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 센 사람
몇 해 전의 일이다. 불교교양대학 동기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법우님은 친정에서 유일하게 불교를 믿는 사람이라고 했다. 여러 형제들이 있는데 오로지 자신만이 불교를 믿는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친정에 가기만 하면 개종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법우님에게 여동생이 있는데 매우 독실한 기독교신자라고 했다. 여의도에서 가장 큰 교회에 나간다고 했다. 집이 수도권 도시에 있기 때문에 수도권 교회에 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동생의 극성스런 청에 못이겨 몇 번 교회에 갔었다고 한다.
법우님은 교회에 가서 놀랐다고 했다. 분위기가 너무 화기애애 했다는 것이다. 앉아 있으면 저절로 축복받는 기분이라고 했다. 이는 목회자가 그런 분위기를 이끌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법우님은 불교를 고수하고 있다.
법우님에 따르면 종교를 바꾸라고 하는 사람이 또 있었다고 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어머니라는 것이다. 친정어머니는 만날 때 마다 교회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이렇게 법우님은 동생과 어머니로부터 집요하게 권유 받았음에도 자신의 신앙을 지켜 왔다. 이런 법우님에 대하여 친정사람들은 ‘고집이 센 사람’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득세하는 세상이다. 한국은 이미 기독교국가가 된 것이나 다름없다. 개신교와 천주교를 합하여 불교인구를 거의 두 배가량 앞선다. 또한 기독교의 사회적 영향력은 불교의 열 배 이상에 달한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 불교인 보기가 쉽지 않다. 학교 동기동창 모임에 가도 불교인은 극히 드믈다. 이런 현상이다 보니 주변에서 개종 권유가 많은 것 같다. 그럼에도 자신의 신앙을 지켜가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에 대하여 고집이 센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최근 ‘고집이 세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다고 종교에 대한 것은 아니다. 불교 번역용어에 대한 것이다. 빠알리어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인데 어폐가 있다는 것이다. 이 번역어를 이용하여 서너차례 글을 썼다. 그러나 이 번역어에 대하여 대단히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분이 있었다. 그 분은 이 번역어를 쓰지 말라고 했다. 그럼에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랬더니 ‘고집이 센 사람’이라고 말했다.
졸지에 고집이 센 사람이 되었다. 그것도 학계의 권위자에게 들은 말이다. 일개 블로거가 주장한 것이 무력화된 순간이다. 그러나 도저히 승복할 수 없었다. 그래도 지구는 돈 다는 말이 있듯이, 권위자의 말을 받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경전을 근거로 하여 글을 썼다.
관련 분야마다 권위자가 있다. 권위자의 말 한마디에 사람들은 따라 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권위자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블로거는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다. 자유롭게 쓸 수 있다. 권위자의 말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무조건 따를 수 없다. 오류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권위자의 주장을 반박하려면 더 높은 권위에 의존해야 한다. 바로 그것이 경전이다. 학자의 권위가 높다하지만 부처님의 권위만큼 높은 것이 있을까?
부처님의 말씀은 니까야에 기록되어 있다. 구전되어 온 것을 문자화 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니까야에 실려 있는 내용을 백프로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전승과정에서 전승자의 견해가 들어 가 있을 수 있음을 말한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경을 읽어 보면 추가한 흔적도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회의적 시각으로 본다면 이는 법에 대한 의심이 된다.
법에 대한 의심을 하면 성자가 될 수 없다고 한다. 예류자가 되는 조건으로 유신견 타파, 법에 대한 의심극복, 계금취견 극복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 이 중에서 법에 대하여 의심을 하면 어떻게 될까? 부처님 가르침을 믿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대하여 설했는데 “과연 열반이 있는 것일까?”라고 의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법에 대한 의심은 결국 연기법에 대한 의심과도 같다. 연기법을 의심하면 사견에 빠지지 쉽다.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사견을 논파했다. 대표적으로 상윳따니까에 실려 있는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을 들 수 있다. 경에서 부처님은 영원주의와 허무주의가 왜 모순인지에 대하여 연기법으로 논파했다.
사람에 의지해서는 안된다. 권위자에 의지해서도 안된다. 비록 니까야가 백프로 순도 있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수천년 동안 목숨걸고 지켜 온 것이다.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았을 때는 부처님 근본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문제는 자꾸 변형하는 것이다. 새롭게 해석하다 보면 본질에서 크게 어긋난다. 나중에는 전혀 다른 것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근본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유일신교에 근본주의나 원리주의가 있다. 유일신교에서 근본주의나 원리주의를 주장하면 매우 위험하다. 이는 역사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근본주의가 필요하다. 근본으로 돌아가면 가장 안전한 것이다. 근본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다. 근본 가르침을 자신의 입맛대로 해석하여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경전을 만들어 유포했을 때 전혀 다른 불교가 되어 버린다.
불교에서는 근본주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막힐 때는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람에게 의존하기 보다는 법에 의존해야 한다. 권위자에 의존하기 보다는 경전에 의존해야 한다. 블로거가 주장하는 것은 경전에 따른 것이다. 블로거는 권위가 없기 때문에 의존할 데라고는 경전 밖에 없다. 경전을 근거로 글을 쓰다 보니 ‘고집이 센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경전을 근거로 하여 오늘도 내일도 쓸 뿐이다.
2019-12-0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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