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
이 세상은 혼자만 사는 세상이 아니다. 지금 음미하는 차(茶)가 여기 있기까지 수 많은 사람들 손을 거쳤을 것이다.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곳도 수 많은 사람들이 거쳐 간 곳이다.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이 인생이다.
어느 날 불청객이 나타나 한가정을 쑥대밭 만들어 버린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코르테스는 기병 수백명으로 파라다이스를 정복했다. 한 사람으로 인하여 평화가 파괴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잠시 머물다 조용히 가는 곳이다. 오래된 아파트에 입주자들이 들락날락하듯이, 이 세상은 공용재와 같아서 세들어 사는 것처럼 때 되면 내 주는 것이다.
차 한잔에 마음이 뜨거워졌다. 들끓던 속을 제압하는 듯하다. 홀로 마시는 차일지라도 대화를 한다. 차 한모금에 한줄씩 쓰는 것이다. 눈과 귀는 차단되었다. 마음의 문만 열어 놓고 떠 오르는 대상에 집중한다.
찻잔 한모금에 행복을 느낀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뜨거움에 모든 것이 씻겨 내려 가는 것 같다. 지금 이대로가 계속된다면 어떻게 될까? 영원히 살 것이다. 죽지 않는 것이다. 이 순간이 지금 이대로 쭈욱 지속된다면 영원히 살고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순간이 지속되지 않기에 영원히 살고 또한 죽지 않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 이대로 계속되길 바라는 것은 갈애이자 집착이다. 어느 것도 영원하지 않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순간이 이어진다. 이렇게 이어지다 보면 어느 순간 종말을 맞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죽음이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기에 절망이다. 사람들은 오늘도 내일도 절망을 향해 간다. 그날이 언제 일지 알 수 없다. 앞일을 모르기 때문에 천년만년 살 것처럼 감각대상에 유혹되어 살아 간다.
폭풍우는 지나갔다. 그러나 생채기는 남아 있다. 배는 난파되고 엉망으로 되었지만 언제 그랬냐는듯이 오늘의 해는 다시 떠 올랐다. 남은 것은 지나간 기억뿐이다. 그것은 사랑하지 않은 것과의 만남이다. 불가항력적인 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이고 운명적인 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이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더라면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도 없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것과 이별에 따른 괴로움보다는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에 따른 괴로움이 더 크다.
“이 또한 지나가리니.” 참으로 멋진 말이다. 바이블에 있는 구절이라고 한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도 지나가고 말 것이다. 죽을 것 같은 괴로움도 한때 있었던 사건이 된다. 폭풍우가 지나간 것처럼,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기억에만 남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의 상처이다. 아물지 않으면 그림자가 된다. 의식 깊숙한 무의식에 또아리를 튼 뱀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 언젠가 때가 되면 마음의 문을 통해 나온다.
사람들은 비난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특히 자신 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지적 받으면 몹시 불쾌하게 여긴다. 명예를 생명처럼 여기는 사람에게 불명예는 참을 수 없는 것이다. 비난과 칭찬, 불명예와 명예는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사회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마치 감기처럼 시간 지나면 해결될 것들이다. 그럼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면 더 큰 것이 쓰나미처럼 덮쳤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살다 보면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나 에게도 벌어짐을 알 수 있다. 지금 행복하다고 하여 이 행복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은 것과의 만남은 필연이다. 그것이 사람이 되었건 사건이 되었던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보았던 것들이 실제로 일어난다.
일은 순간에 일어난다. 15년형을 선고받은 죄수가 있다. 교도소내에서 봉사도우미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탈영하여 강도 짓 하다 사람을 죽였다. 그때 그 사람과 지금 그 사람은 같은 사람이다. 그렇다고 똑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때 그 사람은 범죄를 저지른 자이고 지금 그 사람은 새로운 사람이다. 생긴 것은 비슷할지 모르지만 마음은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지금 그 사람은 그때 그 사람이 그런 행위를 한 것에 대하여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후회한다. 그는 “그때 그 놈이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인생이 달라졌을텐데."라며 후회한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과는 상황이 똑같지 않다. 그때의 조건과 지금은 조건은 다른 것이다. 그래서 후회해 보았자 소용없다.
아끼던 물건이 깨지면 쓰라릴 것이다. 항상 영원할 것 같았던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을 때 슬퍼진다. 사랑하는 것과의 헤어짐에 따른 괴로움이다. 그러나 그 보다 더 괴로운 것은 사랑하지 않은 것과의 만남에 따른 괴로움이다. 왜 그럴까? 평생 가기 때문이다.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괴로움이고,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라 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에 따른 괴로움 보다는 못한 것 같다.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운명적이라 볼 수 있고 불가항력적이다. 시간 지나면 해결될 비난과 불명예는 문제도 아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듯 사랑하지 않은 것과 만났을때 어떻게 해야 할까? 단지 “이 또한 지나가리니.”라고 해야할까? 부처님의 제자라면 고성제로 받아 들여야할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관조해야 한다. 원인이 있어서 결과로서 나타난 괴로움에 대하여 제3자적 입장에서 관찰하는 것이다.
과거 전생에 어떠한 업을 지었는지 알 수 없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은 원인이 있어서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 역시 과거 원인이 있었기 때문에 조건이 맞아서 지금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겸허하게 수용해야 할 일이다. 괴로움을 철저하게 알면 괴로움의 원인도 알 수 있고, 괴로움의 소멸도 알 수 있고, 괴로움의 소멸방법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 역도 성립된다. 사성제 중에 한가지를 철저하게 알면 나머지도 모두 알게 되는 것이다. 괴로움을 알아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괴로움을 알면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는다.
“네 가지 거룩한 진리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해
여기 저기 태어나
오랜 세월 윤회했네.
이들 진리를 보았으니
존재의 통로는 부수어졌고
괴로움의 뿌리는 끊어졌고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어졌네.”(S56.21)
2019-12-2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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