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이 정치를 했을 때
인간은 동물이다. 어떤 동물일까? 어떤 이는 인간에 대하여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정치적 동물’이라고 한다. ‘경제적 동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인간이 동물은 동물인데 부여하는 명칭에 따라 갖가지 동물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들 동물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동물처럼 혼자 살 수 없음을 말한다. 어떻게해서든지 관계를 맺고 살기 때문에 갖가지 명칭이 부여된다. 그 중에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이 요즘 강하게 와 닿는다.
어제 사람들이 국회 담을 넘었다. 대부분 육칠십대 노인들이 정문이 열리자 우르르 몰려 간 것이다. 그리고 국회를 점령했다. 어떤 이는 방송에서 “국회를 접수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마치 쿠데타세력이 주요기관을 접수한 다음 성명서를 내는 것 같다. 여기에다 야당대표는 “우리가 승리했습니다.”라고 말 했다. 인간의 정치적 행위가 엄청난 일을 만들어내고 만 것이다.
무엇이 그토록 노인들을 화나게 했을까? 우리사회의 기득권층이라 볼 수 있는 노인들이 담장을 넘은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좋게 보면 직접민주주의가 실현 되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나쁘게 보면 탐욕과 분노에 가득찬 노인들이 어리석은 행위를 한 것 같다.
태극기와 성조기와 이스라엘기를 든 노인들이 마치 여리고성을 점령하듯이 국회를 점령했다.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어 버렸다. 조국관련 검란사태를 기점으로 노인들이 정치의 맛을 알아 버린 것 같다. 매주 광화문과 청와대 앞이 이들의 놀이터로 변했다. 이번에는 국회 담장을 넘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기 때문에 누구나 정치적 견해를 표출할 수 있다. 옛날에는전쟁을 했지만 오늘날에는 투표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표출한다. 그럼에도 마치 전쟁하듯이 폭력적으로 표출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진보진영에서는 촛불로 집단적인 힘을 과시한다. 그렇다고 담을 넘지 않는다. 광화문에서도, 서초동에서도, 여의도에서도 담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육칠십대 노인들은 쉽게 담을 넘었다. 마치 여리고성을 이중삼중으로 포위하여 함락하듯이, 태극기와 성조기와 이스라엘기를 들고 국회를 접수한 것이다. 그 끝은 어디일까?
요즘 케이블 영화채널을 보면 좀비영화를 종종 볼 수 있다. 예전에는 이런 영화가 없었다. 좀비영화가 출현한 것은 사회적 현상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양극화, 청년실업, 노령화 등 갖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먹방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좀비가 되면 아무 하는 일 없이 먹는 것에만 관심을 보인다. 그렇다고 식욕과 번식욕으로 살아가는 동물과도 다른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피를 먹고 살아가는 좀비를 보면 오늘날 아무런 하는 일 없이 먹는 것에만 관심 보이는 사람들 같다. 좀비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민폐를 끼친다. 어제 국회담장을 넘어간 노인들을 보면 좀비영화가 연상되는데 나만 그런 것일까?
노인들이 담장을 넘은 것을 보고서 또 한편으로 이렇게 생각해 보았다. “현재 집권여당은 야당복도 많다.”라고. 더구나 제1야당 대표가 ‘우리는 승리했다’라며 여리고성을 점령한 듯 의기양양해 보였는데 선거를 앞둔 여당입장에서는 고마운 존재라고밖에 볼 수 없다.
국회를 점령한 사람둘은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학생시절 또는 젊었을 때 민주화운동이라고는 해 본적도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 중에는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던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도 있다. 그들이 민주화를 이야기하며 국회점령을 정당화하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기득권을 놓치기 싫은 몸부림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서 보수기득권세력의 부패뿐만 아니라 지식인들의 부패도 본다.
지적인 사람들이 지식인들이다. 많이 배우고 많이 사유해야 창의성이 발휘된다. 그러나 결과만을 수용했을 때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기에 바쁘다. 수많은 사람들이 유학을 떠났지만 그들의 학문적 성과만을 가져왔을 뿐이지 창의적 성과를 낸 사람들은 드문 것 같다. 마치 뉴턴의 만유인력 공식만을 외우는 것과 같다. 지식인이라면 만유인력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창의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럼에도 한국의 지식인들은 선진국의 과실만 따 먹으려고 하는 것 같다. 또한 외세의존적이라고 볼 수 있다. 태극기만 들었으면 되었지 왜 성조기와 이스라엘기를 드는가? 부패한 기득권세력과 부패한 지식인들을 보는 것 같다.
육칠십대 노인들은 할 일이 별로 없다. 만 65세만 되면 ‘지공거사’가 되어 수도권전철만 되면 어디든지 무임승차할 수 있다. 더구나 최근에는 정치맛을 알아서 국회담장을 넘어가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노인의 시대는 길지 않다. 나이가 들어 몸이 아프면 언제 죽을지 모른다. 노인의 건강은 건강이 아니다. 오늘 건강하지만 내일 악화되어 어떻게 될지 알 수 있다. 노인들이 담장을 넘는 행위는 과욕이다. 미래는 젊은 사람들이 살아갈 세상이다. 기를 쓰고 담장을 넘으려고 하기보다는 후대 사람들에게 좋은 유산을 물려주어야 한다.
TV에서는 어제 국회담장을 넘은 사건에 대하여 계속 보여주고 있다. 야당대표는 승리했다라고 말하지만 딱 거기까지라고 볼 수 있다. 잠시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다. 어느 누구도 폭력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십년대 학생운동이 몰락했던 것도 폭력화 된 것이 하나의 이유가 된다. 보수기득권층은 어제의 사건으로 인하여 몰락의 길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결과는 내년 4월 총선으로 나타날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정치에 무관심하다. 정치적 동물이라 하지만 애써 피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선거때가 되면 투표로서 정치적 행위를 한다. 사람들은 정치인들이 정치를 잘 하기를 바란다. 또 사람들은 극단을 싫어한다. 누군가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말 했을 때 거부감을 갖는다. 정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치를 마치 종교행위 하듯이 하면 어떻게 될까?
종교에서는 최선을 추구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최선을 추구할 뿐이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다. 종교에서는 최선만 있을 뿐 진리에 대한 타협이나 양보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종교인들은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극단적 견해를 갖기 쉽다. 그러나 정치는 종교와 다르다. 정치를 한다는 것은 정치파트너를 인정한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여당이 있고 야당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치인이 정치파트너를 인정하지 않고 최선만 추구한다면 어떻게 될까? 정치행위를 하지 않고 종교행위만 하면 어떻게 될까? 정치는 파탄 나고 말 것이다.
정치는 상대방을 인정하기 때문에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항상 ‘차선’을 추구한다. 그럼에도 종교적 신념으로 가득한 자가 정치를 했을 때 오로지 최선만 추구한다면 정치는 파탄나게 되어 있다. 어제 국회담장을 넘은 것을 보고 알 수 있다. 또 ‘우리가 승리했다’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극단은 피해야 한다. 중도로 가야한다. 그렇다고 중간길을 말하지 않는다. 정치에서 중도란 무엇일까? 대화와 타협으로 차선책을 추구하는 것이 정치중도일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는 정치중도는 실종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종교인이 정치를 하기 때문이다. 항상 최선만을 추구하는 종교인이 항상 차선만을 추구하는 정치가 생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어제 국회점령사태가 이를 말해준다. 집권여당으로서는 야당복 하나만큼은 확실히 있는 것 같다.
“파초와 대나무와 갈대는
자신의 열매가 자신을 죽이네.
수태가 노새를 죽이듯,
명성이 악인을 죽이네.”(S15.35)
2019-12-1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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