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자꾸 만나자고 하는데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 27. 09:06


자꾸 만나자고 하는데

 

 

어제 설날 귀가하면서 유튜브에서 들은 것이 있다. 최근 핫이슈로 부상한 청와대공직비서관의 기소에 대한 것이다. 한편에서는 날치기기소라 하고 또 한편에서는 총장패싱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했다. 보수야권을 대변하는 전쇄신위원장출신 변호사는 내가 법조계 40년 있어서 아는데라며 운을 떼었다. 이에 시민단체출신 여성토론자는 사실만 말하겠다며 맞섰다.

 

나이가 들면 나이값을 하려고 한다. 어떤 이는 내 나이가 칠십인데 말이야라며 나이의 권위에 의존하려고 한다. 더구나 과거 경력까지 있다면 경력의 권위에 의존할 것이다. 변호사출신의 토론자가 그랬다. 법조계 일은 자신이 더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말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라는 뉘앙스로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자만이다. 대개 내가 누군데라는 식으로 말하면 자만이기 쉽다.

 

불교에 입문한지 오래 되지 않았다. 2004년도에 불교교양대학 문을 두드렸으니 16년차 불자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교를 20, 30, 40년 한 사람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학계에서 권위자라면 더욱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삼년전의 일이다. 어느 강연회에서 불교학의 권위자들을 비롯하여 불교와 30년 또는 40년 인연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다. 블로그에 글만 쓰다가 커밍아웃 했다고 볼 수 있다. 블로그에서는 실명과 얼굴을 숨기고 필명으로만 소통했기 때문에 그날의 출현은 예상치 못한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글에서 본 것과는 부드러운 인상이라고 했다. 글에서는 때로 거칠고 때로 날카로운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무엇보다 관심 가진 것은 불교경력이다. 짧은 기간 동안 쓴 것에 대하여 놀라워하는 것 같았다.

 

오로지 집과 사무실을 시계추처럼 왕래하면서 글만 썼다. 그럼에도 종종 만나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글만 보고서 관심을 보인 것이다. 어떤 이는 종로에 있는 자신의 다실에 차나 한잔 하자며 오라고 했다. 그러나 나가지 않았다. 그들을 실망시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슨 대단한 사람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지만 막상 만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마도 시험해 보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만나서 대화 몇 마디 하다보면 금방 밑천이 드러나 보일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결정적으로는 자세의 문제이다. 아쉬운 사람이 찾아와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라고 한 것은 안가도 그만이다. 초면에 예의가 아니라고 보았다.

 

사무실에 찾아온 사람도 있었다.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전화한 것이다. 불가에서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고 했다. 찾아온 사람과 길게 얘기를 나누었다. 이것저것 선물도 주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방문할 때는 자그마한 선물이라도 준비해야 한다. 귀중한 시간 내 주었는데 자신의 이야기만 하고 사라진다면 실례일 것이다. 그러고보니 여러차례 실례한 것 같다. 만나 보기를 원하여 찾아 갔는데 빈 손으로 간 것이다. 그럼에도 바쁜 시간 내 주어서 얘기를 경청해 준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생각한다. 또 한편으로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날 강연회장에서 관심 받았다. 글에서만 만나던 사람을 직접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불교를 안지 십년 약간 넘었다가 말하자 거봐, 숫자가 중요하지 않다니까?”라며 말 했다. 불교를 안지 50년 되었다는 권위자는 놀랍다는 모습을 보였다. 다음 단계는 검증단계일 것이다. 대화 몇 마디 나누면 금방 드러난다. 불교를 체계적으로 배워 본 적도 없고 수행을 한 적도 없었다. 소위 큰스님이라 부르는 선지식도 알지 못했다. 여러모로 스펙이 떨어져도 한참 떨어졌다. 그들은 비로소 안심했던 것 같다. 자신보다 못한 것을 확인했으니 더 이상 큰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 같았다.

 

불교관련 블로그를 운영하다 보니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난다. 대개 긴 꼬리표가 달려 있다. 나름대로 한가락 하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이력만 보고서 사람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오래 된 사람일수록 학력이 좋을수록 으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자신을 소개할 때 이력과 경력이 길면 길수록 ,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 하는 것 같다.

 

지금은 유폐되어 있는 엠비(MB)가 늘 하던 말이 있다. 그것은 내가 해 봐서 아는데라는 말이다. 전문가행세를 하는 것이다. 이는 자만이다. 앞서 언급한 변호사가 토론중에 내가 법조계에 40년 있었는데라고 말 하는 것과 같다. 권위에 의존하여 자신의 말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말을 하는 것이다. 불교계에도 이런 사람이 없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 아함경에서는 스님도 믿지 말라고 했다. 왜 그럴까? 스님이 계행을 어겼을 때 신도가 떠날 수 있다. 오로지 스님만 믿고 신행생활 했는데 스님의 계행에서 실망한다면 신도도 떠날 뿐만 아니라 교세가 약화될 수 있다. 그렇다면 누구를 믿어야 할까? 당연히 불법승 삼보를 믿어야 한다. 특히 스님대신 승가를 믿어야 한다. 스님의 계행에 대해서는 실망할 수 있지만, 승가를 믿으면 살망 할 염려가 없다. 자자와 포살이 있는 승가는 청정하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 불교가 전승되어 온 것은 청정한 승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도인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세속의 일을 하찮게 생각하는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눈이 있어도 장님처럼 살고,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처럼 살라고 했다. 자신을 드러내지 말라는 것이다. 또 이익과 손실,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에 대해서도 높은 산의 바위처럼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항상 사띠를 유지해야 한다. 늘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누군데!”라는 아상이 생겨날 수 없다.

 

 

“눈 있는 자는 오히려 눈먼 자와 같고, 귀 있는 자는 오히려 귀먹은 자와 같아야 한다. 지혜가 있는 자는 오히려 바보와 같고 힘센 자는 오히려 허약한 자와 같아야 한다. 생각건대 의취가 성취되었을 때 죽음의 침상에 누워야 하기 때문이다.(Thag.501)

 

 

인터넷에 글쓰기하고 있다. 가능한 경전과 주석을 근거로 쓰고 있다. 그렇게 쓴지 십수년 되었다. 수많은 글이 인터넷의 바다에 떠돌고 있다. 어떤 이들은 대체 어떤 인간일까?”라며 궁금해하는 것 같다. 또 어떤 이는 꼭 만나야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꼭 만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글에 다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글이 그 사람의 얼굴이고 인격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글로서 드러내는 것도 어쩌면 자만일 것이다.

 

 

2020-01-2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