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연기적 삶과 환멸연기적 삶
“내가 십년만 젊었다면.” 누구나 이런 말 할 수 있다. 나이가 칠십인 사람이 나이가 육십인 사람에게 이렇게 말 할 수 있고, 나이가 육십인 사람은 오십인 사람에게, 오십인 사람은 사십인 사람에게 이렇게 말 할 수 있다. 이렇게 십년타령하는 것은 인생을 잘 못 살아 왔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과 같다.
십오년전 불교를 정식으로 접하고나서 든 생각은 “내가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라는 생각이었다. 불교를 일찍 몰랐기 때문에 인생이 이렇게 꼬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불교교양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비로서 해법이 보였다. 도대체 풀리지 않던 문제에 대한 실마리가 보였던 것이다.
여기 문제가 있다. 대체적으로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것들이다. 지금 여기에서 괴로움, 불쾌, 슬픔을 느끼지만 다음날 아침이 되면 깨끗이 사라질 것들이다. 감기가 걸려 몸이 아픈 것도 시간이 되면 해결된다. 그 사람으로 인해 참을 수 없는 정신적 고뇌도 시간이 되면 풀어진다. 사실 이런 문제는 문제도 아니다. 진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시간 지나도 해결이 안되는 것들이다. 이른바 사고 또는 팔고라고 하는 것들이다. 그 중에서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에 대한 것이 있다. 이를 한자어로는 ‘원증회고(怨憎會苦)’라고한다.
이 세상을 살다보면 수많은 만남이 있다. 선연인 것도 있고 악연인 것도 있다. 한번 좋으면 ‘죽어라’ 좋아 하고, 한번 싫으면 ‘죽어도’ 싫은 것이다. 호불호와 쾌불쾌에 따라 인연도 되고 악연도 된다. 이것은 다름 아닌 갈애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죽어도’가 붙으면 집착단계가 된다는 것이다. 집착(upādāna)은 갈애가 더욱더 강화된 것이다. 집착단계가 되면 떨어지지 않는다. 이제 오로지 그 길로만 가게 된다. 그것은 다름아닌 업의 길이다. 행위에 대한 과보의 길이다. 이렇게 하여 삶은 돌고 돈다.
원증회고라하여 반드시 사람과의 만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건이나 사고도 해당될 수 있다. 하필 그 자리에 있어서 사고가 났다면 좋아하지 않는 것에 대한 만남에 해당된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도 해당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생노병사만한 것이 없다. 이 중에서 늙고 병드는 것만큼 만나기 싫은 것도 없을 것이다.
늙기 싫어도 늙어야 하고, 병들기 싫어도 병들어야 하는 것이 모든 생명 있는 존재의 삶이다.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간다. 문제를 모르니 해법도 모른다. 불교에서는 인생의 근본문제에 대한 해법이 있다. 불교에 입문할 때에는 인생의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한 막연한 해법을 기대했다. 세상 어디를 돌아보아도 불교만한 것이 없어 보였다. 불교를 접하면 틀림없이 해결책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불교교양대학 문을 두드린 것이다.
더 이상 “내가 십년은 젊었으면.”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젊음에 대한 부러움은 잘 살지 못했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과 같다. 그 대신 지난 십년을 되돌아 보면서 “잘 살았다.”라고 말해야 한다. 후회없는 삶이다. 연소하는 삶이다.
연소하는 삶이란 무엇일까? 대체 무엇을 태워야 하는가? 그것은 탐욕과 분노의 미혹의 삶을 태워 버리는 것이다. 이들 불선법을 소각시키지 않으면 불선법이 연료가 되어 또다시 타오른다. 욕망의 삶을 살면 욕망이 연료가 되어 활활타오른다. 욕심내면 낼수록 연료는 더 많이 쌓여서 다음생까지 타는 동력이 된다. 분노의 삶을 살면 분노가 분노를 먹고 산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상이 붙타고 있다고 말 했다. 세상은 탐욕의 불, 분노의 불, 미혹의 불로 불타고 있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일체가 불타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일체가 불타고 있는가? 수행승들이여, 시각도 불타고 있고 형상도 불타고 있고 시각의식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불타고 있다. 어떻게 불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로, 성냄의 불로,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고 태어남-늙음-죽음-슬픔-비탄-고통-근심-절망으로 불타고 있다고 나는 말한다.”(S35.28)
연소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것도 완전연소라는 말을 좋아한다. 재가불교단체 사무총장직을 수락했을 때 “완전연소하겠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한번 맡겨진 임무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에 대하여 완전연소라는 표현을 썼다. 몸과 마음을 다 태워서 헌신하겠다는 말이다. 그랬더니 어떤 이가 말하기를 “완전연소는 열반을 의미합니다.”라고 말 했다.
완전연소가 열반을 의미한다라는 것을 알았다. 이는 부처님의 두 번째 설법이라 볼 수 있는 ‘연소의 경’(S35.28)에서도 알 수 있다. 괴로움과 윤회의 동력이 되는 탐욕, 분노, 미혹의 소멸이야말로 연소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이들 오염원이 완전소멸 되었을 때 더 이상 타오르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괴로움도 윤회도 없을 것이다.
연소하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연기적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다고 유전연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환멸연기를 말한다. 부처님은 연기를 설할 때 유전연기와 함께 반드시 환멸연기도 함께 설했다. 만일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S12.2)라는 식으로 유전연기만 있다면 필연적으로 절망에 이르게 된다. 부처님은 생노병사로 인한 절망의 길을 설한 것이 아니다. 절망으로부터 탈출하는 방법에 대한 것도 설했다. 그것이 환멸연기이다. 그래서 반드시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S12.2)라는 식으로 환멸연기를 설했다. 환멸연기의 삶의 방식이야말로 연소하는 삶이 된다.
되는대로 산다면 유전연기적 삶이다. 한마디로 탐욕과 분노와 미혹의 삶이다. 이런 삶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그것은 죽음이다. 절망에 이르는 삶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접했다면 환멸연기적 삶을 살아가야 한다. 탐욕의 불, 분노의 불, 미혹의 불을 끄는 삶을 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괴로움과 재생이 되는 연료를 더 이상 만들어내지 말아야 한다. 윤회의 땔감이 되는 집착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환멸연기적 삶을 살면 완전연소에 이를 수 있다.
더 이상 십년타령 하지 않는다. 세상의 흐름대로 사는 자에게 있어서 십년전으로 되돌아가 보았자 똑같은 삶이 전개될 것이다.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이 유전연기적 삶을 사는 것이다. 반면 환멸연기적 삶을 산 사람은 지난 십년을 회고하며 ‘잘 살았다.’라고 할 것이다. 역류도(逆流道)의 삶을 사는 자이다. 지금 여기에서 유전연기적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환멸연기적 삶을 살 것인가.
2019-12-0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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