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백년대계

한국불교가 처한 현실을 생각하면

담마다사 이병욱 2020. 4. 29. 10:16

 

한국불교가 처한 현실을 생각하면

 

 

페이스북에서 충격적인 글을 접했다. 안면 있는 비구니스님 글이다. 작년 1월 미얀마 선원에서도 함께 있었다. 그때 당시 다섯 명이 단기출가하여 머리를 깍았는데 첫날 탁발나갈때 스님과 함께 따라 갔다. 스님은 페이스북에서 인간말종이 중이 됩니다. 인간말종이 중이 되어 성자가 되면 다행이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을 때 말종으로 남게 됩니다.”라고 써 놓았다.

 

스님의 글을 보고 충격 받았다.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줄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사회에서 인식도 그런 정도인 것 같다. 몇 해전인가 종편에서 앞날 잘 맞춘다는 점술인 소개가 있었다. 지하철에서 노숙하고 있는 사람을 보더니 절에 있어야할 사람이 왜 여기 있지?”라는 것이었다. 이 말도 충격으로 다가왔다. 생계형이나 도피형 출가자를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요즘 출가자의 질이 별로 좋지 않다고 한다. 출가율 감소와 함께 두 자릿수대로 떨어지다 보니 동시에 질적하락도 병행된 것이다. 그래서 출가는 사회부적응자나 무능력자가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경향은 한국불교의 질적하락으로 나타난다. 일년에 신학교 졸업자가 수천명 배출되는 개신교와는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다.

 

사는 지역 부근에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연립주택과 재래시장을 밀어 버리고 그 자리에 타워형 고층아파트가 건설되고 있다. 벌써 20층 가까이 올라 갔으니 올해 가을에는 입주가 시작될 것이다. 그런데 한켠에 어마어마하게 큰 교회가 신축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상 10층 가까이 되는데 커다란 지하주차장도 있다. 마치 대형마트를 보는 것 같다. 철거되기 전에 중형급 교회였는데 이제 매머드급 대형교회로 재탄생 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서 불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대체 불교는 그동안 무엇을 했단 말인가?

 




한국불교를 생각하면 안타까움이 앞선다. 불교계에서는 한국국불교가 1700년 역사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현실에서는 소수종교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불교신자가 개신교 보다 적지만 그래도 비등하다. 문제는 사회적 영향력이다. 개신교와 비교했을 때 체감하는 것은 십분의 일도 안된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사회 전분야에서 그렇다. 대체 뭐가 잘 못된 것일까? 어디서부터 꼬인 것일까?

 

한국불교가 살아남으려면 개혁해야 한다. 어떻게 개혁해야 하는가? 제도개혁과 의식개혁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환골탈태해야 한다. 바꿀 수 있는 것은 다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불가능하다. 지난 몇년간의 종단적폐청산운동이 성과없이 끝난 것으로 알 수 있다.

 

종단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권승들의 강고한 기득권을 깰 수 없다. 시주거부운동 등을 해 보았지만 그들은 이미 안정적인 수입원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깨기 힘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신도가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수단을 다 마련해 놓았다. 그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그들끼리 밀어주고 끌어 주면서 종단권력을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3년동안 재가불교운동을 하면서 절망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한국불교는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촛불법회, 삼보일배, 피켓팅, 기자회견 등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보았다. 이런 활동에 대하여 모두 블로그에 기록을 남겨 놓았다.

 

더이상 한국불교에 더 이상 희망을 가지지 않는다. 한국불교를 장악하고 있는 권승들은 스스로 개혁할 의지도 없고 할 필요도 못 느끼는 것 같다. 그냥 이대로가 좋은 것 같다. 신도수가 줄어들건 말건, 불교의 대사회적 영향력이 줄어들건 말건 그들의 관심사는 아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이익에 대한 것이다. 화폐야말로 그들의 최대 관심사처럼 보인다.

 

교회첨탑은 자꾸만 높아져 간다. 그러나 삶의 현장에서 불교는 보이지 않는다. 지난 2015년 종교인구 총조사에 따르면, 불교는 이미 데드크로스가 난 상태이다. 신도수에 있어서 개신교에 밀린 것이다. 현재 개신교와 천주교 신자를 합하면 불교에 거의 두 배에 달한다. 그러나 문제는 대사회적 영향력이다. 체감하는 영향력은 십분의 일 이하이다. 이런 상황임에도 종단과 스님들은 손 놓고 있는 것 같다.

 

불교가 위기에 처해 있으면 나서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기대난망이다. 어느 산중승은 이렇게 말했다. 2010년대 초반 블로그 댓글에 남긴 글이다.

 

 

중들이 왜 산에만 있느냐구요? 본래 세속이 싫어서 머리깎고 산으로 들어온 것이니까 / 그리고 산속이 편하니까.(산중승)

 

 

산중승은 자신을 백발의 노승으로서 우리나라 3대 종찰중의 하나인 문중의 사문이라고 했다. 그때당시 백두대간 깊은 숲속 토막집에서 나무 가꾸고 산야초 캐며 淸貧樂道(청빈락도)생활로 한가한 수행하는 이라고 했다.

 

스님이 산으로 들어간 것은 간단하다. 단지 세속이 싫어서 들어간 것이다. 생사윤회문제를 해결한다든지, 중생구제를 위해서 입산했다는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산중승은 포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산중 중들이 도시 교화를? 왜요? 무엇때문에 우리가 죽고 살기로 세속중생들을 교화 해야 합니까? 그럴일 없습니다. 그런건 도시땡중들에게나 시키십시요.(산중승)

 

 

포교는 땡중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했다. 중생들이 묻기 전에 먼저 설교 따위나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는 물을 찾지 않는 소에게 강제로 물을 먹일 수 없고, 길을 묻지 않는 자에게 길을 말해 줄 수 없는 이치와 같다는 것이다. 그것이 스님들의 ‘계율’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산중승이 중생교화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길잃은 중생들이 길을 물어면, 그때서야 길을 가르쳐 주려고' 서있는 겁니다.길을 묻는 답답한 입장이니까. ‘답답한 물어라. , 공손하게 예의를 차리고... . 그러면 답을 가르쳐 주리다’하는 것입니다.(산중승)

 

 

산중승은 도()에 대해 말했다. 산중승에 따르면 도는 그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나이롱 뽕’으로 얻은 도가 아니고, 산중에서 수십년간 ‘처절한’ 수행으로 어렵게 깨우친 도이기 때문에 싸구려 물건 팔듯이 아무에게나 대고 외칠 만한 성질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아쉬운 자가 삼배등을 하면서 공손하게 예의를 갖추고 물어보았을 때 길을 가르쳐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런 도는 장광설일 필요는 없고, 단지 손가락으로 가리키거나 머리를 끄덕여 주는 것, 방긋이 미소지어 주는 것으로 족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산중승은 현재 한국불교가 처한 현실을 어떻게 보고 있는 것일까?

 

 

만약 불교가 그 인연을 다하여 '말살'을 맞이해야 할 운명이라면 그냥 말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연없는 중생[우빠까]도 붓다를 떠났듯이... 인연없는 세속중생들이 불교를 떠나서 [야훼]한테 가려면 그렇게 하랄수 밖에...(산중승)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불교도 제행무상의 법칙을 거스를 수 없기 때문에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신도가 줄든 말든, 불교가 사라지든 말든 오로지 이익만 챙기려는 권승들의 행태와 다를 바 없다. 산중승은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출가승려'들이야 모두들 세속인연을 다끊고 산중으로 들어와버린 몸인데 세속인연에 연연할 일 없쟎습니까?(산중승)

 

 

출가자가 심산유곡에서 숨어서 살다시피 하는 모습에서 불교의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종단개혁운동을 하면서 종단권력을 장악한 권승들에게서 절망을 맛보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출가스님들의 무력함이다. 차라리 무능력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고 하여 나몰라라하는 것 같다. 한국불교가 망하든 흥하든 관심 밖인 것 같다. 비구니스님이 말한 말종론은 맞는 것일까?

 

불교가 이렇게 찌그러진데는 이유가 있다. 한국불교의 구조적인 모순이 가장 크다. 다음으로 부처님 정법과 거리가 먼 것이다. 출가자들이 지금 당장 빠알리 삼장을 읽어 보면 변하지 말라고 해도 변할 것이다. 현재 한국불교에는 부처님(Buddha)도 없고, 가르침(Dhamma)도 없고, 승가(Sangha)도 없다. 그러니 폭망한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다. 권승들이나 수행승들은 불교가 망하든 흥하든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개인적인 것에만 관심 갖는 것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도 쓸 뿐이다. 경전을 근거로 쓰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것이다.

 

 

2020-04-2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