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분노의 밥상을 받지 않으려면

담마다사 이병욱 2020. 4. 14. 07:54

 

분노의 밥상을 받지 않으려면

 

 

글쓰기는 일상이다. 밥먹는 것과 같다. 오늘 하루 뭐라도 하나 써야 한다. 날 마다 다르다. 주제가 쉽게 떠 오르는 날이 있는가 하면 뭘 써야 될지 모르는 날도 있다. 그럼에도 써야 한다. 글쓰기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이다.

 

의무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밥먹듯이 쓰는 글의 소재는 널려 있다. 소재가 고갈되어 쓰기를 중단하는 일은 없다. 하루에 하나는 반드시 써야 하기 때문에 어느 것이나 글쓰기 소재가 된다.

 

글쓰기는 업을 짓는 것이다. 필업(筆業)은 신구의 삼업 중에 구업(口業)에 속한다. 구업이 반드시 입으로만 짓는 것은 아니다. 언어적 행위도 구업에 속한다. 업에는 선업도 있고 불선업도 있다. 보는 이에게 유익했다면 선업을 짓는 것이고, 불익을 주었다면 불선업을 짓는 것이다. 필업이 구업이긴 하지만 선업이 되길 바란다.

 

종종 댓글을 받는다. 대부분 칭찬과 격려의 글이다. 악의적인 글도 있다. 비판을 넘어 비난과 비방에 가까운 글이다. 시기와 질투의 글도 있다. 인정하지 않으려는 글도 있다. 마치 입에 칼을 물고 찌르는 것 같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사람은 한쪽 손에는 똥을 들고 있고 또 한쪽 손에는 숯불을 들고 있다. 그 사람은 상대방을 향해 던지려고 하고 있다. 불쾌하고 불편하다고 하여 맞대응하면 똥물을 뒤집어쓸 것이다. 그리고 불에 타버리고 말 것이다. 그럴 때는 상대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분노의 밥상을 받지 않으면 모두 그 사람의 것이 될 것이다. 똥을 든 손에는 구린내가 진동하고 숯불을 든 손은 타 들어 갈 것이다. 그래서 분노하는 이에게 분노하지 말라고 했다.

 

글을 쓰다 보면 글이 길어진다. 어제 쓴 글은 A4 9장 되었다. 폰트 사이즈 12로 해서 쓴 글이다. 쓰다 보니 7시간가량 되었다. 아침 일찍부터 시작하여 오후 4시에 끝났으니 하루일과를 글쓰기로 다 보낸 것이다.

 

긴 글을 쓰고 나면 미안한 마음을 갖는다. “누가 이런 긴 글을 읽어 줄까?”에 대한 것이다. 그럼에도 보아주는 사람이 있다. 익숙한 이름들이다. 한번도 직접 대면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오로지 이름과 이미지로만 아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페이스북에서는 친구라고 한다. 줄여서 페친이다.

 

글을 길게 쓰는 것도 습관일 것이다. 표현하고 싶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익하지 않다면 귀중한 시간을 빼앗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한가지라도 건질 것이 있어야 한다. 경전 문구가 가장 좋다. 경전문구를 중심으로 글을 전개해 나가다 보니 글이 길어진다.

 

한번 글쓰기 하면 오전이 다 지나간다. 글쓰기 할 때는 의미와 형식을 갖추려고 노력한다. 나중에 책으로 낼 것을 염두에 두는 글쓰기이다. 그러다 보니 서론, 본론, 결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기승전결의 글쓰기도 된다.

 

시간이 없으면 결론만 보아도 된다. 그럼에도 글이 길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다. 5시간 걸린 글을 1분에 다 보고자 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요약해서 쓰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이럴 때는 글이 너무 길어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다.

 

사람들의 성향은 제 각각이다. 글이 길면 길다고 말한다. 글이 짧으면 짧다고 말할 것이다.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할지 모른다.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아뚤라여, 이것은 오래된 것이니

지금 단지 오늘의 일이 아니다.

침묵한다고 비난하고

말을 많이 한다고 비난하고

알맞게 말한다고 비난하니

세상에서 비난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Dhp.227)

 

"오로지 비난만 받는 사람이나

오로지 칭찬만 받는 사람은

과거에 없었고

미래에 없을 것이고 현재에도 없다."(Dhp.228)

 

 



이 세상에서 비난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다 보니 불만족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말이 길면 길다고 비난하고, 침묵하면 침묵한다고 비난한다.

 

한번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부정적 생각이 지배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이어지는 게송을 보면 아주 단단한 바위덩이가 비람에 움직이지 않듯, 이와 같이 현명한 님은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않는다.” (Dhp. 81)라고 했다.

 

현자들은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세속팔풍(世俗八風)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이익과 불이익, 칭찬과 비난, 명예와 불명예, 행복과 불행 이와 같은 여덟 가지 바람에 팔랑개비처럼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난과 비방에는 깨진 종처럼 반응하지 않는 것이 좋다. 땅바닥에 금이 간 종은 아무리 쳐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바닥으로 소리를 흡수해 버리고 깨진 틈으로 새어 나가기 때문이다. 글이 길다고 불평하는 사람에게는 대응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일일이 대응하여 이겨 먹으려고 한다면 그는 하수일 것이다.

 

최근 유튜브에서 어느 정치인이 욕하는 것을 보았다. 유튜브 댓글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다. 실시간으로 방송되는 유튜브 채널에서는 역시 실시간으로 댓글을 보여준다.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댓글로 자극한다. 그는 대단히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았을 때 실망했다. 그의 한계를 본 것이다. 리더라면 감정에 흔들림 없이 차분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나 정반대 모습을 보여 주었을 때 안타까웠다.

 

어떤 일이 있어도 화내지 말아야 한다. 화 내면 지는 것이다. 분노조절에 실패 했을 때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된다. 모든 분노는 파괴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댓글로 마음이 불편하다고 대응하면 그는 하수일 것이다. 무대응이 상책이다.

 

 

참으로 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힘없는 자에게 인내하네.

그것을 최상의 인내라 부르네.

힘 있는 자는 항상 참아내네.

 

어리석은 자의 힘은

힘없는 자의 힘이라네.

진리를 수호하는 힘 있는 자에게

대적할 사람은 없다네.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면,

그 때문에 그는 더욱 악해지리.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지 않는 것이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네.

 

다른 사람이 화내는 것을 알고

새김을 확립하여 고요히 하면

자신을 위하고 또 남을 위하고

둘 다 이익을 위한 것이네.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를 치료하는 사람을

가르침을 모르는 자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네.(S11.5)

 

 

2020-04-1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