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지금 존재하고 있다면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 27. 09:00


지금 존재하고 있다면

 

 

어제 오후 학의천을 산책했다. 쌍개울에서 인덕원 부근까지 한시간 걸었다. 4키로가량 되는 것 같다. 한겨울이긴 하지만 요즘 날씨는 포근한 편이다. 바닥이 질척여서 마치 해빙기의 봄날 같다. 모든 것이 앙상해서 삭막하긴 하지만 햇살이 있어서 삶의 의지를 갖게 한다. 방안에서 웅쿠리고 있는 것보다 밖에 나온 것이 훨씬 더 낫다. 일단 걸어 보면 삶의 활력을 느낀다.

 

하얀 갈대 숲 사이로 후드득 하는 소리가 들렸다. 참새들이다. 자세히 보니 참새보다 더 털이 많고 귀엽게 생겼다. 카메라를 대기도 전에 잽싸게 날아가 버렸다. 까치를 발견했다. 촬영하려 했으나 틈을 주지 않는다. 흰왜가리 역시 틈을 주지 않는다. 한가로이 물에서 노니는 컬러풀한 청둥오리는 찍을 수 있었다. 비둘기는 가까이 가도 전혀 게으치 않는 것 같다. 학의천은 야생 조류의 천국이다.

 




참새, 까치, 왜가리, 청둥오리, 비둘기를 보면 하나의 완성된 생명체로 보인다. 존재하는 것 자체로 완벽해 보이는 것이다. 고운 깃털하며 생김새가 자신만의 고유특성을 가지는 것이 완성품처럼 보이는 것 같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존재는 모두 완성된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사람들하고만 살다보니 이 세상은 사람들만의 세상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사람들은 사람들에 대해서만 관심 갖기 때문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어느 것 하나 사람 아닌 것에 관심 갖지 않는 것 같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가 동물의 왕국같은 자연다큐를 보면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연다큐를 즐겨 본다. 사람들 이야기에 식상하면 종종 자연다큐를 찾는다. 요즘은 케이블에서 하루종일 자연다큐만 방송하는 채널도 있다. 영국 BBC에서 만든 자연다큐 채널이 그것이다. 즐겨 보는 것은 동물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것이다. 한마디로 먹느냐 먹히느냐에 대한 것이다.

 

동물은 생존하고 번식하기 위해 먹는다. 포식자가 사냥을 하는 것은 생존하기 위한 것이고 굶주린 새끼를 돌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포만감이 일어나면 더 이상 사냥하지 않는다. 시도 때도 없이 먹고 마시고 축적하는 인간의 삶과는 다른 것이다. 초식동물은 하루종일 먹는다. 인간과 비슷한 면이 있다. 그러나 생존하기 위해 먹는다. 인간처럼 즐기기 위해 먹지 않는다. 동물은 발정기때만 교미한다. 인간처럼 시도때도없이 교미하지 않는다.

 

자연다큐를 보면 측은한 느낌이 든다. 어쩌다가 축생으로 태어나서 생존에 몸부림 치다가 결국 잡아 먹히기 때문이다. 자연생태계에는 먹이 사슬이 있어서 먹고 먹히는 것이 일상이다. 초원의 풍경이 겉으로는 평온해 보여도 치열한 생존경쟁의 현장이다. 대자연의 스펙터클한 광경에 압도되어 감탄하지만 속으로 들어가서 보면 약육강식의 비정한 세계가 펼쳐진다. 인간의 세계도 이와 다름없다.

 

인간은 동물이다. 인간을 정치적 동물이니 경제적 동물이니 하여 명칭을 붙여 주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갖가지 명칭이 부여된 인간은 최종적으로 동물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약육강식의 동물적 본능에 따른 것이다. 오로지 식욕과 번식욕으로만 살아 간다면 동물적 삶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것은 무엇일까? 여러가지를 들 수 있지만 크게 두 가지를 들라면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이라는 두 개의 기둥이다. 사람들이 부끄러움괴 창피함을 모른다면 이 세상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모두가 짐승이 되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약육강식의 짐승의 세상이 된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시대가 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 밝은 원리가 세상을 수호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이다. 이와 같은 두가지 밝은 원리가 세상을 수호할 수 없다면 어머니나 이모나 외숙모나 선생의 부인이나 스승의 부인이라고 시설할 수 없을 것이고, 세상은 염소, , , 돼지, , 승냥이처럼 혼란에 빠질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 밝은 원리가 세상을 수호하므로, 어머니나 이모나 외숙모나 선생의 부인이나 스승의 부인이다라고 시설하는 것이다.(It.36, A2.9)

 

 

이 세상은 사람들만 사는 세상이 아니다. 이 세상은 사람들의 세상이라고 보았는데 조그만 벗어나면 이 세상은 축생의 세상이기도 하다. 세상사람들이 눈길 한번 주지 않아도 그들은 그들만의 방식대로 살아간다. 먹이를 주지 않아도 그들은 스스로 먹이를 찾아 생존한다. 각자 고유성을 지닌 성체를 보면 완전한 기능을 가진 완성품처럼 보인다. 이는 다름아닌 기적이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 남아 이렇게 존재하는 것 자체가 기적인 것이다.

 

세상은 사람만 사는 세상이 아니다. 지금 이시각에도 모든 존재는 자신만의 삶의 방식대로 살아간다.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세상이긴 하지만 지금 존재하고 있다면 그것 자체로 기적이고 완성된 존재이다. 마치 활짝 핀 꽃을 보는 것 같다. 대지를 모태로 하여 온갖 잡꽃들로 장엄된 화장세계를 보는 것 같다.

 

 

2020-01-2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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