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정치중도는 가능한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9. 11. 30. 16:35

 

정치중도는 가능한가





그대의 첫 번째 군대는 욕망, 두 번째 군대는 혐오라 불리우고, 그대의 세 번째 군대는 기갈, 네 번째 군데는 갈애라 불린다.”(Stn.436) 이 구절은 숫따니빠따 정진의 경’(Sn.3.2)에 실려 있다. 부처님이 성도할 때 악마의 군대와 싸우는 장면이다. 그런 악마의 군대는 모두 여덟 군대가 있다. 차례로 나열해 보면, 욕망, 혐오, 기갈, 갈애, 권태와 수면, 공포, 의혹, 위선과 고집이다. 모두 인간의 심리상태를 나타낸 것이다.

 

악마의 군대를 줄여서 마군(魔軍)’이라고 한다. 한국불교에서는 마구니로 알려져 있다. 이말은 빠알리어 마라세나(mārasenā)를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팔마군중에서 혐오의 군대가 있다. 혐오는 아라띠(arati)를 번역한 말이다. 아라띠는 ‘dislike, discontent’이 뜻이다. 그래서 아라띠는 불쾌라고도 번역된다. 아라띠는 악마 빠삐만의 딸 이름이기도 하다.

 

빠삐만에게는 땅하, 아라띠, 라가라는 이름을 가진 세 딸이 있다. 이름 그대로 갈애, 불쾌, 탐욕이라는 뜻이다. 악마 빠삐만이 세 딸을 이용하여 부처님을 유혹하지만 부처님은 땅하와 아라띠와 라가를 보고 성적 교섭에 대한 욕망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Stn.835)라고 말했다. 이어서 부처님은 그 오줌과 똥으로 가득 찬 존재가 무엇이란 말입니까?”(Stn.835)라고 말했다.

 

똥은 조금만 묻어도 악취가 난다. 갈애와 혐오와 탐욕은 똥과 같은 것이다. 세 딸이 가까이 와서 두 발 아래 업드렸을 때 악취가 진동했을 것이다. 똥구덩이와 같은 존재와 잠시도 함께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두 발조차 그것을 건드리길 원하지 않습니다.”(Stn.835)라고 한 것이다. 갈애와 혐오와 탐욕에 대한 지극한 불쾌를 말한다.

 

요즘 TV를 잘 보지 않는다. 특히 뉴스를 보지 않는다. 특히 야당 여성정치인이 그렇다. 미모의 여성정치인이 나오면 고개를 돌리거나 채널을 바꾸어 버린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그 정치인이 혐오와 불쾌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전투적인 여성정치인

 

개와 정치인은 출입금지라는 말이 있을 수 있다. 어느 나라에서든지 어느 시대에서나 정치인은 혐오와 불쾌의 대상이다. 어느 나라에서든지 정치인은 희화화 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이념적으로 갈리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치성향에 따라 호불호와 쾌불쾌가 일어나는 것이다.

 

정치인도 정치인 나름이다. 훌륭한 정치인도 많이 있다. 공익을 추구하는 정치인은 존경받는다. 그러나 사적인 이익에만 몰두한다면 혐오와 불쾌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 여성정치인도 예외가 아니다.

 

대체로 여성정치인은 전투적이다. 전투적인 면으로만 본다면 정치인에게 있어서 성적 차별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여성정치인이라 하여 자애로운 어머니상을 기대할 수 없다. 전쟁과 같은 현실에서 전투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성이 대표가 되었을 때 자애로움을 기대하는 것 같다.

 

여성정치인이 야당 원내대표가 되었을 때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여성만이 갖는 특별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름 아닌 여성성이다. 여성정치인이 여성성을 발휘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에 대하여 칼 융의 분석심리학에 따르면 의견 또는 견해(opinion)으로 설명된다. 이부영선생이 지은 아니마와 아니무스책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여성의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것은 감정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의견(opinion)’이다. 그녀가 기분이 상했다면 그것은 그 의견 때문에 이차적으로 나온 반응이다. 이 의견은 양보할 수 없는 고집으로 나타난다.”(아니마와 아니무스 61)

 

 

여성들만이 갖는 특유의 고집이 있다. 이를 좋게 말하면 원칙이다. 나쁘게 표현하면 집착이 된다. 여성은 왜 이렇게 집착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모성본능때문이라고 한다. 자식에 대한 과도한 집착 같은 것이다.

 

마치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여겼을 때 내 뜻대로되어야 한다. 자식의 성취가 자신의 성취로 볼 수 있다. 이렇게 과도하게 집착했을 때 자식과의 갈등이 없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집착은 사회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성이 리더가 되었을 때 과도하게 집착한다면 어떻게 될까? 고집불통이 될 수도 있다. 회의할 때 여성대표가 나타났다고 하여 원만하게 잘 될 것이라고 보면 오산일 수 있다. 원칙대로 하고자 했을 때 조금도 양보하지 않을 수 있다. 과거 여성대통령에게도 그런 면이 있었다. 요즘 여성정치인에게서 그런 모습을 본다.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조화

 

여성정치인이 원내대표가 되었을 때 한국정치가 험난하게 될 것을 예측했다. 이는 남성과 여성의 의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칼 융의 분석심리학에 따르면 남성은 로고스적이고 여성은 에로스적이라고 했다. 이렇게 의식이 다르다 보니 무역, 정치, 기술, 학문 등에서도 다를 수밖에 없다.

 

협상테이블에서 남자대표와 여성대표가 부딪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남성이 여성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면 난관에 부딪칠 수 있다. 여성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 여성은 논리적 전제를 검토하기 보다는 현재의 의견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여성이 원칙주의자는 아니다. 여성중에는 남성성을 가진 여성도 있다. 이를 칼 융은 아니무스(animus)라고 했다. 여성에게 남성성이 있다면, 남성에게도 여성성이 없지 않을 수 없다. 남성에게 여성성이 있는 것에 대하여 아니마(anima)라고 한다.

 

남성과 여성이 함께 일하려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것은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조화이다. 이는 다름 아닌 무의식의 조화이다. 남성은 여성성을 발현해야 하며, 여성은 남성성을 발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긍정적으로 발현되면 성격 차이로 인한 갈등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발현되면 싸움 그칠 날 없을 것이다.

 

만나기만 하는 싸우는 남녀가 있다. 떨어져 있을 때는 보고 싶어 하지만 막상 만나면 하루도 못 가서 의견충돌이 일어나 싸우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남성안에 있는 부정적 아니마와 여성안에 있는 부정적 아니무스가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남자가 감상에 젖어 여자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수가 있다. 그럴 때 여자는 매몰차게 자신의 의견을 낸다. 여기서 남자가 감상에 젖는 다는 것은 남성속의 여성성이 발현된 것이다. 그리고 여자가 의견을 내는 것은 여성속의 남성성이 발현된 것이다. 이렇게 여자에게서 부정적 아니무스가 발현되면 남자는 상처를 받는다.

 

부정적인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만나면 서로 상대방의 약점을 찌르게 된다. 이에 대하여 칼 융은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통합이 덜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연인이나 부부간의 대화, 협상테이블에서 남녀간의 대화, 정치협상에서 남녀대표의 대화에서 남성은 여성성을 발현해야 하고, 여성은 남성성을 발현해야 한다.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면 싸움 일어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권은 어떨까?

 

정치중도에 대하여

 

불교에서는 중도(中道)를 이야기한다. 중도는 다름 아닌 극단적 견해를 지양한다. 누군가 이것 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말하면 극단적 견해가 된다. 누군가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다.”라고 말하면 영원주의라는 극단에 빠지게 된다. 또 누군가 현명한 자나 어리석은 자나 육체가 무너지면 정신도 사라져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라고 말한다면 허무주의라는 극단에 빠지게 된다.

 

부처님은 양극단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이를 연기법으로 설명했다. 그래서 중도에 대한 가르침을 보면 한결같이 연기의 순관과 역관으로 설명하고 있다.

 

정치에도 중도가 있을까? 정치에도 양극단이 없지 않을 수 없다. 극우와 극좌는 극단이다. 중간층도 있다. 그렇다고 좌와 우의 중간의 이념에 대하여 정치중도라고 볼 수 있을까? 정치중도는 대화와 타협에 의한 차선책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치를 한다는 것은 정치파트너를 인정한다는 말과 같다. 만약 정치파트너가 없다면 독재가 될 것이다.

 

싸움하지 않으려면  

 

한국정치가 꽁꽁 얼어붙어 있다. 가급적 관심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종종 접하게 되었을 때 혐오와 불쾌를 유발한다. 이는 정치중도가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남녀 성이 다른 대표가 격돌하였을 때 예외없이 극단으로 치닫는다. 그렇다고 모든 여성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여성속에 남성성이 잘 발현된다면 다툴 일이 없을 것이다. 또 남성의 경우 남성속의 여성성이 잘 발현된다면 싸울 일이 없을 것이다.

 

정치권에서 남성대표와 여성대표가 만났을 때 조마조마하다. 언제 부정적인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발현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성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다. 남성에게도 극단으로 치닫는 부정적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정치인이 뉴스에 나오면 고개를 돌렸다.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채널을 돌렸다. 계속 본다는 것은 혐오와 불쾌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럴경우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여성정치인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만과 열등감 때문으로 본다. 그러나 무엇보다 여성 내면 무의식 깊숙이 있는 부정적 아니무스가 발현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남성에게는 여성성이 있고 여성에게는 남성성이 있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강해진다. 그래서 나이 먹으면 먹을수록 남성은 여성화되고, 여성은 남성화된다. 남성은 여성성이 통합되고, 여성은 남성성이 통합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싸움하지 않게 된다. 정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남성정치인이든 여성정치인이든 긍정적인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작동된다면 대화와 타협으로 차선을 추구할 것이다. 이것이 정치중도아닐까?

 

 

2019-11-3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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