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국민연금 수령액을 보니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 18. 10:49


국민연금 수령액을 보니



며칠전 전화를 한통 받았다. 국민연금공단으로부터 받은 전화이다. 담당은 국민연금 납부기간이 만료되었음을 통보했다. 이미 이메일로 받아서 알고 있는 사항이다. 전화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추가로 납부하겠느냐에 대한 것이다. 연금은 2년 후에나 지급이 가능한데 그 기간동안 추가납부 여부를 물은 것이다. 이에 흔쾌히 추가납부하겠다고 답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있는 것도 이유이지만 무엇보다 연금에 돈을 내면 수익률이 높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 수령액에 실망하고

 

담당자는 얼마를 받는지 궁금하지 않느냐는 식으로 말했다. 얼마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물어보지 않은 것이다. 알려 달라고 했더니 매월 수령금액을 알려 주었다. 예상했던대로 실망스러운 금액이다. 무엇보다 공무원연금과 비교 되었다. 이런 금액을 위하여 지난 32년간 매달 꼬박꼬박 돈을 내었단 말인가!

 

연봉제가 시행되고 있는 회사에서는 매년 연봉협상을 한다. 기술직에 있는 사람들은 능력에 따라 차등 지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족스럽지 않다. 평균 임금 인상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연봉을 많이 받으려거든 회사를 옮겨야 한다. 옮기면 얼마를 받겠느냐고 먼저 물어본다. 먼저 제시하는 경우도 있다. 생각보다 많이 받으면 흡족하고, 생각대로 받으면 만족하고, 생각보다 못하면 불만이 된다. 생각했던 것에서 훨씬 못미치면 실망하게 된다.

 

국민연금 지급액은 실망스러운 것이다. 이는 같은 기간 교직으로 근무했던 사람들에 비하여 금액이 반토막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공무원 연금의 경우 적게 내고 많이 타가는 구조로 되어 있다. 같은 금액을 내고서도 국민연금에 비하여 배의 혜택을 보는 것 같다.

 

밀려난 느낌을 받았을 때

 

국민연금을 더 이상 내지 않아도 된다는 메일을 받았을 때 밀려난 느낌이었다. 마치 정년이 되어서 더 이상 다닐 수 없는 것과 같은 기분이라고 본다. 일인사업자로서 일하기 때문에 정년이 없지만 이제 연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더 이상 쓸모 없는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든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분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계절이 아홉 번 바뀐 국방의 의무를 다 했을 때 자신만만 했다. 이른바 개구리복이라고 불리우는 예비군복을 입고 전역신고를 마쳤을 때 사뿐했다. 유월 따스한 날 위병소 정문을 통과하는 순간 산천초목이 축복해 주는 것 같았다. 마치 감옥에서 해방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날 같았다. 전역패 문구에 써 있는 것처럼 인생의 그윽한 향기 품고 출발하는 것이었다.

 

예비군동원훈련을 언제까지 받았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복학하고서도 동원되었고 회사 다닐 때도 동원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때인가부터 통지서가 날아오지 않았다. 그대신 민방위 통지서가 전달되었다. 동원되었을 때 들은 말이 있다. 예비군동원도 끝나면 인생도 끝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었다. 민방위에 편입된다는 것은 젊음도 청춘도 끝나는 것으로 본 것이다.

 

꽤 오랫동안 민방위에 소집되었다. 어느 때는 구민회관에서 안보교육을 받기도 했다. 또 어느 때는 동사무소 앞으로 가기도 했다. 아마 사십대 중반까지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민방위 소집도 되지 않았을 때 퇴물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점점 밀려난 느낌이 든 것이다.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면 엊그제 같다. 어느 사건은 매우 생생하다. 지금 현재에서 그때 당시를 회상해 보면 세월은 스쳐가고 밤낮은 지나가니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S2.27)라는 게송이 떠 오른다. 세월이 우리를 밀어 낸 것이다. 청춘에서 중년으로, 중년에서 노년으로 간 것이 아니라, 청춘이 우리를 버리고, 중년이 청춘을 버리고, 노년이 중년을 버린 것이다. 마지막으로 죽음이 우리를 버릴 것이다. 죽음은 청춘, 중년, 노년 모두를 버리는 것이다.

 

불혹이 되자 다급 해졌는데

 

세월에 떠 밀려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 어디까지 떠 밀려 갈 것인가? 최근 어른 들의 죽음을 목격하며 최후로 누워 있을 곳은 병원 중환자실 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이전에는 요양원이 될 것이다. 장기가 망가지고 기능이 상실되었을 때 움직이지 못할 정도가 되면 꼼짝없이 요양원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양원에 한번 들어가면 죽어서나 나온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것은 현실이다.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들은 옆에서 사람이 죽어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주변에 허리가 구부러지고 주름이 진 형편없이 늙어 버린 노인을 보고서도 늙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언제나 청춘이고 항상 젊음일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러나 세월은 가만 두지 않는다. 자꾸 저리 가라고 밀어내는 것 같다. 밑에서 치받고 올라오는 사람이 있어서 자리를 내 주는 것 같다.

 

불혹이 되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청춘의 시절일 때 불혹이라는 나이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인생을 다 산 것 같은 나이어서 삶의 의미가 없는 나이로 본 것이다. 이는 매스컴에서 젊음과 청춘이라는 말을 남발하는 것에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광고에서는 더욱 더 그랬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 늙어 간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고 그런 상황이 온다는 것조차 생각하기 싫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세월에 밀려 불혹에 이르렀을 때 의지처가 필요 했다.

 

불혹이 되고 한해 두해가 가자 점점 초조해졌다. 이대로 인생이 끝난다면 너무나 허무할 것 같았다. 살다보니 풀리지 않는 문제도 있는데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 생각해 낸 것이 불교이다. 중학교 시절 배웠던 불교를 말한다. 배정받아 간 곳이 종립학교였는데 그때 불교를 접한 것이다.

 

마침내 불교의 문을 두드렸다. 강남에 있는 불교교양대학에 들어간 것이다. 2004년도의 일이다. 오랫동안 망설이고 기다리다 결단을 내려 발을 내딛은 것이다. 그런 불교는 친숙한 것이다. 이미 중학교 때 부처님일생부터 접했었고 정서적으로는 이미 불자였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하고 나서부터

 

요즘 교정작업하고 있다. 2006년에 쓴 글을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블로그에 올린 글을 책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2006년에 쓴 것을 모아보니 책 한권 분량이다. 처음으로 쓴 글이라서 그런지 오자와 탈자도 많다. 특히 띄어쓰기가 되어 있지 않아서 일일이 맞추고 있다. 교정하면서 주욱 읽어 보고 있다.

 

화면에 자신의 얼굴이 나오면 부끄럽고 창피한 느낌이 들어간다. 그러나 한번 써 놓은 글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 읽어 보아도 틀림이 없다. 그때와 지금이 조건이 다르기는 하지만 그때의 한계에 맞게 쓴 글이다. 그것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있는 그대로 쓰고자 했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하고 나서부터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전에는 나의 인생이 아니었던 같다. 집과 회사만 왕래하며 세월을 보냈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출근하여 밤늦게 퇴근할 때까지 오로지 일만 생각했다. 그런 세월을 이십년 보낸 것이다. 그러나 남는 것이 없다. 보상심리가 발동해서일까 개발한 제품을 모으고 업무노트를 버리지 않고 모아 두었다. 개발제품과 업무노트에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정년까지 다니는 것은 축복일까?

 

주변에서 정년퇴임한 사람들을 종종 다. 개인적으로는 복 받은 일일 것이다. 회사에 다니면 정년은 꿈과 같은 것이다. 대부분 회사의 역사가 짧다 보니 정년까지 가 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고용보장이 되지 않는다. 회사가 어려워지면 잘라 내야 하고 더 어려워지면 문을 닫아야 한다. 그러나 고용보장과 신분보장이 되는 큰 조직에서는 정년까지 가는 사람들이 있다. 한 곳에서 삼십년 이상 보낸 것이다. 이를 축복이라고 해야 할까?

 

한곳에서 오래 일하면 여러모로 좋다. 무엇보다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아무리 형편없는 회사라도 버틸 수 있을 때까지 그대로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있다 보면 10, 20, 30년 이렇게 세월이 흘러간다. 이순을 전후하여 정년퇴직 했을 때 한평생 잘 살았다고 볼 수 있을까?

 

사십대 중반에 회사를 그만 두었다. 아니 퇴출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아무리 지위가 높고 잘 나가는 사람도 퇴출로서 끝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전화위복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비로서 나의 삶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사십대 중반에 퇴출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크고 안정된 직장에서 정년까지 갔더라면 이렇게 글쓰기를 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인사업자로 살면서 내 인생을 살게 되었다. 그것은 매일 글 쓰는 것으로 구현되었다.

 

세월에 따라 축적되는 삶

 

한번뿐인 인생 후회없이 살고자 한다. 그렇게 살고자 한지 이제 14년이 되었다. 홀로서기를 하고 글쓰기를 한 2006년이 시점이다. 이 기간은 불교와의 만남이기도 하다. 의지처를 찾은 것이다. 그래서 내가 십년만 더 젊었다면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매일 새로운 창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세월에 떠 밀려 가는 것이 아니다. 지난 세월은 흘러 간 것이 아니라 확보된 것이다. 글로서 세월을 꼭 붙들어 매 놓았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실망스러운 것이다. 그럼에도 의지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없는 것으로 치려 한다. 비빌언덕이 있으면 나태해지고 자만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지금처럼 살고자 한다. 세월이 흐를수록 쌓이는 삶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믿음의 재물, 계행의 재물,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재물, 배움의 재물, 보시의 재물, 지혜의 재물이 쌓이는 삶이다. 세월에 따라 정신적 재물이 축적되는 삶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고요함이다. 그것은 항상 가르침과 함께 하는 삶이다.

 

 

[난다] “세월은 스쳐가고 밤낮은 지나가니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행복을 가져오는 공덕을 쌓아가야 하리.”(S2.27)

 

[세존] “세월은 스쳐가고 밤낮은 지나가니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세속의 자양을 버리고 고요함을 원하리.” (S2.27)

 

 

2020-01-1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