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귀의(三歸依) 없으면 불자도 없다
가르침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승되어 오면서 변질이 있었다는 것이다. 구전으로 전승된 가르침을 문자로 옮기는 과정에서도 변질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원음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경전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어떤 이는 경전이 필요 없다고 한다. 말이나 문자로는 진리를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정도로 보는 것이다. 또 언어로 된 것은 방편에 지나지 않다고 한다.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은 마음과 뜻으로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전에 대하여 회의하는 자나 무용론자는 경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다. 방대한 경전을 다 읽어 보고 하는 소리인지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경전을 읽어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설령 전승과정에서 첨삭되었다고 해도 큰 뜻은 변한 것이 아니다. 이 경전에 간략하게 설명된 가르침이 저 경전에서는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기도 하다. 여러 니까야를 보면 중복되는 가르침도 많다.
니까야에는 연기, 오온, 12처, 사성제, 팔정도 등 온갖 가르침이 있다. 상윳따니까야에는 56개 주제별로 구분되어 있다. 공통적으로 해탈과 열반이라는 한방향으로 향한다. 모든 현상은 무상, 고, 무아로 설명된다. 그리고 니까야는 수행지침서이기도 하다.
니까야에는 근본 가르침과 수행에 대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비실천의 가르침도 있고 부부간의 가르침도 있고 자녀교육대한 가르침도 있다. 또 우정의 가르침도 있고 간병에 대한 가르침도 있다. 심지어 사업에 대한 가르침도 있다. 그래서 문제가 생겼을 때 “이럴 때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라며 니까야를 열어 보는 것이다.
경전을 열어 보면 해법이 있다. 우울 할 때 열어 보면 기쁨이 일어난다. 욕망이 지배할 때 열어 보면 탐욕이 사라진다. 분노할 때 읽어 보면 평온한 마음이 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대체 경전에는 어떤 마법이 있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경전을 보는 순간 우울한 마음 등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 게송 몇 개만 보면 미워하는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린다. 왜 그런가? 마음은 한순간에 두 가지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전을 보는 순간 우울, 탐욕, 분노 등 번뇌가 사라진다.
경전은 깨달은 자의 말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깨달은 자는 진실만을 말한다. 반대로 깨닫지 못한 자의 말은 진실이 아닐 것이다. 누군가 경전을 의심하고 경전이 필요 없다고 말한다면 그가 깨달은 사람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깨닫지도 못한 자가 법에 대해 회의하거나 경전무용론을 주장한다면 진실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처럼 깨달은 자의 말은 진실이고, 범부처럼 깨닫지 못한 자의 말은 거짓이다.”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과연 깨달은 자의 말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깨닫지 못한 자의 말을 믿을것인가. 가르침에 대하여 회의한다면 법보에 의지하지 않는다고도 볼 수 있다.
불자가 되는 조건은 무엇일까? 수계를 받아야 불자가 되는 것일까? 니까야에 따르면 삼보에 귀의하는 것으로 불자가 된다. 삼귀의는 불자가 되기 위한 충분조건이 된다. 그렇다면 오계는 어떤 조건일까? 오계는 불자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 볼 수 있다. 오계만 지키고 삼귀의 하지 않는다면 불자라 볼 수 없다.
불자들은 법회 할 때 마다 삼귀의 한다. 만약 그가 삼보에 귀의하지 않는다면 불자라고 볼 수 없다. 붓다와 담마와 상가를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 삼아야 불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삼보는 모두 부처님과 관련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과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승가공동체에 귀의 하는 것이다. 만일 세 가지 중에 하나만 결여되어도 불자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부처님과 가르침에만 귀의하고 승가에 귀의하지 않는다면 이귀의(二歸依)가 되어 불자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놀랍게도 한국불교에는 승가에 귀의하지 않는다. 한글삼귀의문을 보면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스님들과 승가는 다른 것이다.
승가는 최소 4명 이상이고 자자와 포살이 있어야 한다. 불자들은 자자와 포살이 있는 청정한 승가공동체에 귀의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불교에는 승보가 없는 이귀의가 된다. 엄밀히 따진다면 한국불교에는 삼귀의가 없어서 불자가 없는 것이 된다.
한국불교는 이귀의 불교이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경전을 의심하고 경전무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이귀의에서 법보가 빠지면 남는 것은 부처님 하나만 있게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불교에서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 부처님 보다도 조사스님들에게 더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만 남은 불보마저 없게 된다.
불자가 되는 조건에 대하여 삼보에 귀의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상윳따니까야 ‘마하나마의 경’에서 재가신자 마하나마가 “세존이시여, 어떻게 재가신도가 됩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부처님은 “마하나마여, 부처님에게 귀의하고 가르침에 귀의하고 참모임에 귀의합니다. 마하나마여, 이렇게 재가신도가 되는 것입니다. (S55.37, A8:25)”라고 말했다. 불자가 되는 가장 첫 번째 조건이 바로 삼보에 귀의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불자들은 법회가 열릴 때 마다 빠뜨리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삼귀의문’이다. 삼귀의는 법회뿐만 아니라 불교행사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이렇게 삼귀의문을 낭송하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자신이 불자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다른 것을 귀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Buddha), 가르침(Dhamma), 상가(Sangha)를 귀의처로 하고 의지처로 하고 피난처로 하는 것이다.
한국불교에는 삼보가 없다. 부처님도 없고 부처님 가르침도 없고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상가도 없다. 그 대신 조사스님이 부처님 자리에 있고, 가르침은 의심되거나 무용지물이 되고 있고, 상가는 스님들로 대체되고 있다. 한국불교는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삼귀의가 없는 불교를 불교라고 할 수 있을까? 누군가 ‘한국불교에는 불자가 없다’라고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
2020-04-0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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