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로 저격 받았을 때
얼마나 참아야 할까? 블로그에 댓글이 올라왔다. 글을 보니 최근 서너차례 받은 댓글과 유사하다. 같은 사람이 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필명으로만 써서 누군지 알 수 없다. 더구나 필명도 암호문 같다. 필명이 ‘점점점(…)’로 되어 있어서 정체를 알 수 없다.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고 글로 ‘저격’하는 것이다.
댓글로 저격 받았는데
댓글을 보면 구절구절 반박하고 있다. 올린 글을 인용하여 어떤 점이 오류가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 가장 많이 쓰는 말은 “전제의 오류를 범하지 말라!”는 글이다. 대체 ‘전제의 오류’란 무엇일까? 인터넷사전에 전제의 오류에 대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잘못된 전제가 얼마나 엄청난 결론을 이끌어 내었느냐”라는 문구를 볼 수 있었다.
글에 전제가 잘못되었다고 한다. 글에서 “누구나 사기꾼이 될 수 있다.”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전제의 오류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며 사기꾼은 작정을 하고 먹잇감한테 달려드는 것이라고 했다. 일리있는 말이다. 다만 글에서 사업을 하다 결재를 못하면 어쩔 수 없이 사기꾼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대하여 언급했음에도 이를 전제의 오류라 하여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올린 글은 논문도 법문도 아니다. 보통사람이 쓴 ‘인터넷생활잡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논문의 오류를 잡아 내듯이 이것 저것 거론 했을 때 빠져 나갈 구멍이 없다. 그런데 이런 류의 지적이 한 두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개인적인 견해가 강하게 들어간 글일수록 오류를 지적한다. 이런 지적에 대하여 감사해야 할까 아니면 무시해야 할까?
관습적으로 사용되는 말에 대하여
글에 꼬투리를 잡기로 작정했다면 모두 잘못된 글이 될 것이다. 관용적으로 사용되는 말을 지적할 수도 있다.
상윳따니까야에 ‘거룩한 님의 경’(S1.25)이 있다. 아라한의 경이라고도 한다. 경에서 하늘사람이 부처님에게 “해야 할 것을 다 마치고 번뇌를 떠나 궁극의 몸을 이룬 거룩한 수행승이 ‘나는 말한다.’고 하든가‘사람들이 나에 관해 말한다.’고 할 수 있으랴?”(S1.25)라고 말했다. 아라한은 무아의 성자이기 때문에 자아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알려 주었다.
“해야 할 것을 다 마치고 번뇌를 떠나
궁극의 몸을 이룬 거룩한 수행승이
‘나는 말한다.’고 하든가
‘사람들이 나에 관해 말한다.’고 하여도
세상에서 불리는 명칭을 잘 알아서
오로지 관례에 따라 부르는 것이네.” (S1.25)
부처님이 설법할 때 ‘내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누군가 시비 걸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은 무아의 가르침인데 어떻게 ‘내가’ 라는 말을 쓸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단지 관례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언어로 설법한 것이다.
부처님은 자아는 없다고 했다. 부처님은 무아를 설했다. 오온에는 실체가 없음을 말한다. 영원불변하는 자아는 있을 수 없고 조건에 따라 생멸하는 오온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오온이 먹고, 오온이 앉고, 오온이 탁발하고, 오온이 옷을 입는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세상사람들은 잘 알아듣지 못한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하여 관습대로 “내가 먹고, 내가 앉고, 내가 탁발하고, 내가 옷을 입는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언어로 진리를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지만
언어로 진리를 표현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중관학에서는 언어가 지닌 한계를 지적한다. 누군가 ‘큰 방’과 ‘작은 방’을 이야기했을 때 그런 방은 없다는 것이다. 큰 방보다 더 큰 방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개념화된 것이다. 중관학에서는 개념의 실체성에 대하여 비판한다. 개념을 부수는데 있어서 가장 잘 활용되는 구절은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이다. 이는 연기송에서 있어서 환멸연기에 대한 것이다.
누군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라고 말 할 수 있다. 이는 연기송에서 유전연기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중관학에 따르면 이런 논리는 성립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예를들어 “큰 방이 있기 때문에 작은 방이 있다.”라고 말한다면 모순이라는 것이다. 큰 방보다 더 큰 방이 있어서 무한소급하다 보면 그런 방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라는 환멸연기로 부수는 것이다.
살아 가면서 언어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은 45년동안 설법한 것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밤부터, 잔여 없는 열반에 세계로 완전한 열반에 든 밤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 그러므로 여래라 한다.” (It.121)라고 말 했다. 부처님은 언어로 진리를 설한 것이다. 이야기 형식을 빌어 말한 것이다. 그러나 능가경에서는 이와 다르다.
대승경전 능가경이 있다. 후대 성립된 경전이다. 능가경에서는 “어느 날 저녁 정각 이룬 때부터 어느 날 저녁 열반에 들 때까지 이 사이에 나는 한 자도 설한 바 없네. 자증과 본주의 법인 까닭에 이 밀어를 한 것이니 나와 모든 여래 조금도 차별이 없다네.”(능가경 7권, 楞伽經之四)라고 되어 있다.
이띠붓따까에서 부처님은 설한 모든 것에 대하여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은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런 진리의 말씀은 경이나 응송 등 구분교의 형태로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오고 있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능가경에서는 “나는 한 자도 설한 바 없네.”라고 했다. 이는 진리가 언어나 문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고 오로지 뜻과 마음으로만 알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언어로 진리를 표현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언어가 진리를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언어를 무시하고 뜻과 마음으로 전승한다면 맥이 끊어지고 말 것이다.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은 대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민중어로 설했다. 오늘날 빠알리어가 부처님 당시 민중어 계통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은 마치 스토리텔링하듯이 이야기 형식으로 진리를 설했다. 그렇게 45년 동안 설법하다 보니 팔만사천법문이 되었다. 오늘날 전승되어 온 가르침을 번역해 놓은 것을 보면 책장으로 가득하다.
글을 쓸 때 귀찮고 피곤한 것은
글을 쓸 때 귀찮고 피곤한 것이 있다. 그것은 모든 경우의 수를 감안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못한다. 대게 ‘일것이다’라는 식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는다. 그럼에도 헛점을 파고 드는 사람이 있다.
글을 쓸 때 ‘모두’ 또는 ‘다’라는 말을 사용하면 지적 받는다. 예를 들어 적폐청산운동할 때 “스님들이 고액도박을 하고 밤새 술판을 벌였다.”라고 하면 누군가는 ‘다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반박한다. 그렇다고 문장에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스님들이 고액도박을 하고 밤새 술판을 벌였다.”라고 매번 가정법을 넣을 수 없다.
법구경에 “어느 누구나 폭력을 무서워한다. 모든 존재들에게 죽음은 두렵기 때문이다. (Sabbe tasanti daṇḍassa, sabbe bhāyanti Maccuno)”(Dhp129)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에 대하여 모순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특히 ‘모두’를 뜻하는 ‘삽베(sabbe)’라는 말 때문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폭력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아라한을 말한다. 무아의 성자는 자아의식이 없기 때문에 폭력을 무서워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부처님이 ‘모두’라는 표현을 한 것은 세상의 관례에 따른 것이다.
군대에서 ‘집합’이라는 말이 가장 무섭다. 집합명령이 떨어지면 “열외일명없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그러나 열외가 없지 않을 수 없다. 보초서는 사람은 열외가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열외없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관례에 따른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 군대에서는 북소리로 집합을 알렸던 것 같다. 누군가 “모두 모여라!”라고 북소리를 울렸을 때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당연히 대신이나 왕은 제외된다. 그럼에도 모두 모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관습에 따른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느 누구나 폭력을 무서워한다. 모든 존재들에게 죽음은 두렵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을 때 번뇌다한 아라한은 제외가 된다.
잘못을 지적당했을 때
글을 쓸 때 이런 사항 저런 사항 가정하여 글을 쓴다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그럼에도 이를 지적하는 사람이 있다. 전제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면서 ‘다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식으로 말한다. 이런 지적에 대하여 고마워해야 할까 무시해야 할까? 분명한 사실은 부정적 언표로만 일관한다면 불선법을 일으킨다는 사실이다. 한 두 번이 아니라 매번 반복되었을 때 사실상 ‘스토커’나 다름없다.
법구경에서는 어리석은 자와 함께 길을 가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더 낫거나 자신과 같은 자를 걷다가 만나지 못하면, 단호히 홀로 가리라.”(Dhp.61)라고 했다. 어찌 보면 대단히 냉정한 것 같다. 그러나 진리의 길을 가는 자에게 있어서 도반만큼 중요한 사람은 없다. 그래서 청정한 도반은 인생의 전부와 같다고 했다. 반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가득 찬 자와 길을 함께 가면 그 방향으로 빠질 수 있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와 함께 걷는 자는 오랜 세월 비탄에 젖는다.”(Dhp.207)라고 했다.
댓글에서 전제의 오류를 말하면서 잘못을 지적해 주는 님이 있다. 그러나 매번 부정적 언사를 했을 때 불선법이 일어난다. 더구나 실명도 숨기고 자기소개도 하지 않으면서 암호문 같은 필명으로 지적만 한다면 충고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잘못을 지적할 때는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 공감할 수 있다.
“잘못을 지적하는 님,
꾸짖어 충고하는 님, 현명한 님,
숨겨진 보물을 일러주는 님을 보라.
이러한 현자와 교류하라.
그러한 사람과 교류하면,
좋은 일만 있고 나쁜 일은 없으리.” (Dhp.76)
“훈계하고 가르쳐야 한다.
거친 행동을 막아야 한다.
참사람이 아닌 자에게 그는 사랑스럽지 않지만,
참사람에게는 그가 사랑스럽다.”(Dhp.77)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며
마음 속에 일어나는 불선법을 알아 차려야 한다. 분노를 예로 든다면 “성냄에 매인 마음을 성냄에 매인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을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D22.19)라는 가르침이다. 사념처 중에서 심념처에 대한 것이다.
분노의 대상을 사띠하면 더욱 더 분노만 일어난다. 분노의 대상 보다 자신의 마음을 보는 것이다. 또 하나는 분노가 일어났을 때는 즉각 호흡으로 가는 것이다.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일 밖에 하지 못하므로 호흡에 집중했을 때 분노의 마음은 이전의 마음이 되어 버린다. 댓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댓글을 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긍정문이고 또 하나는 부정문이다. 부정문을 보면 일정한 패턴이 있다. 마치 시비를 거는 것 같다. 왜 그런 것일까? 아마도 많이 배운 사람이기 쉽다. 또 사회적 지위가 있는 자이기 쉽다. 이름을 숨기고 암호문 같은 필명으로 부정문을 썼을 때 게시판에서 보는 악성댓글과 다를 바 없다.
글을 쓰다보면 이런 일 저런 일을 많이 겪는다. 지난 십여년 동안 수도 없이 겪었다. 왠만해서는 흔들리지 않는다. 왜 그런가? 그사람의 업이기 때문이다.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면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다.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을 것임을 생각한다면 연민의 마음이 일어난다. 저격받아서 일시적으로 불선법이 일어났던 마음이 글을 씀으로 인하여 사라졌다.
2019-12-0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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