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天使)의 메시지
최근 십년동안 두 가지 변화를 목격하고 있다. 하나는 원룸이고 또하나는 요양원이다. 요즘 건물을 보면 지었다하면 원룸이다. 특히 역세권 주변이 그렇다. 주택이나 상가를 허물어 번듯한 원룸형 빌딩이 이곳저곳 우후죽순처럼 솟아있다. 일인가구의 증가에 따른 필연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요즘 주변을 보면 이곳저곳에서 요양원을 볼 수 있다. 역세권 어느 오피스텔은 빌딩전체가 요양원으로 바뀐지 꽤 오래 되었다. 고령화시대에 따른 필연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제까지 요양원에 들어갈 기회가 없어서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누우면 죽는다.” 라는 말이 있다. 집에서는 가장 편한 자세를 취하기 쉬워서 항상 이 말을 명심한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눕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요양원에 가면 누워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은 하루종일 누워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워 있는 사람을 보니 아주 오래 전에 다리가 골절되어 기부스를 하고 한달이상 누워 있었던 때가 생각났다. 대소변을 요강에 보았고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살 수 없었다. 요양원에서도 그런 현상을 목격한 것이다.
요양원에 가면 특유의 냄새가 난다. 노인냄새라고도 볼 수 있다. 소독냄새도 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음울한 분위기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무표정하고 생기가 없다. 그리고 말이 없다. 형편없이 늙어버린 노인들은 끊임없이 떠들어 대는 TV만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때 되면 밥 먹고 때 되면 자는 등 요양원의 일정에 따라 살아간다. 현관문은 굳게 잠겨 있다. 비밀번호를 모르면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거의 누워 있다. 누워 있다보면 잠자기 쉬울 것이다. 하루종일 먹고자고를 반복할 뿐이다.
요양원은 창살없는 감옥과도 같다.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우미의 통제에 따라야 한다. 요양원에 들어가는 순간 유치원의 아이들처럼 고분고분 말을 잘 들어야 한다. 그러다보니 자유가 박탈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남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처지를 한탄할 수도 없을 것이다. 늙어서 병든 몸이 되었을 때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누구도 원망할 수 없다. 세월이 이렇게 만든 것이다.
요양원에 오래 있지 않았다. 고작 한시간도 되지 않았다. 요양원에 다녀오고 난 다음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요양원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의 각오는 되어 있었다. 그러나 들은 것과 실제로 느낀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삶의 종착지로서의 요양원이다. 아무런 희망없이 누워서만 지내는 모습을 보니 미래의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결국 저 자리에 누워 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했던 것이다.
누구나 최후의 순간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죽음을 마주하기가 쉽지 않다. 사체를 보는 것은 쉽지 않다. 장례식장에 가도 영정만 볼 뿐이다. 사체는 삼일만 지나면 구더기가 나온다고 한다. 삼일장을 치루는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사체의 변화되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 부정관(不淨觀)이다.
열 가지 부정관이 있다. 고대인도에서는 사체의 변화된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 주요한 명상주제 중의 하나였다. 몸에 대한 애착을 놓아 버리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현시대에서는 사체를 볼 수 없다. 또한 죽어가는 사람도 보기 힘들다. 그러다 보니 이 젊음과 이 건강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세월은 이 몸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세월은 스쳐가고 밤낮은 지나가니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S1.4)라는 게송이 있다. 주석에 따르면, 젊은이는 중년에 도달한 자를 버리고, 젊은이와 중년은 노년에 도달한 자를 버린다. 죽을 때가 되면 어떻게 될까? 죽을 때가 되면 젊은이와 중년과 노년이 모두 우리를 버린다.
거동이 불편해졌을 때는 요양원 신세를 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치매와 같은 최악의 상황이 되면 묶인 채로 살아가야한다.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재난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주변에서 형편없이 늙어버린 노인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잘먹고 잘 돌아다닐 수만 있다면 젊은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나이를 많이 먹었어도 걸어 다닐 수 있다면 축복이다. 그러나 하루종일 누워만 있는 사람을 보면 절망적이다. 자신의 미래를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동을 못하는 노인은 하늘이 보낸 천사(天使)와 같다고 했다.
천사는 하늘의 사절을 말한다. 그래서 데바두따(Devadūta)라고 한다. 천사는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다만 주의깊게 보지 못할 뿐이다. 천사는 “이보게 저 사람을 보고서 느낀 것이 없나?”라며 매번 말을 걸어 온다. 맛지마니까야를 보면 다음과 같은 천사의 경고가 있다.
“이 사람아, 인간 가운데 여자나 남자가 태어나 팔십이나 구십이나 백세가 되어 늙고, 허리가 서까래처럼 구부러지고, 지팡이를 짚고, 몸을 떨며 걷고, 병들고, 젊음을 잃고, 이빨이 빠지고, 머리가 희어지고, 머리카락이 빠지고, 대머리가 되고, 주름이 지고, 검버섯이 피어나고, 사지가 얼룩이 진 것을 본 적이 있는가?” (M130)
이것은 두번째 천사의 경고에 대한 것이다. 형편없이 늙어 버린 사람을 보고서 느낀 바가 없느냐는 것이다. 첫번째 천사의 경고는 갓난아기에 대한 것이다. 똥오줌을 가리지 못하는 갓난아기를 보고 느낀 것이 없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갓난아기의 운명과도 관련이 있다. 한번 태어난 이상 늙고 병들고 죽을 수밖에 없는 절망적 운명에 대한 것이다. 세번째 천사의 경고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사람아, 인간 가운데 여자나 남자가 병들고 괴로워하는데 중태이고, 스스로 똥과 오줌으로 분칠을 하고, 다른 사람이 일으켜 주어야 하고, 다른 사람이 앉혀 주어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M130)
세번째 천사의 경고를 보면 오늘날 요양원의 현실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는 듯하다. 부처님당시나 지금이나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결국 거동도 못하고 누워서 지내다 죽을 운명인 것이다.
경에서는 모두 다섯명의 천사가 등장한다. 갓난아기, 노인, 병든 사람, 죄인, 죽은사람 이렇게 다섯 종류의 천사를 말한다. 이는 인간이 삶의 과정에서 겪는 생, 노, 병, 사에 대한 것이다. 흔히 사고(四苦)라하여 네 가지 괴로움을 말한다. 여기에 원증회고(怨憎會苦), 즉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에 따른 괴로움이 추가 되어서 오고(五苦)가 된다.
살아가면서 다섯 명의 천사를 종종 만난다. 그러나 사람들은 애써 피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때마다 천사들은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경고하고 있다. 천사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살 것인지 아니면 수용하고 살 것인지는 자신에게 달려 있다. 분명한 사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천사들은 “그렇게 살지말라!”라며 계속 경고의 메세지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월은 스쳐가고 밤낮은 지나가니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세속의 자양을 버리고 고요함을 원하리.”(S1.4)
2019-12-18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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