에 집중하는 것이다. 몰입집중은 사마타에 대한 것이고, 순간집중은 위빠사나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이 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앎과 봄을 위한 것이라고 했을 때, 여기서 삼매는 사마타의 몰입집중이 아니라 위빠사나의 순간집중이라고 볼 수 있다.

 

순간집중으로 인하여 마음의 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 마음의 장애는 탐욕, 성냄, 해태와 혼침, 흥분과 회환, 의심과 같은 오장애를 말한다. 사마타 수행에 따른 몰입집중에서는 오장애는 억압된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의 순간집중에서는 오장애가 극복된다. 순간집중을 통하여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보기 때문이다.

 

대상에 집중하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그런데 마음의 청정은 반드시 사마타의 근접집중이나 몰입집중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는 담마상가니와 같은 논장과 청정도론과 같은 주석서에서도 나타나 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행복을 잉태하여 성숙시키면 찰나삼매와 근접삼매와 근본삼매의 세 가지 삼매를 완성시킨다.(Vism.4.99)라고 되어 있다. 희열과 행복, 안온에 대하여 찰나삼매로도 가능함을 말한다. 이렇게 순간적으로 현전하는 대상에 대하여 집중하는 것에 대하여 찰나삼매 또는 순간삼매(khaika samādhi)라고 한다.

 

 

2019-06-2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