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이루는 밤에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있다. 자는 둥 마는 둥 한다. 그렇다고 더 자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는다. 한번 깨면 그것으로 끝이다. 새벽 두 시이든 세 시이든 일어나면 글쓰기를 한다. 스마트폰을 똑똑 치는 글쓰기이다. 한구절 쓰고 사유하고, 또 한구절 쓰고 사유하다 보면 서너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이렇게 해도 좀처럼 피곤한 줄 모른다.
잠을 잘 자는 것도 행복일 것이다. 베개에 머리만 대면 코를 골며 금방 자는 사람도 있다. 이 세상에서 숙면을 잘 취하는 것 만한 행복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잠을 잘 자는 사람중의 하나라고 했다. 알라바까 왕자가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잘 주무셨습니까?”라며 묻자, 부처님은 “왕자여, 나는 잘 잤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잠을 잘 자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A3.35)라고 했다.
잠을 잘 자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무 생각이 없어서 잘 자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부처님이 말씀하신 잠을 잘 자는 사람의 특징은 탐욕과 분노가 없는 사람이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욕망으로 가득하다면 쉽게 잠들기 못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그 장자나 아들에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탐욕으로 인한 고뇌가 생겨나면, 그 탐욕으로 인한 고뇌로 불타면서 괴롭게 잠을 자지 않겠습니까?”(A3.35)라며 되물었다. 분노에 대해서는 “성냄으로 인한 고뇌가 생겨나면, 그 성냄으로 인한 고뇌로 불타면서 괴롭게 잠을 자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잠은 잠이 와야 자는 것이다. 잠을 청한다고 하여 잠이 오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번뇌로 가득하기 때문에 쉽게 잠들지 못한다. 대표적으로 탐욕과 성냄이다. 그러나 깨달은 자들은 잠을 잘 잘것이다. 탐욕과 성냄이라는 오염원이 소멸된 성자에게 있어서 탐욕의 고뇌와 성냄의 고뇌로 불타는 밤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감각적 욕망에 오염되지 않고
청량하고 집착이 없고
완전한 적멸을 성취한
거룩한 님은 언제나 잠 잘 자네.
모든 집착을 부수고
마음의 고통을 극복하고
마음의 적멸을 성취한 님은
고요히 잘 잠자네.”(A3.35)
부처님은 잠을 많이 자지 않았다. 부처님의 하루일과를 보면 잠자는 시간은 불과 한 시간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주석에 따르면 후야인 새벽 3시에서 4시 사이에 한시간 동안 사띠하며 취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깨달은 자가 잠을 잘 자는 이유는 감각적 욕망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어느 것에든지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때이든지 잠을 잘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범부들은 집착이 많아서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한다.
마이클 잭슨은 약물중독으로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잠을 잘 자려고 하다 죽었다는 것이다. 공연을 앞두고 숙면을 취해야 했는데 프로포폴을 과도하게 투여하는 바람에 깨어나지 못한 것이다. 성공적인 공연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인하여 약물에 의존하다 변을 당한 것이다.
수행자는 기본적으로 잠을 잘 자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탐욕과 성냄과 같은 마음의 오염원을 없애는 수행을 했을 때 잠에 대한 집착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따진다면 숲에서도 잠을 잘 수 있을 것이다.
청정도론 두타행을 보면 열 세가지 중에서 처소와 관련된 것이 가장 많다. 이는 1)한적한 숲에서 지내는 수행, 2)나무 아래서 지내는 수행, 3)노천에서 지내는 수행, 4)시체 버리는 곳에서 지내는 수행, 5)처소에 맞추어 지내는 수행, 6)항상 눕지 않고 지내는 수행, 이렇게 모두 여섯 가지 두타행이 있다.
처소와 관련된 두타행은 잠자리와 관련된 것이다. 숲이나 나무아래, 노천, 심지어 묘지에서 자는 것도 해당된다. 클라이막스는 눕지 않는 수행일 것이다. 공통적으로 지붕이 없는 처소를 특징으로 한다. 그래서일까 노천에서 지내는 수행에 대한 아름다운 게송이 있다.
“집없는 자에게 어울리고
얻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별들의 보석이 펼쳐지고
달빛이 비추어 빛나니.
노천에 지내는 수행승은
사슴 같은 마음으로
해태와 혼침을 몰아내니
수행락을 누리며 앉는다.
머지않아 그는 발견하리
멀리 여읨의 쾌미를!
그러므로 슬기로운 자라면,
노천에서 지냄을 기뻐해야 하리라.”(Vism.2.63)
하늘을 이불삼아 잠을 잔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오리지널 버전이 아마 “하늘에는 별이 보석처럼 박혀 있고”라는 구절일 것이다. 노천에서 밤을 보내는 것에 대하여 시적으로 표현 한 것이다. 별은 보석처럼 빛나고 달빛은 교교하게 비추는 밤 노천에서 밤을 보내는 수행승을 노래한 것이다.
부처님도 고행을 할 때 노천에서 노숙했다. 이는 “사리뿟따여, 나는 한겨울 차가운 밤에 서리가 내리는 팔일간이 찾아오면, 나는 노지에서 밤을 지새우고 숲에서 낮을 보냈다.”(M12)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서리가 내린 때는 북인도에서 가장 추울 때인 12말에서 1월초를 말한다. 이렇게 노지에서 노숙하며 잠을 잔 것이다.
두타행을 보면 시체 버리는 곳에서 지내는 수행도 있다. 이는 공동묘지와도 같은 곳이다. 이와 같은 공동묘지에 대하여 “비인들이 밤중에 거듭해서 울부짖으며 돌아다니더라도, 아무것도 던져서는 안된다.”(Vism.2.65)라고 했다. 여기서 비인(非人)은 천신, 야차, 나찰, 다나바, 건달바, 긴나라, 마호라가 등을 말한다.
이러한 비인을 만나면 아무것도 던지지 말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청정도론에서는 앙굿따라니까야 송출자의 말을 인용하여 “비인들이 좋아하는 참깨가루, 콩밥, 물고기, 육고기, 우유, 기름, 사탕 등의 단단하거나 부드러운 음식이 제공되어서는 안된다.”(Vism.2.65)라고 했다.
두타행은 정점은 아마도 ‘항상 눕지 않고 지내는 수행’일 것이다. 빠알리어로는 네삿짓까(nesajjika)라고 하고, 한자어로는 상좌불와(常坐不臥)라고 한다.
눕지 않는 수행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행주좌와 네 가지 중에서 바닥에 등을 대고 눕지 않는 것을 말한다. 거니는 것, 서 있는 것, 앉아 있는 것은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앉아 있는 것도 난이도에 따라 상, 중, 하로 나뉜다. 엄격한 자는 어느 것에도 기대지 않는다. 중간인 자는 기댈 수 있는 받침을 사용한다. 느슨한 자는 의자에 앉을 수 있다. 어느 경우이든지 바닥에 등을 대는 순간 눕는 수행의 고리는 파괴된다.
두타행에서 처소와 관련된 여섯 가지를 보면 요즘 말로 노숙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노숙하면 잠이 잘 올까? 지붕도 없고 이부자리도 없는 곳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사실상 고행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왜 이런 고행을 하는 것일까? 가장 큰 목적은 계행을 청정하게 위한 것이다. 옷에 대한 만족, 탁발음식에 대한 만족, 처소에 대한 만족으로 이는 수행의 즐거움과 함께 청정한 삶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두타행은 불교에서 고행과 같은 것이다. 불교에서 고행은 육체를 학대하는 고행이 아니다. 계행을 지키는 것 자체를 고행으로 보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13가지 두타행이 가장 강력한 것이다. 그렇다고 두타행을 하는 것에 대하여 떠 벌리고 다닌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는 아마도 자만 중의 자만에 해당될 것이다. 아홉 가지 자만 중에서 최상층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우월중의 우월이라는 자만에 대하여 “계행-타행 등을 통해서 ‘누가 나 같은 자 있으랴?’라고 교만을 만든다.”(Smv.999-991)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두타행은 깟싸빠 존자가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두타제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청정도론 두타행을 보면 사리뿟따 존자가 두타행의 모범이 된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사리뿟따 존자는 지혜제일로 알려져 있음에도 왜 두타행의 모범이 된다고 했을까? 이는 “두타행을 행하기도 하고 두타행을 말하기도 하는 자이다.”(Vism.2.82)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두타행을 하면서 두타행을 한다고 말하면 이는 자만이 된다. 이를 우월중의 우월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리뿟따는 두타행을 하면서도 두타행을 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말한 것은 훈계와 교계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리뿟따의 두타행에 대하여 “이 존자 사리뿟따는 두타행을 행하기도 하고 두타행을 말하기도 하는 자이다.” (Vism.2.82)라고 한 것이다.
어느 한국인이 달라이라마를 친견했다. 그 한국인은 대뜸 “존자님은 깨달았습니까?”라며 물어보았다. 이에 존자는 “저는 잠을 잘 자는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깨달은 사람은 잠을 자는 사람이다. 탐욕과 분노가 부서진 사람에게 욕망으로 잠 못 이루거나 분노 때문에 잠을 못 자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번뇌가 없기 때문에 노지에서도 노숙할 때도 잠을 잘 잘 수 있을 것이다.
잠은 잠이 와야 잠을 자는 것이다. 잠이 오지 않은데 억지로 잘 수 없다. 그럴 때는 차라리 일어나야 한다. 일어나서 책을 보든, 글을 쓰든, 좌선을 하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낫다. 잠은 조금만 자도 생활하는데 지장이 없다. 잠 잘 때 등을 대지 않는 수행도 있는데 하물며 잠을 푹 자지 못했다고 해서 불만족해야 할까?
“가부좌를 틀고
윗몸을 바르게 하고
앉는 수행자는
악마의 심장을 뒤흔다.
횡와의 수면의 낙을 버리고
용맹정진하며
앉는 것을 기뻐하는 수행승은
고행의 숲을 밝힌다.
자양 없는 희열과 행복
그것에 도달하는 까닭에
현자는 항상 눕지 않고 지내는
서계에 전념해야 한다.”(Vism.2.76)
2020-04-1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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