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목표로 살 것인가 목적으로 살 것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9. 12. 19. 13:53

 

 

목표로 살 것인가 목적으로 살 것인가

 

 

 

 

 

목표와 목적은 다른 것이다. 사람이 목표를 위하여 산다고 말했을 때 결과적으로 허()와 무(無로) 끝나기 쉽다. 그러나 인생의 목적이 있어서 살아간다면 가치가 있고 의미 있는 삶이 된다.

 

 

 

명문대학에 들어 가는 것이 목표인 학생과 무언가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대학에 들어가는 학생과는 인생관이나 가치관에 있어서 확실히 차이가 있을 것이다. 아파트 32평이 목표인 사람이 있다. 지금 살고 있는 24평이 좁아서 좀 더 너른 평수를 목표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몇 년 살다보면 좁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번에는 44평을 목표로 한다. 이렇게 아파트 평수를 늘리는 것에 대하여 목표라고 말하지 목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하여 일을 한다. 단지 먹고 사는 것에만 의미를 둔다면 사실상 오로지 생존과 번식만을 위해서 사는 동물적 삶이나 다름없다. 청소부는 생계를 위하여 거리를 청소한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달리하면 세상을 깨끗이 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는 일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면 세상에서 가장 숭고하고 의미 있는 일이 된다. 청소부는 생계때문에 쓸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상을 깨끗이 하기 위해 쓸기도 하는 것이다.

 

 

 

신입사원시절 자부심으로 다녔다. 그것은 회사의 이념 때문이었다. 사업보국(事業報國)이라는 말이 와 닿았다. 사업을 하여 국가의 은혜를 갚는 다는 거창한 이념을 말한다. 기업이 단지 이윤만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경제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임을 강조했을 때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월급액수보다는 하는 일에 가치와 의미를 두었다.

 

 

 

회사에서는 상품을 개발했다. 개발한 제품이 생산되어 수출된다면 달러를 벌어들일 것이기 때문에 애국자가 되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 실제로 성과를 내기도 했다. 개발한 상품이 유럽에 수출되어 사업 2차년도에 백억원이상 매출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은 자만일 수도 있다. 자신이 하는 일만이 최고이고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은 하찮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명문대학, 일류회사, 고급승용차, 너른 아파트 등을 목표로 한다면 삶이 척박해진다. 그리고 천박해질 수 있다. 오로지 승진과 돈만을 목표로 삼는다면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지만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면 내려와야 한다. 돈버는 선수처럼 돈버는 일에 올인하여 재산을 축적했지만 모두 다 자신의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사람들은 하루에 세 끼 먹고 산다. 부자라고 하여 그 부에 걸맞게 열끼, 백끼 먹는 것이 아니다. 나머지는 잉여에 지나지 않는다.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것이다. 또한 죽을 때 가져 가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언제 어떻게 없어질지 알 수 없다. 도둑이 들어 가져 갈 수 있고, 물이나 불로 인하여 없어질 수 있다. 나라에서 세금 등으로 빼앗아 갈 수도 있고 악의적인 상속자가 빼앗아 갈 수도 있다. 또한 중병이 들었을 때 병원비로 다 지불할 수도 있다.

 

 

 

세상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관과 반대로 살 필요가 있다. 세상사람들이 재물을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살아 갈 때 마음의 재물을 갖는 것을 목적으로 살아 가는 것이다. 마음의 재물은 무엇인가? 그것은 믿음의 재물, 계행의 재물,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재물, 배움의 재물, 보시의 재물, 지혜의 재물을 말한다. 이와 같은 일곱 가지 마음의 재물은 누가 가져 가지 못한다. 그래서 “불이나 물이나 왕이나 도둑이나 원하지 않는 상속자에 의해 약탈될 수 없는 것입니다.(A7.7) 라고 했다.

 

 

 

불교의 목적은 해탈과 열반이다.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는 것에 대하여 목표라고 말하지 않는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과 같이 단계적 과정을 목표로 할 수 있지만 해탈과 열반에 대하여 목표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생계는 인생의 목표일까 목적일까?

 

 

 

한때 대한민국을 먹여 살릴 것처럼 자부심으로 일했다. 그러나 회사를 그만두고 난 다음 부터는 그토록 하찮게 여기던 내수로 먹고 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하는 일이 오계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고, 또한 하는 일이 여전히 국가경제발전에 도움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 자부심으로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글쓰기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일인사업자로 살면서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다. 돈도 되지 않는 글쓰기이다. 그럼에도 그만 두지 못하는 것은 부족한 것을 채워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정신적인 풍요로움이다.

 

 

 

 

 

 

 

돈 보다 글이다. 생계를 위하여 일을 하지만 일하는 것에 대하여 하찮게 여긴다. 일을 하는 것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마음을 계발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의 재물, 계행의 재물,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재물, 배움의 재물, 보시의 재물, 지혜의 재물을 가질 수 있다.

 

 

 

아무리 바빠도 글쓰기를 빠뜨리지 않는다. 조금만 틈만 나면 쓴다. 두 세 시간 시간이 나면 글 하나 나오는데.”라며 자판을 두들긴다. 돈은 쓰면 없어지지만 글은 쓰면 남는다. 돈은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 남아 나는 것이 없지만 글은 남아 있다. 오년전에 쓴 글도, 십년 전에 쓴 글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심지어 오자와 탈자와 같은 오류를 지닌 채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러니 글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글을 쓰는 것은 마음의 오염원을 옅게 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탐욕, 성냄, 질투, 시기, 자만 등과 같은 불선법이 조금이라도 옅어지게 하기 위하여 쓴다. 쓴 것을 혼자만 간직하지 않는다. 인터넷에 올려서 공유한다.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단 한사람이라도 공감한다면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일을 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다. 일하는 것보다 더욱 더 가치 있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생계에 인생의 목적을 둔다면 동물적 삶이나 다름없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하여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면 고귀한 것이 된다.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인생의 목표일뿐 인생의 목적이 아니다. 이른 새벽 청소부가 거리를 쓸 듯이, 누가 보든 말든 오늘도 내일도 쓸 뿐이다.

 

 

 

 

 

2019-12-1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