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운수 좋은 날이 있다. 생각지도 않게 행운이 오는 것을 말한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직업에서 종종 회자된다. 특히 운수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운수 좋은 날’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된다. 그래서 소설 제목으로도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질이 좋지 않은 손님도 있다. 흔히 진상고객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이 걸리면 재수 없는 날이 된다.
행운을 바라는 곳이 있다. 이른바 사행성 오락장을 말한다. 투기도 일종의 행운을 바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주식투기는 합법적인 투기장이라고 볼 수 있다. 또 경마장이나 경륜장 등 스포츠와 관련된 곳은 사행심을 부추기는 국민오락장이라고 볼 수 있다. 공통적으로 돈 놓고 돈 먹기식이다. 적은 돈을 투입하여 몇 배, 몇 십 배, 심지어 몇 천 배 튀겨 먹는 것이다. 그러나 좀처럼 행운은 오지 않는다. 불로소득을 바라며 베팅해 보지만 결국 모두 털리고 만다.
행운과 불운은 한끗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행운을 기대한다. 인사말에서도 “행운을 빕니다.”라고 말한다. 항상 행운이 함께 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있어 왔다. 미래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인간의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음을 말한다.
과거에 몸으로 입으로 마음으로 지은 행위가 조건이 맞아 떨어졌을 때 결과로서 나타난다. 이를 업이숙(業異熟: kamma vipaka)이라고 한다. 업이 익어 과보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업이 익는 시기가 모두 다르다는 사실이다.
행위를 하면 반드시 결과가 따르는 법이다. 즉각적인 과보가 따르는 것도 있지만 먼 훗날에 받는 것도 있다. 다음 생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 여기에서 겪고 있는 행운이나 불운은 모두 자신의 행위와 관련이 있다. 그렇다고 숙명론이나 운명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업이 익기 전에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청정도론에서는 ‘효력을 상실한 업’ 등으로 설명된다.
지금 이렇게 사유하는 존재로 살고 있다는 것은 행운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사지가 멀쩡하고 정신이 온전한 것은 축복이다. 더구나 정법이 살아 있는 시기라면 행운의 시대라고 아니 할 수 없다. 행운에 행운이 겹쳐서 여기에 태어난 것이다. 어쩌면 로또 맞는 것보다 더 행운일지 모른다.
정법이 있어도 정법이 있는줄조차 모른다면 불운한 것이다. 인터넷시대에 정법은 널려 있다. 그러나 바로 옆에 있음에도 알지 못한다. 설령 알았다고 하더라도 무슨 뜻인지 모른다면 불운한 것이다. 정법을 손에 쥐어 준다고 해도 지혜가 없다면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불교적 지혜는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불교적 지혜는 다른 것이 아니다. 간략히 말하면 무상의 지혜, 고의 지혜, 무아의 지혜를 불교적 지혜라고 한다. 이런 지혜는 다른 가르침에서 볼 수 없다. 오로지 불교에서만 접할 수 있는 독특한 지혜라고 볼 수 있다. 아니 무상, 고, 무아는 자연의 이법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진리라고 볼 수 있다.
삼법인에 대한 진리를 볼 수 있는 자는 지혜로운 자이다. 그런데 삼법인의 지혜는 타고나야 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전생에서부터 수행자로 삶을 산 사람이 이 생에서도 수행을 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불교적 지혜는 생이지가 된다.
불교적 지혜는 연기법으로 설명된다. 지금 나에게 닥친 사건은 우연도 아니고 운명도 아니다. 교통사고가 난 것도 하필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우연적 피습(opakkamikāni)’은 지금 여기서 과보로서 나타난 것이다. 원인을 따져 보면 가까운 원인도 먼 원인도 있다. 더 멀리 과거 전생에 따른 것일 수도 있다. 원인(因)과 조건(緣)이 맞아 떨어져서 과보(果)로 나타난 것이다.
불교적 지혜가 있다면 불운에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또한 행운에 즐거워하거나 들뜨지 않는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불운과 행운은 그야말로 운에 달려 있다.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행운과 불행으로 갈리기도 한다. 설령 그것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일지라도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이 운명론적일 것일지라도 수용한다. 왜 그런가? 새로운 원인을 만들어 가면 되기 때문이다.
요즘 김연자의 히트곡 ‘아모르 파티’가 있다. 가수는 신나는 댄스와 함께 흥겹게 부른다. 대체 ‘아모르 파티’는 무슨 뜻일까? 노래 가사를 보면 “인생은 지금이야 아모르 파티”라고 되어 있다. 가사 어디에도 아모르 파티가 어떤 뜻인지 설명되어 있지 않다. 다만 “오늘 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돼”라든가, “인생이란 붓을 들고서 무엇을 그려야 할지”라는 구절에서 어느 정도 짐작이 갈 뿐이다.
최근 ‘아모르 파티(Amor Fati)’를 읽었다. 김진태선생과 박재홍 선생이 공동으로 저술한 인문학 서적이다. 책에서는 아모르 파티에 대하여 소설 ‘주홍글씨’를 예를 들어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그것은 한마디로 “네 운명을 사랑하라.”라는 말이다. 이는 니체의 운명관을 말한다.
아모르 파티는 ‘삶의 필연성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아모르 파티는 라틴어로 사랑을 뜻하는 아모르(Amor)와 운명을 뜻하는 파티(Fati)의 합성어이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가 자신의 저서 ‘즐거운 지식’ 등에서 언급한 개념이라고 한다. 한자어로는 운명애(運命愛)라 하고, 영어로는 ‘Love of Fate’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운명을 사랑할 수 있을까?
니체에 따르면 운명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래서 인터넷 백과사전에 따르면“니체는 필연적인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할 때 인간이 위대해지며, 인간 본래의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고통과 상실을 포함해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동시에 운명에 체념하거나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고통까지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라고 설명된다.
지금 자신에게 닥친 가혹한 운명이 있다. 대부분 피하거나 도망가기 쉽다. 또 ‘케세라 세라’라하여 자포자기하기 쉽다. 그럼에도 니체는 운명을 사랑하라고 했다. 이는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말과 같다. 받아들이긴 받아들이되 한걸음 더 나아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전화위복과도 같은 것이다.
김진태 선생의 인문학 서적 ‘아모르 파티’에 따르면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씨’를 예를 들어 가혹한 운명을 설명해 놓았다. 주인공은 간통죄에 대한 처벌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주인공은 나머지 생애를 봉사와 헌신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소설속의 주인공은 가혹한 운명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봉사의 삶을 살았다. 이는 자신의 운명을 사랑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만약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한탄만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운명을 회피하거나 극단적 선택을 했을지 모른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운명도 사랑하기 마련이다. 반대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운명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남도 사랑할 수 있다. 운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남을 위한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 수 있다. 운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불운에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악한 짓을 했어도
착하고 건전한 일로 덮으면,
구름에서 벗어난 달과 같이
이 세상을 비춘다.”(Thag.872)
2019-12-3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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