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입부리를 조심하라고 했는데

담마다사 이병욱 2020. 4. 17. 09:52

 

입부리를 조심하라고 했는데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은 인간만이 가능한 것이다. 동물에게는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인간만이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알기에 사과를 한다.

 

종종 사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단체카톡방에서는 글로서 사과의 말을 올린다. 사과를 할 정도라면 크게 잘못 했을 것이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양심과 수치심 때문에 사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과할 것이라면 왜 그런 행위를 했는지에 대해 의구심이 든다. 한마디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사람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비난하는 사람에 대해 발끈 하는 것은 자존심과 관련이 있다. 무시당했다고 생각했을 때 보복하고자 하는 심리가 발동된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겨 먹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깐죽 거리는 사람이 있다면 타격을 가하고자 한다. 대부분 말로 한다. 에스엔에스(SNS)에서는 글로 한다. 마치 입에 칼을 문 듯 마구 찌르는 것이다.

 

말은 한번 뱉으면 주어 담을 수 없다. 특히 공공장소에서 말 실수하면 회복되지 않는다. 유튜브에서 생방송으로 말하는 것도 그렇다. 상대방을 깍아 내리기 위해 비방했을 때 그 순간은 시원할지 모르지만 후유증은 오래 간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을 때 말 실수하면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에스엔에스에서 글 쓰는 것도 그렇다.

 

중학교 2학년 때 들은 말이 있다. 지리선생님에서 들은 말이다. 선생님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미지는 선명하게 남아 있다. 선생님은 남자라면 세 가지 부리를 조심해야 된다고 말했다. 신체와 관련된 것으로 그 중에 하나가 입부리이. 이는 다름아닌 구업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함부로 입을 놀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입을 잘못 놀려 패가망신한 사람들이 많다. 마치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열폭 했을 때 남는 것은 회환과 후회와 회환만 남을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행한 뒤에 후회하고

얼굴에 눈물 흘리며 비탄해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그러한 행위를 하는 것은 좋지 않다.”(Dhp.67)

 



 

행위를 한 뒤에 후회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임에 틀림없다. 무언가 행위를 했는데 자꾸 마음에 걸린다면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눈물을 흘릴 정도라면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된다. 마치 살인을 저지른 것처럼 엎질러진 물과 같은 것이다. 설령 그것이 우발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중죄를 지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현세에서 회상하는 순간에 후회스럽고 비탄스러울 뿐만 아니라 미래에 비참한 운명의 상태의 태어남을 가져오므로, 그 결과가 고통스런 행위는 훌륭한 것이 아니고 칭찬할 만한 것도 아니고 유익한 것도 아니다.”(DhpA.II.40)라고 했다.

 

행하고 나서 후회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저 세상에서도 고통받을 것이라고 했다. 눈물을 흘리며 후회하는 것은 자신의 더러운 업을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악행을 하면, 두 곳에서 슬퍼하니 이 세상에서도 슬퍼하고 저 세상에서도 슬퍼한다. 자신의 업의 더러움을 보고 비탄에 빠지고 통탄에 빠진다.” (Dhp.15)라고 하였다.

 

불교에서는 오계를 어기는 것에 대해 중죄로 보고 있다. 초기경전에서는 악처에 태어날 것이라고 했다. 오계가 더욱 확장된 것이 십선계이다. 천수경 십악참회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몸으로, 입으로, 마음으로 짓는 열 가지에 대해 모두 중죄라고 했다. 악처에 태어날 정도로 무거운 죄라는 것이다.

 

천수경 십악참회 중에는 입으로 짓는 것이 네 가지 있다. 망어, 양설, 악구, 기어를 말한다. 초기경전에서는 정어에 어긋나는 것이라 하여 거짓말, 이간질, 욕지거리, 꾸며대는 말”(S45.8)로 번역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네 가지를 보면 오늘날 선거판에 그대로 적용된다.

 

선거는 제로섬 게임이다. 그래서일까 사활을 건다. 상대방을 거꾸러뜨려야 내가 산다고 보는 것이다. 가장 손쉬운 것이 네거티브전략이다. 이는 천수경에서 양설이고 팔정도에서는 이간질에 해당된다. 때로 거친 말도 오간다. 설전 했을 때 악구와 욕설이 될 것이다. 선거철에는 고소와 고발이 난무하여 선거후유증을 겪는다.

 

잘못 했으면 즉시 사과해야 한다. 그래야 여론이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한번 뱉은 말은 주어 담기 힘들다. 중상모략 했다면 사과했다고 하더라도 처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거친 말이나 욕지거리는 사과로 용서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참회 같은 것이다.

 

율장에 참회죄가 있다. 승단추방죄, 승단잔류죄에 이어 세 번째 죄에 해당된다. 경에서는 여러분, 나는 재가 든 자루로 맞아야 하는, 비난을 받을 만한 악한 업을 지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원한다면, 그 대가를 달게 받겠습니다. (A4.242)라고 표현되어 있다.

 

참회죄는 재가 든 자루로 맞는 것이라고 했다. 승단잔류죄는 몽둥이로 맞는 것이다. 승단추방죄는 목이 잘리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참회죄는 무거운 죄가 아니다. 오늘날 사과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잘못을 저질러 사과하는 모습을 보면 안쓰럽다. 연민의 감정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무지와 자만에 따른 것이다. 모르고 지은 죄라 볼 수 있다. 행위를 하면 과보가 따르는 것을 안다면 함부로 행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말을 해서 어떤 결과가 따를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자신의 모든 행위에 대하여 살필 것이다. 그럼에도 행하고 나서 후회할 짓을 하는 것은 업과 업의 과보를 모르는 무지에 따른 것이라고 본다.

 

흔히 하는 말 중에 자만하면 망한다고 한다. “내가 누군데!”라며 안하무인격이 되었을 때 필연적으로 과보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더 나쁜 것은 분노하는 것이다. 분노는 폭망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특히 리더가 자신의 감정하나 콘트롤 하지 못해 열폭했을 때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이런 현상을 정치판에서뿐만 아니라 모임에서도 본다. 단체카톡방에서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때로 분노를 정당화한다. 자비의 분노처럼 사회정의를 위해서 분노하는 것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화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에 집착했을 때 폭력적으로 될 수 있다. 그 결과는 늘 처참한 것이다. 사과하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에서라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분노하는 자가 파괴를 일삼으면

쉽게 부수든 어렵게 부수든

나중에 분노가 떠난 후에

불에 연소된 것처럼 괴로워하네.(A7.64)

 

 

2020-04-1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