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백년대계

한국불교는 퇴보의 역사

담마다사 이병욱 2020. 4. 28. 09:20

 

한국불교는 퇴보의 역사

 

 

불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초기경전에 따르면 붓다와 담마와 상가에 귀의함으로써 불자가 된다고 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재가신자 마하나마가 “세존이시여, 재가신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물어 보았다. 이에 부처님은 “마하나마여, 부처님에게 귀의 하고 가르침에 귀의 하고 참모임에 귀의합니다. 마하나마여, 이렇게 재가신자가 됩니다.(S55.37)라고 말했다. 출가자도 예외가 아니다. 계를 지키는 것 좋지만 먼저 삼보에 귀의해야 불교인인된다. 계는 필요조건일 수 있지만 삼보를 피난처로 삼는 것은 충분조건이 된다.

 

불교인이 되면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한다. 현실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실려 있는 경전이 의지처가 될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 법사의 말도 의지처가 된다. 그런데 삼보는 모두 부처님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붓다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고따마 부처님을 말하고, 담마는 부처님 가르침이 설한 것이고, 상가는 부처님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는 승가공동체를 말한다. 그래서 불교인들은 삼보를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 삼는다.

 




한국블교에는 승가가 없다. 한글삼귀의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승보에 대하여 스님들이라고 해 놓았기 때문이다. 설령 거룩한 스님들이라고 표현해도 마찬가지이다. 스님들이 어떻게 승가가 될 수 있을까? 승가는 공동체를 말한다. 스님들과 공동체는 다른 것이다. 스님들은 스님들의 모임일 수도 있고 스님들의 무리일수도 있다. 그러나 공동체에는 계율이 있다. 그것도 자자와 포살이 있는 공동체를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는 승가공동체인 것이다. 이런 승가공동체가 승보이다. 스님들에게 귀의하는 것이 아니라 승가공동체에 귀의하는 것이다.

 

사람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 출가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출가자에게 의지했는데 어느 날 환속했다면 누구에게 의지해야 할까? 더구나 계행에 실망했을 때 그 허전함은 무엇으로 달랠 수 있을까? 모든 것은 변한다. 어느 것 하나 제행무상의 법칙에 벗어나는 것은 없다. 한번 스님이라고 해서 영원한 스님이 아니다. 조건이 맞지 않으면 환속할 수 있는 것이다. 환속했다가 다시 출가할 수 있다. 출가자가 재가자가 되고, 재가자가 출가자가 되는 것이다. 이러니 누구에게 의지할 수 있을까? 출가자에게 의지하면 실망하기 쉽다. 그리고 교세약화의 요인이 될 수 있다. 출가자의 계행에 실망했을 때 불교를 떠날 수 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의지해야 할까? 당연히 승가에 의지해야 한다. 자자와 포살이 있는 승가공동체에 의지해야 한다. 그래야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전승된다.

 

사람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출가자에게 의지하면 실망하기 쉽다고 했다. 불완전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설령 아라한이라도 의지해서는 안된다. 성자에게 공양은 할 수 있어도 의지처로 삼아서는 안된다. 스님에게 의지하기 보다는 승가공동체에 의지해야 한다. 자자와 포살이 있는 승가공동체에 의지하면 실망할 염려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재가불자는 물론 스님들도 승가공동체를 승보로 삼아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 해야 한다. 그래야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전승된다.

 




정법은 오래 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질되어서 사라질 것이다. 과거칠불 등 수없이 부처가 출현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가 출현했다는 것은 정법이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과거에 부처가 출현하여 정법을 펼쳤으나 도중에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아득한 세월 암흑과 같은 세월동안 정법이 없는 상태가 계속되다가 어느 때 부처가 출현하면 다시 정법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법이 머무는 시기는 매우 짧다. 후대로 내려갈수록 변질되어서 전혀 다른 것이 되었을 때 정법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인도대륙에서 정법이 사라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정법시대일까?

 

지금은 정법시대이다. 부처님 가르침이 온전히 전승되어 오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는 승가공동체도 전승되어 오고 있다. 자자와 포살이 있는 승가공동체에서 성자가 출현하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이 살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빠알리삼장과 같은 가르침이 전승되어 오고 있고, 팔정도와 같은 가르침의 실천되고 있고, 자자와 포살이 있는 승가공동체가 있어서 아홉가지 출세간 법, 즉 사향사과와 열반이 있다면 정법시대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 정법시대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부처님에 대해 석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동네에서 김가, 이가 등 동네 아저씨를 부르는 것 같다.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에 대하여 고따마여라며 부처님의 성씨를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바라문이나 육사외도들이 그렇게 불렀다. 불자들은 세존이라고 불렀다. 또는 부처님의 열 가지 별칭 중의 하나를 불렀다. 그래서일까 초기경전을 보면 세존, 정등각자, 일체지자, 승리자 등으로 불렀다. 빠알리예경문에서는 나모땃싸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싸라 하여, 부처님에 대하여 세존, 아라한, 정등각자로 부르고 있다. 존귀하신 부처님에 대하여 고따마와 같은 성씨로 부른 것은 외도들 밖에 없다. 그런데 한국불교에서는 동네 아저씨 부르듯이 석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대체 이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불교에 입문한지 오래 되지 않았다. 2004년에 도심포교당의 불교교양대학에 들어간 것이 시초이다. 처음에는 대승불교를 접했다. 반야심경, 천수경, 금강경을 모두 다 외웠다. 그러나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그러다가 초기불교가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2008년도의 일이다. 이후 초기불교를 스스로 공부했다. 니까야와 함께 청정도론, 아비담마와 같은 논서를 접하게 되었다. 궁금했던 모든 것이 초기불교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매일 경전을 근거로 글쓰기 하면서 공부했다. 그러나 알아도 알아도 끝이 없다. 빠알리삼장은 평생 보아도 다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경전이나 논서를 접하면 행복하다. 가르침의 바다에 퐁당 빠져 있는 것 같다. 거기에는 놀라운 것들로 가득하다. 이제까지 모르고 있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알게 되었을 때 충만했다. 이런 세월을 10년 이상 살고 있다. 그런 어느 날 블로그에서 댓글을 받았다. 산중승이라는 필명을 가진 분의 글은 다음과 같다.

 

 

자꾸만 [초기불교]를 들먹이시는데, 과연 [초기불교]라는게 있었습니까? 혹시 [원시불교]를 말씀하는 것입니까?

 

그것이라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지요. 그냥, 샤카무니'의 설법시대'였을 뿐이죠. 샤카모니 열반하신 후에 10대불제자를 중심으로, [불교적 교리]가 체계화되고, [불경]이 집대성 된후에 비로소 컬리큘럼이 만들어지면서 [佛敎]라는 宗敎 성립되어진 것이지요. 그때로 부터 수천년을 지나오면서 [불교]는 진화되어온 것입니다. , 사카무니'께서 확연하게 다 말씀 못하고 가신, 우주의 진리 아눝따라 삼먁삼보리'에 대한 이해 체계가, 그 수많은 히말라야 수행승들과 [대승불교의 중국 불교계]에서 수많은 고승들이 '깨달아 얻은 진리들로서, 불교교리는 엄청나게 진화되어온 것입니다. 감히 초기(원시)불교'와는 비교도 할수 없을 만큼...

 

불교는 믿음'이 아닙니다. 본래부터 [여여하게 있는 우주의 진리]를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는 진화를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은 無常 것이고 一體唯心造'인 것입니다.

 

끝없이 진화하는 교리체계'가 대승적인 현대불교입니다. 아무런 교리체계도 없던 시절의 초기불교'는 종교적인 수준이 아닌, 샤카무니의 개인적인 '깨달음'에 대한 견해 일뿐입니다.”

(산중승)

 

 

이 글은 2010년대 초반에 받은 것 같다. 필명 산중승은 출가자이다. 삼보사찰중의 한곳으로 출가했고 히말라야에서도 수행했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부처님을 부처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동네 아저씨 부르듯이 샤카무니라고 한 것이다. 석가라고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외도들이나 부처님을 성씨로 부른다. 그래서일까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부처님에 대해 비판적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해 불완전한 것, 미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진화해 왔다고 말한다. 후대에 부처님보다 더 뛰어난 자들이 출현하여 불교를 완성했다는 것이다.

 

동아시아불교에서는 부처님 가르침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소승불교라고 칭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또 불교는 계속 진화해 왔다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부처님을 폄하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불완전한 것, 미완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에 버금가거나 심지어 더 뛰어난 자들이 나타나서 보완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과연 그들의 말 대로 부처님의 깨달은 불완전하고 미완성된 것일까?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부처님 가르침에 크게 의존한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을 완성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만일 부처님의 깨달음이 불완전한 것이라면 부처님은 깨달았다고 선언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부처님의 깨달음이 미완성된 것이라면 나이가 들어 완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깨달음은 처음이나 마지막이나 변함이 없다. 젊었을 때 깨달음이 다르고 나이 들었을 때 깨달음이 다른 것이 아니다. 이는 초전법륜경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초전법륜경에 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성제가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깨닫고 나서 최초로 설법한 경이다. 참고로 2013년에 초전법륜경을 다 외웠다. 그것도 빠알리원문으로 외웠다. 한달 보름가량 걸렸다.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사성제를 세 번 굴렸다고 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철저하게 검증했음을 말한다. 그래서 더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위없는 깨달음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가장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임을 선언했다. 이런 깨달음을 아눗따라삼마삼보디라고 한다. 금강경에서도 나오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같은 말이다. 한자어로는 무상정등각이다. 우리말로는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가장 바르고 가장 원만한 깨달음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부처님의 깨달음은 완전한 것이고 완성된 것이다. 그럼에도 후대사람들은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해 불완전한 것, 미완성된 것이라 하여 불교는 계속 진화해 왔다고 말한다. 과연 그들의 말 대로 불교는 진화해 온 것일까?

 

불교는 퇴보해 왔다. 부처님이 열반에 든 이후 불교는 계속 퇴보의 길을 걸어왔다고 말할 수 있다. 후대로 갈수록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는 부처님 재세시가 가장 완전한 것이다. 이후 불교는 진화해 온 것이 아니라 계속 퇴보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 마침내 정법은 변질되어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다음 부처가 출현할 때까지 한량없는 세월동안 암흑의 시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 희망이 있다. 현겁에 멧떼이야붓다(彌勒佛)의 출현이 예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법이 오래 가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 같다. 현재 동아시아불교는 부처님 당시의 불교와는 전혀 다르다. 그래서일까 러시아의 불교학자 체르바스키는 마하야나주의자들은 전혀 다른 종교를 만들었다.”라고 주장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자체로 완성된 것이다. 여기에다 더하고 뺄 것도 없다. 회의론자들은 후대 삽입되거나 편집되었다고 주장하지만 근거가 희박하다. 가르침을 의심하면 더 이상 불교인이라고 볼 수 없다. 불교인이 된다는 것은 삼보에 귀의함으로써 완성된다. 그럼에도 가르침을 의심하거나 회의하여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는 법보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더구나 부처님을 석가샤카무니와 같이 동네 아저씨 부르듯 한다면 불보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자자의 포살이 있는 승가공동체가 없다면 승보가 없는 것이 된다. 한국불교에는 삼보가 없다고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 한국불교는 퇴보의 역사라고 말하면 역시 지나친 것일까?

 

 

2020-04-2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