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가 중흥하려면
글을 쓰다 보면 난감할 때가 있다. “모두 다 그렇지 않다,”는 말을 들었을 때이다. 이번에도 그랬다. 일부 못된 승려들의 행태를 염두에 두고서 쓴 글이 대다수 스님들에게 마음에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다.
존경하는 스님으로부터 댓글을 받았다. 스님은 페이스북에서 폭탄을 맞은 것 같다며 실망감을 표현했다. 이는 권승을 염두에 두고 불전함에 돈을 넣지 말자는 식으로 쓴 글이 영향을 준 것이다.
적폐청산운동을 하면서 권승들의 행태에 대하여 못볼꼴을 보았다. 대다수 스님들이 여법하게 살아 가고 있음에도 일부 몰지각한 스님들을 비난한다는 것이 전체 스님들을 욕보인 글이 되고 만 것이다.
출가의 인연은 매우 크다고 말한다. 전생에서 큰 공덕을 지어야 출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출가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출가는 이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살아 있는 내가 죽는 것을 출가라고 말한다. 거듭 태어나는 것이다. 육체는 같아도 정신적으로는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형제와도 인연을 끊는 것이고, 세상과도 인연을 끊는 것이 된다. 그는 더이상 옛날의 그가 아닌 것이다.
연쇄살인자 앙굴리말라도 부처님의 교단에 출발하여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출가 하기 전에는 살인마이었지만 출가하고 난 다음에는 성자가 된 것이다. 그것도 아라한이 되었다. 맛지마니까야 ‘앙굴리말라의 경’을 보면 “내가 고귀한 태어남으로 거듭난 이래”(M86.24)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현재의 나는 죽고 새로운 나로 태어 났음을 뜻한다. 그렇다고 하여 전생에 지은 악업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라한이 되면 새로운 태어남은 없다. 그러나 과보는 여전히 남아 있다. 조건이 형성되면 과보를 받게 되어 있다. 앙굴리말라는 아라한이었음에도 전생의 과보로 인하여 돌덩이에 맞아 죽었다. 신통제일이라는 목갈라나 존자의 최후도 비참하다. 전생에 부모를 죽인 과보로 인하여 도적들에게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죽임을 당했다.
부처님은 전생에 여섯 번 비구로 살았다고 한다. 전생에 사아승지 십만겁동안 십바라밀을 닦았지만 출가승으로 산 것은 고작 아홉 번에 지나지 않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만큼 출가승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말해 주는 것 같다.
츌가승은 존중되어야 한다. 설령 계행이 엉망이더라도 출가했다는 그 사실 자체는 존중되어야 한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형제와 인연끊고 세상과 단절하는 것은 현재의 내가 죽는 것과 같다. 머리를 깍는다는 것은 현재의 내가 죽고 또 다른 존재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부모형제 보기를 전생의 인연쯤으로 보는 것 같다. 출가는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다.
설령 스님이 계를 어겼어도 비난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대승보살계에 나오는 말이다. 재가불자는 스님의 허물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스님의 잘못을 이야기하면 삼보를 비방하는 중죄를 짓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승가의 자정능력이 있기 때문에 한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스님이 계를 어겨도 잘못을 알아차려 참회하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숭가의 문제는 승가에서 풀기 때문에 재가불자들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 3년 동안 치열하게 종단 적폐청산운동에 참여했다. 오늘날 불교가 망가진 원인에 대하여 권력승들의 행태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가르침대로 살지도 않고 계율대로 살지 않는 일부 승려들이 총무원과 종회를 장악하고 소위 돈이 되는 사찰을 접수했을 때 한국불교는 희망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 이에 뜻 있는 스님들과 재가의 활동가들은 가열차게 투쟁했다.
재가불교 단체에서는 권승들을 몰아 내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했다. 기자회견, 일인시위, 피켓팅, 삼보일배, 촛불법회 등 갖가지 방법으로 압박 했지만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는 권승들은 요지부동이었다.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철의 조직도 틈은 있는 것이다. 커다란 바위를 가를 때 홈을 파고 나무못을 박아 물을 부으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균열이 생겨서 쪼개진다.
권승들은 한번 잡은 기득권을 내놓지 않고 있다. 접수한 사찰을 사유재산처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권승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만의 리그에 균열을 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권승들의 돈줄을 끊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시주거부운동을 했다. 또 권승들이 차지하고 있는 사찰의 불전함에 돈을 넣지 말자는 캠페인도 했다. 권승들의 행태를 인터넷과 언론에 알려서 압박을 하고 적극적으로 비난하는 것이 한국불교를 살리는 길이라고 본 것이다.
부작용도 생겼다. 대다수 여법하게 사는 스님들이 피해를 본 것이다. 일부 못된 승려들을 잡기 위해 적극적 비난을 했는데 다수 스님들에게도 영향을 준 것이다. 이를 일반화의 오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수의 스님들은 여법하게 살고 있다. 권승들과 달리 신도들에게 크게 의지하고 있다. 존경하는 스님은 이런 점을 지적했다. 권승들이 미워서 시주거부 운동을 하고 불전함에 돈을 넣지 않기 운동을 하지만 여법하게 잘 살고 있는 스님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음을 말한다. 이에 스님에게 “오늘 글로 인해 불편하게 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모두 삭제했습니다. 아직도 한국에는 여법하게 사시는 스님들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일부 이익과 명예를 탐하는 권력승들로 인하여 혼탁해졌습니다. 적폐청산에 포커스를 맞추고 쓰다 보니 일반화의 오류를 범했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좀 더 살펴 쓰겠습니다.”라고 메세지를 남겼다.
누구나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한사람의 잘못된 행동을 보고서 해당 집단이 모두 잘못된 것으로 보이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사람의 사기꾼의 출현으로 인하여 해당지역 사람들이 모두 사기꾼으로 매도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한사람의 스님으로 인하여 승가 전체가 욕먹어서는 안될 것이다.
한사람의 행위에 따라 해당 단체가 욕먹을 수 있다. 특히 승가가 그렇다. 계행이 엉망인 스님이 출현했을 때 사람들은 “스님들은 다 그래”라고 오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초기경전을 보면 “사소한 행위에서도 두려움을 보고”라는 구절을 종종 볼 수 있다.
스님의 계행에 따라 승가의 이미지가 달라진다. 깡패 같은 스님이 출현하면 승가는 깡패집단처럼 보인다. 일베스님이 출현하면 일베집단처럼 보인다. 한사람의 스님은 그 집단을 대표한다. 특히 스님은 머리를 깍고 승복을 입었기 때문에 일반사람들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사소한 잘못도 구름처럼 크게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승가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청정한 집단이다. 자자와 포살이 있는 승가는 귀의의 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피난처가 된다.
한사람의 스님의 행위가 한국불교 미래를 결정한다. 여기 청정한 삶을 살기로 한 스님이 있다. 사소한 잘못을 저질렀을 때 세상사람들은 비난한다. 술 마시는 것이 세속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스님이 마시면 있을 수 없는 일이 된다. 스님이 재산을 모으고 처자식을 가지면 비난받는다. 청정한 삶을 약속한 스님이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세상사람들은 비난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계행이 청정한 스님이 출현하면 존중받는다. 승가도 존중받고 불교도 존중받는다.
한사람의 사기꾼이 출현하면 세상이 혼탁해진다. 반면에 한사람의 도인이 출현하면 세상은 향내가 난다. 설령 깊은 산중에 있더라도 계의 향기는 천리 만리를 간다. 꽃의 향기는 바람을 거스를 수 없지만 계의 향기는 사방팔방 십방으로 퍼져 나간다. 덩달아 승가도 살고 불교도 살고 재가불자의 지위도 올라간다.
한사람의 도인이 출현하면 도인을 닮고자 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여법하게 잘 사는 스님들이 많을수록 승가의 일원이 되고자 할 것이다. 한사람의 재가불자가 행복한 삶을 살면 다른 사람들도 함께 하고자 할 것이다. 가르침대로 계율대로 살면 한국불교는 중흥할 수밖에 없다.
2020-07-0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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