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어떻게 해야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을까?

담마다사 이병욱 2019. 12. 25. 11:16

 

어떻게 해야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을까?



속상할 때가 많다. 며칠전 주유소에서 일이다. 주유소에서 안내하는 사람의 행위가 못마땅했다. 마치 줄을 서시요!”라는 듯이, 몸짓과 말짓이 불편했던 것이다. 그래서 째려보듯이 보았다. 마음에서는 불쾌하고 싫어 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왜 나에게 이런 마음이 일어났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니 이전에도 그 주유소에서 불쾌한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주유소에서 일을 겪고 나자 자괴의 마음이 들었다. 경계에 부딪쳤을 때 쉽게 무너져 버리는 것이다. 마음속으로는 이래서는 안되는데.”라고 했지만 더 큰 마음에 지배된 것이다. 이렇게 한번 무너지면 사상누각이 되는 것 같다.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싫어하는 마음은 오프라인에서만 있지 않다. 실시간으로 알려 주는 에스엔에스도 발생한다. 그것은 나와 무관한 것일수도 있다. 나의 이해와 전혀 관련이 없는 정치적인 것을 말한다. 최근 검찰개혁과 관련된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서초동으로, 여의도로 촛불집회에 참석한 바 있기 때문에 더욱더 민감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은 내뜻대로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선자불선자선지(善者不善者善之)

 

어떻게 해야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최근 유튜브 최진선생의 장자강연을 통해 조금이나마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그것은 노자 도덕경 49장에 나온다는 선자불선자선지에 대한 것이다. 이 말은 선한자에게나 불선한자에게나 선하게 대하라는 말이다. 원래 뜻은 선자오선지 불선자오역선지(善者吾善之 不善者吾亦善之)”라는 말이다. 착한 것을 보면 내자신도 그를 착하게 여기고 착하지 못한 것을 보아도 역시 착하게 여기는 마음을 말한다.

 

최근 최진석선생의 유튜브 강연에 푹 빠져 있다. 현재 진행중에 있는 장자강연 뿐만 아니라 이전의 노자강연까지 보고 있다. 그것은 매우 명쾌하게 강연하기 때문이다. 마치 도올 김용옥을 보는 것 같다. 그렇다고 김용옥처럼 거친 말이나 욕설을 하는 것이 아니다. 품위와 절제를 바탕으로 또렷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진석 선생은 이 시대의 제2의 김용옥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제까지 노자하면 김용옥이 연상되었다. 김용옥이 출현한 이래 이십년가량 세월이 흐른 현시점에서 어쩌면 김용옥을 능가하는 사람이 출현한 것이다.

 

불교에 정식으로 입문하기 전에 김용옥을 알았다. 물론 TV를 통해서이다. 2000년이 시작되었을 때 EBS에서 방영된 노자강연 시리즈는 문외한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다. 노자관련 책을 사서 보기도 했다. 그때 김용옥 나이가 오십세이었다. 그런데 안티김용옥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김용옥의 노자 강연에 대한 비판서적도 사서 보았다. 그럼에도  TV에서 보았던 상선약수나 천지불인과 같은 이야기는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런데 이번에 최진선 선생의 강연에서 선자불선자이야기를 듣고 헛헛한 마음에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세상의 발생과 소멸

 

마음은 대상에 따라 일어난다. 이 말은 대상이 없으면 마음도 일어나지 않음을 말한다. 대상이라는 것이 눈, , , , 몸과 같이 다섯 가지 감각능력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마음의 대상도 있다. 불쑥불쑥 일어나는 생각을 말한다. 이는 과거에 경험했던 것이 기억으로 저장되어 있다가 발현되는 것이다. 눈으로 어떤 대상을 보았을 때 연상작용으로 튀어나올 수도 있지만 저절로 튀어나올 수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니다. 통제되지 않은 마음을 어떻게 내 마음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의식이 있다면 잠재의식도 있다. 이제까지 보고 듣고 느꼈던 것들이 저장되어 있다. 그래서 대상과 접하면 잠재의식 속에 있는 마음이 튀어나온다. 그것은 긍정적인 것일수도 있고 부정적인 것일수도 있다. 부정적인 것이라면 싫어 하는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세상의 발생이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세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 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갤애가 생겨난다.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고,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것이 세상의 생겨남이다.”(S35.107)라고 했다.

 

모든 이야기는 기승전결이 있다. 이 중에서 결론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결론이 매번 똑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요즘 검찰개혁이 회자되고 있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공수처설치를 말한다. 이럴 경우 기승전검찰개혁이 될 것이다. 사는 것도 결론이 없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결론은 절망이다. 사람들은 태어나서 살다가 결국 죽게 되어 있다. 이는 다름아닌 절망이다. 이렇게 본다면 삶이라는 것은 기승전절망이라고 볼 수 있다.

 

세상이 생겨났다는 것은 마음이 일어났다는 말과 같다. 반대로 세상이 사라졌다는 것은 마음이 사라졌다는 말과 같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세상의 소멸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세상이 소멸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 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갤애가 생겨난다. 그 갈애가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집착이 소멸하고 집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소멸한다. 이것이 세상의 소멸이다.”(S35.107)라고 했다.

 

세상의 발생과 소멸은 마음에 달려 있다. 특히 세상의 소멸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려있다. 감각대상을 접함에 따라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통제되지 않는다. 그 다음이 문제이다. 대상을 접하여 느낌이 발생했을 때 알아차려야 하기 때문이다. 주유소에서 그 사람을 보았을 때 싫어 하는 마음도, 검찰에 대한 불쾌한 마음도 이전의 경험에 따른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산냐(saññā: )라 할 것이다. 그 사람에 대하여 또는 대상에 대하여 하나의 상이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은 그 대상은 그런 사람 그런 대상일 것이라고 단정지어 버리는 것이다. 이는 싫어하는 마음으로 나타난다. 여기까지는 어쩔 수 없다. 마음속에서 불쾌와 불편이 일어나는 것은 통제되지 않는다. 다만 알아차릴 수 있다.

 

알아차리지 못하고 호불호와 쾌불쾌에 따라 간다면 갈애가 된다. 갈애의 단계가 되면 오로지 그 길로 갈수밖에 없다. 마치 로마의 케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넌 것과 같고,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는 것과 같다. 오로지 대상을 향하여 돌진할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새역사가 쓰여진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상에 대하여 좋아하는 마음 또는 싫어 하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12연기가 전개된다. 그 끝은 어디일까? 절망이다. 죽음에 이르게 되었을 때 세상은 무너진다. 마음도 사라지는 것이다.

 

세상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면 공통적으로 갈애까지는 같이 전개된다. 갈림길은 갈애이후 부터이다. 갈애가 일어나기 전에 알아차림을 하면 절망적 상황에서 벗어난다. 좋아함과 싫어함을 알아차렸을 때 더 이상 조건발생적 연기가 일어나지 않음을 말한다.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면 조건소멸적 연기가 진행되어서 더 이상 절망적 상황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부처님 가르침은 철저하게 연기법에 따른다.

 

어떻게 해야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을까? 최진석선생의 장자강연에 따르면 선자이든 불선자이든 선지하라고 했다. 착한 사람이든 악한사람이든 차별없이 선하게 대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

 

평정과 관련된 말이 우뻭카(upekkha)이다.  이 말은 평등, 평온등으로 번역된다. 영어로는 ‘equanimity, neutrality’ 등으로 번역된다. 이와 같은 우뻭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따뜨라맛자땃따(tatra-majjhattatā)’라고 하는데, 이는 “keeping in the middle of all things”의 뜻으로 모든 것에 대하여 중립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1) 육지적 평정, 2) 범주적 평정, 3) 각지적 평정, 4) 정진적 평정, 5) 형성적 평정, 6) 감수적 평정, 7) 통찰적 평정, 8) 유지중립적 평정, 9) 선정정 평정, 10) 청정적 평정이 있다.(Vism.4.156)라고 말한다.

 

우뻭카는 의식(consciousness) 과 정신적 요소(mental factors)에 대하여 평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족하지도 않고 넘치지 않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는 치우치지 않는 마음을 말한다. 마치 마부가 잘 달리는 말을 더욱 더 잘 달리게 하는 것과 같다. 바로 이런 것이 최진석선생이 노자나 장자강연에서 말한 선자불선자선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선한사람에게도 불선한 사람에게도 차별없이 선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쉽지 않다. 불선한 사람을 보았을 때 마음의 평정이 깨져 버리기 쉽다. 그럼에도 악한 사람에게도 선한 마음을 내라고 하는 것은 수행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실현되기 힘들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 난다마따(nandamātā)가 있다. 부처님의 재가 여제자 중의 한사람으로 선정을 닦는 님 가운데 제일(jhāyīna agga)’이라고 한다. 어느 정도일까? 앙굿따라니까야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존자여, 바로 저에게는 난다라고 하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왕들이 그를 어떤 원인인지 몰라도 끌고 가서 폭력으로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존자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들이 붙잡힐 때나 붙잡혀 있을 때나 포박되었을 때나 상처받을 때나 살해될 때나 살해되었을 때 저는 저의 마음의 변화를 알지 못했습니다.(A7.53)

 



 

난다마따는 외아들이 죽었을 때도 태연했다. 그것도 비참하게 살해당했을 때 마음의 변화가 없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는 그녀가 네 번째 선정에 들어 우뻭카의 상태에 들 수 있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불환자였기 때문에 분노 등의 오염원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평정은 수행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다.

 

노자나 장자 강연에서 선자불선자선지에 대한 강연을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러나 수행방법에 대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이에 반하여 불교에서는 평정의 마음에 이르기 위한 수행방법이 있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중에서 범부가 올라 갈 수 있는 지혜가 11번째인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sakhārupekkhāñāa: 行舍智)’ 라고 한다. 이는 문자 그대라 현상(sakhāra)에 대한 평정(upekkhā)이다. 이 단계에 이르기 전에 먼저 현상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 모든 조건 지어진 것들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무아인 것을 알아야 함을 말한다.

 

살다보면 호불호와 쾌불쾌 등 온갖 느낌이 있는데, 이런 느낌은 무상한 것이다.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고,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어서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서 무아인 것이다.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면 연기가 회전하지 않기 때문에 호불호나 쾌불쾌에 따라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다. 수행자는 마치 제3자처럼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여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상카루뻭카 상태에 있으면 눈물을 마구 쏟거나 쉽게 마음 아파하지 않습니다. 계속 무상--무아를 보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죽은 것을 평정심으로 받아들입니다. (11일간의 특별한 수업, 423p)라고 했다.

 

일상에서 마음의 평정을 이루려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노자 도덕경 49장에 있는 선자오선지 불선자오역선지(善者吾善之 不善者吾亦善之)”라 하여 누구에게나 선한 마음을 낼 수 있고,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에 이르러 마음의 평온을 유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매일 매번 대상에 접하여 일어나는 마음에 대하여 일상에서는 어떻게 해야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범부로서 올라 갈 수 있는 최상의 지혜가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동요하지 않는다. 이미 내것이라는 생각을 내려 놓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이혼한 아내의 예를 들고 있다. 이는 “형성들에 대하여 마치 아내와 이혼한 남자처럼, 무관심하고 중립적이 되고 ‘나’와 ‘나의 것’을 붙잡지 않는다.(Vism. 21.61)라고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혼한 아내는 더 이상 나의 아내가 아니다. 나의 아내가 아니므로 남이다. 남이 행위하는 것에 대하여 나의 일처럼 개입할 수 없다. 그래서 현상에 대한 평등의 예로서 이혼한 아내 보듯이 무관심과 중립적인 마음을 내라고 했다. 그렇다고 하여 무관심으로 일관한다면 이는 외도가 생각하는 평정심과 같을 것이다.

 

앙굿따라니까야 뽀딸리야의 경’(A4.100)에 따르면 외도 유행자 뽀딸리야는 비난과 칭찬에 대하여 무관심한 것이 평정을 유지하는 길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올바른 때 비난할 사람은 비난하고, 칭찬할 사람은 칭찬하라고 했다. 그럼에도 무관심으로 일관하여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요즘 말로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라고 하면서 모든 활동을 중지하는 사람과 다를 바 없고, 산속에서 홀로 살아 가는 자연인과 같을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주위와 주변에 무관심할 수 없다. 누군가 나는 남에게 폐끼치 않고 살겠습니다.”라고 착하게 살고자 한다면 이는 소극적 공리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과 사는 세상에서 사람들과 부딪치며 살지 않을 수 없다. 이럴 경우 삶의 지혜가 있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선하게 대하여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고,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 이런 지혜 없이 오로지 무관심으로 일관하여 마음의 평정을 이루었다고 말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평정의 삶이 실패 하는 요인으로 세속적인 무지에 입각한 평정이 생겨날 때 실패한다.”(Vism.9.96)라고 했다.

 

인생에서 파란곡절(波瀾曲折)이 일어날 때

 

남에게 폐만 끼지지 않으면 된다는 소극적 공리주의에 따른 평정은 진정한 평정이 아니다. 착하게만 살면 된다고 하여 주변에 무관심한 것도 평정의 삶이 아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파란과 곡절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인생에서 파란곡절(波瀾曲折)이 일어날 때 침착과 평정을 유지해야 한다. 이럴 때 가장 좋은 것은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사무량심 중의 평정에 대하여 뭇삶에 대하여 무관한 형태를 일으키는 것을 특징으로 삼고, 뭇삶에 대하여 평등하게 보는 것을 기능으로 삼고, 적의와 애착을 가라앉은 것을 현상으로 삼고”(Vism.9.96)라고 했다. 평정에 대하여 특징, 형태, 기능, 현상 이렇게 네 가지로 분석하여 설명한 것이다.

 

일상에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면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아는 것이다. 이는 타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래서 뭇삶들은 행위가 주인이다. 행위에 따라 행복하게 되거나, 고통에서 벗어나거나, 이미 얻은 성취에서 퇴락하지 않게 된다.”(Vism.9.96)라고 했다. 그가 악행을 하면 그 악행이 그의 주인이고 상속자가 될 것임을 아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

 

 

나는 업의 소유자이고,

업의 상속자이고,

업을 모태로 삼는 자이고,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고,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로서

내가 지은 선하거나

악한 업을 상속받을 것이다.”(A10.48)

 

 

 

2019-12-2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