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로 와란뉴 와라도 와라하로
“와로 와란뉴 와라도 와라하로. (varo varaññū varado varāharo)”무슨 주문 같은 말이다. 사실 주문과 다름없는 말이다. 숫따니빠따‘라따나경(寶石經)’(Sn2.1)에 실려 있는 13번째 게송이다. 뜻은 “위없는 것을 알고, 위없는 것을 주고, 위없는 것을 가져오는 최상의 님”(Stn.234)이라는 뜻이다.
매일아침 라따나경과 함께 한다. 이미우이의 음악으로 하루일과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지 13년 되었다. 이제 라따나경을 듣고 따라하는 것은 일상이 되었다. 그런 라따나경은 삼보에 대한 예경과 찬탄이라는 것이다. 붓다와 담마와 상가에 대한 최상의 예경문이다.
와로 와란뉴 와라도 와라하로
라따나경에서 “와로 와란뉴 와라도 와라하로”부분에 이르면 차분해진다. 부처님에 대한 최상의 찬탄이기 때문이다. 음악에서는 차분한 음조로 노래되고 있다. 주석에 따르면, 와로(varo)는 ‘위없는(uttamo)’ 또는 ‘훌륭한 님(seṭṭho)’의 뜻이다. 위없는 님과 훌륭한 님은 부처님을 뜻한다.
위없는 님, 훌륭한 님인 부처님에 대하여 ‘위없는 것을 안다’고 하여 ‘와란뉴(varaññū)’라고 했다. 와란뉴는 ‘열반을 체득한 자(nibbānaññū)’를 말한다. 와란뉴는 ‘열반을 발견한 자’라는 뜻도 된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열반을 발견한 자는 부처님이기 때문이다.
위없는 님, 훌륭한 님인 부처님에 대하여 ‘위없는 것을 준다’고 하여 ‘와라도 (varado)’라고 했다. 와라도는 ‘위없는 가르침을 주는 자(varadhammadavī)’라는 뜻이다. 와라도는 문자적으로 ‘열반의 길을 보여주는 자’라는 뜻이다. 빠알리사전에서는 ‘은혜를 주는 자(giver of the boon)’라고 했다. 열반으로 인도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위없는 님, 훌륭한 님인 부처님에 대하여 ‘위없는 것을 가져온다’고 하여 ‘와라하로(varāharo)’라고 했다. 와라하로는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을 가져오는 자(八支聖道)’라는 뜻이다. 빠알리사전에서는‘열반의 혜택을 가져다주는 자 (Bringing the boon of nirvāṇa)’라고 설명해 놓았다. 열반은 팔정도를 닦아 완성되기 때문이다.
와라하로에서 ‘하로(haro)’라는 말은 빠알리사전에 따르면 ‘the God Isvara’라고 설명되어 있다. 천수경 신묘장구대다라니에서 산스크리트어로 ‘닐라깐타로케스바라(Nīlakaṇṭha Lokeśvara)’라는 말이 있다. 한자어로 ‘청경세자재(靑頸世自在)’라고 하는데, 우리말로는 푸른 목을 가진 주재자를 말한다. 이 말은 하리-하라(Hari-Hara)라는 말이 신격화된 것이다.
하리-하라(Hari-Hara)는 비쉬누(Viṣṇu)와 시바(Śiva)가 결합한 형태의 상을 말한다. 사전을 보면 하라는 ‘Shiva’의 뜻으로 되어 있다. 라따나경 성립연대가 힌두이즘 보다 더 앞섰기 때문에 하라라는 말은 시바를 말하기 보다는 부처님과 같은 최상의 존재를 의미한다. 그래서 ‘와라하로’라고 했을 때 최상중의 최상의 뜻이 된다. 다름아닌 부처님을 지칭한다.
부처님은 열반이라는 선물을 준 최상의 존재이다. 팔정도를 닦아 열반에 이르게 한 자라서의 부처님을 말한다. 이런 부처님에 대하여 와로라고 했다. 또 와라와로라고 했다. 그래서 최상의 님께서 최상의 가르침을 펼친 것에 대하여 ‘아눗따로 담마와랑(Anuttaro dhammavaraṃ)’ 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전체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와로 와란뉴 와라도 와라하로(Varo varaññū varado varāharo)
아눗따로 담마와랑 아데사이(Anuttaro dhammavaraṃ adesayī)
이담삐 붓데 라따낭 빠니땅(Idampi buddhe ratanaṃ paṇītaṃ)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Etena saccena suvatthi hotu.)”
“위없는 님, 위없는 것을 알고,
위없는 것을 주고, 위없는 것을 가져오는,
최상의 님께서 위없는 님께서, 위없는 가르침을 설하시니
부처님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므로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할지니라.”(Stn.234)
라따나경과의 인연
라따나경과의 인연은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재미가 한창 붙었을 때이다. 불교와 관련된 이런저런 글과 정보를 접하다 보니 불교관련음악이 포착되었다. 이제까지 듣지 못하던 이미우이(Imee Ooi: 黃慧音)음악이다.
신묘장구대라니나 금강경 독송테이프만 듣다가 이미우이음악을 접하자 전혀 다른 세계가 전개되는 것 같았다. 그것도 빠알리어, 산스크리티어, 티벳어로 된 것이다. 혼자 듣기 아까워서 블로그에 공유해 놓았다. 중국사이트 링크를 달아 놓은 것이다. 블로그에 불교명상음악방을 만들어 놓고 본격적으로 보급한 것이다. 그런 음악중의 하나가 라따나경이다.
라따나경 음악으로 하루일과를 시작한다. 벌써 13년째 듣고 있다. 그러나 듣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라따나경을 외워 보기로 한 것이다. 마치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우듯이 주문처럼 외우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뜻을 알고 외우면 더 낫다. 먼저 17개나 되는 게송에 대하여 빠알리어 의미를 파악하고자 했다. 빠알리사전을 이용하여 낱말을 하나하나 분석해 보았다. 2011년도의 일이다.
라따나경 외우기
라따나경을 빠알리원문으로 외우는데 한달 보름가량 걸렸다. 2005년도에 금강경을 외웠을 때와 비슷한 기간이다. 그런데 금강경 외기 보다 더 힘들었다는 사실이다. 금강경은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어느 정도 뜻을 알 수가 있어서 도움을 주었지만, 빠알리어 원문은 도무지 어떤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마치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접하는 기분이었다.
외우려면 단순반복하는 것 외 달리 방법이 없다. 빠알리어로 된 라따나경 역시 일단 외고 보자는 식으로 입에서 술술 나올 때까지 반복에 반복을 거듭했다. 그리고 ‘벽돌쌓기식’으로 외웠다. 이전 게송을 외워야만 다음 게송을 외는 작업에 들어 갔다. 10번째 게송을 외우려한다면 먼저 1번 게송부터 9번게송까지 모두 외운 것을 확인한 다음에 10번째 게송외우기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식으로 벽돌을 쌓았을 때 마지막 17번째 게송을 모두 다 외웠을 때는 전체 17개의 게송을 모두 다 외우게 된다.
라따나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틀리지 않고 다 외웠다. 2011년의 일이다. 외운 것을 확인하자 “아, 내가 해냈구나!”라며 스스로 인정했다. 이어서 강한 성취감이 밀려 들었다. 마음은 뿌듯해졌고 기쁨과 환희가 일어났다. 이런 잔잔한 기분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마치 득도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라따나경을 어렵게 외웠다. 다음은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외었다. 틈만 나면 신묘장구대다라니 외듯이 외웠다. 그러나 자주 외지 않으면 잊어버린다. 또 세월이 지나면 줄줄 외기 힘들다. 그럼에도 한번 머리속에 입력된 것은 촉발만 시키면 나오게 되어 있다.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따라하다 보면 자동적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라따나경도 마찬가지이다.
왜 원문으로 독송해야 하는가?
라따나경은 빠알리어로 된 것이다. 뜻도 잘 모르면서 외우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는 뜻도 몰라도 잘 외운다.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보면 알 수 있다. 한국불자들은 산스크리트어로 다라니를 잘도 따라 외운다. 그것도 한자어로 음사해 놓은 것을 외운다. 그러다 보니 “나모라 다나다라”라는 식으로 본래 음과 다르게 외운다. 그러나 다라니는 음이나 뜻을 모르고 외워도 된다고 했다. 왜 그럴까?
수월선사는 신묘장구대다라니 하나로 득도했다고 전한다. 그런 스님은 일자무식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허드렛일을 하거나 부엌에서 불을 땠다고 한다. 하루는 부엌에서 다라니를 독송했는데 방광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져 오고 있다. 지금도 서산 천장사에 가면 수월스님이 불을 땠다는 부엌을 볼 수 있다.
수월스님은 다라니를 외울 때 뜻을 모르고 외웠다고 한다. 그럼에도 득도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라니를 독송함으로 인하여 힘을 받기 때문이다. 설령 음을 다르게 독송해도 뜻이 통한다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감응(感應)’이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독송해왔기 때문에 그에 대한 감응을 받기 때문에 독송하면 힘을 받는다고 말한다. 이는 테라와다에서도 똑같이 말하고 있다.
스리랑카 출신 담마끼띠스님이 한 말이 있다. 경을 외울 때는 빠알리원문으로 외우는 것이 좋다고 했다. 예경문도 마찬가지이고 삼귀의(tisaraṇa)와 오계 (pañcasīla)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법회할 때 모두 빠알리어로 독송한다. 왜 그럴까? 담마끼띠스님에 따르면 힘을 받기 때문이라고 했다. 원음으로 독송하면 힘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경이나 게송, 다라니, 주문은 수호(守護)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따나경은 빠알리어로 된 것이다. 부처님은 빠알리어와 같은 민중어로 설법했다.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다. 불자들이 부처님 당시의 언어로 독송한다면 힘을 받을 것이다. 부처님 당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던 말이고 이후 수많은 사람들 입에서 독송되었기 때문에 힘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원문을 독송하여 깨달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천신이 된 자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원문을 독송하면 감응이 되어서 힘을 받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라따나경은 테라와다불교에서 예불문이자 대표적인 수호경 중의 하나에 속한다.
음악동영상을 만들어 유튜브에
라따나경 음악을 매일 듣는다. 클라이막스는 아마도 6번째 게송 “예 뿍갈라 앗타사땅 삿타 짯따리 에따니 유가니 혼띠(Ye puggalā aṭṭhasataṃ pasatthā Cattāri etāni yugāni honti)”라는 구절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구절은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사람들이 있어, 참사람으로 칭찬받으니”(Stn.227)라고 해석된다. 음악에서는 이 부분에서 최고조가 된다.
라따나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절을 들라면 열 두번째 게송일것이다. 게송은 “와납빠굼베 야타 풋시딱게 기마나마세 빠타마스밍 기메(Vanappagumbe yathā phussitagge Gimhānamāse paṭhamasmiṃ gimhe)”로 시작된다. 이 구절은 “여름날의 첫 더위가 오면, 숲의 총림이 가지 끝마다 꽃을 피어내듯,”(Stn.233)라고 번역된다. 이 게송에서는 차분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잔잔한 기쁨과 희열이 느껴지는 것 같다.
인터넷시대를 맞이하여 라따나경을 알게 된 것은 행운이다. 이미우이의 라따나경 음악을 알게 된 것이 행운임을 말한다. 2007년 이후 지금까지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듣는다. 그리고 따라 부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삼보에 대한 예경과 찬탄에 대한 것이다. 가장 고층경전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숫따니빠따에도 실려 있고 테라와다에서는 예불문이자 동시에 수호경이다. 이를 동영상으로 만들어 보급도 했다. 음악동영상을 만들어 유튜브라는 바다에 띄운 것이다. 2013년에 올린 것이다.
음악동영상 라따나경은 유튜브에 ‘보배경(보석경, Imee Ooi) (https://www.youtube.com/watch?v=QmfKUvZz9jY&t=230s )이라는 이름으로 올려 놓았다. 현재 누적조회수가 33,154명에 달한다. 이밖에도 유튜브에는 업로드한 동영상이 26개가 있다. 2008년부터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단지 좋은 음악을 공유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특별한 관리를 하지 않았어도 현재 구독자는 303명이다.
오늘도 라따나경 음악을 들으며
라따나(ratana)라는 말은 우리말로 보석 또는 보배라는 뜻이다. 그래서 보석경 또는 보배경이라고 한다. 흔히 삼보를 말하는데 붓다라는 보석, 담마라는 보석, 삼보라는 보석을 말한다. 이 세 가지 보배에 대하여 매일매일 예경하고 찬탄하면 어떤 과보가 따를까?
후렴구 게송을 보면 “나맛사-마 수왓티 호뚜(namassāma suvatthi hotu)”로 끝난다. 해석하면 “모든 존재들이여, 모두 행복할지니라.”라는 뜻이다. 이는 다름 아닌 부처님의 축원이다. 라따나경을 독송하면 모두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오늘도 라따나경 음악을 들으며 “와로 와란뉴 와라도 와라하로”하며 따라 부른다.
2020-01-3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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