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개혁이 곧 불교개혁
“이 방에서는 정치얘기 안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글을 종종 단체카톡방에서 볼 수 있다. 그것도 불교개혁을 표방하는 카톡방에서 본 것이다. 물론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나서기 좋아하고 수다를 즐겨하는 소위 빅마우스(Big Mouth)가 한 말이다.
카톡방에서는 가급적 정치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보수적 성향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처럼 조국문제로 첨예하게 대립 되어 있을 때가 그렇다. 그럼에도 종종 정치이야기로 오해 받는 경우도 있다.
황교안대표의 무례함에 대하여
올해 부처님오신날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불교교양대학 단체카톡방에다 황교안대표의 무례함에 대하여 글을 올렸다. 부처님오신날 당일 은해사에 가서 합장하지 않은 것에 대한 비판글이었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이자 전도사이기도 한 황교안 총리가 스스로 찾아간 법요식에서 합장하지도 않고 마치 차려 자세로 서 있는 것에 대하여 불자의 한사람으로 지적한 것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에 따르라는 말이 있듯이, 타종교 행사에 가면 그 의식절차에 따르는 것은 기본 예의에 속한다. 마치 불교인이 교회나 성당에서 열리는 결혼식에 참석하면 그쪽 예법에 따르는 것과 같다. 이런 취지로 지적했다. 그랬더니 어느 법우님이 “이 방에서 정치이야기 하지 마십시오. 당장 지우십시오.”라고 말했다. 황교안대표의 불교에 대한 무례를 지적한 것이 정치이야기라는 것이다. 같은 불교인으로서 당연히 지지 받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있는 사람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올린 글은 삭제했다. 요즘에는 카톡방에서도 올린 글은 삭제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왜 그렇게 흥분했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같은 황씨여서 그랬을까? 혹시 친척되는 사람은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혹시 강남에 살고 있어서 그런 것 아닐까? 출신지역과 현재살고 있는 곳, 그리고 사회적 지위가 작용한 것은 아닐까? 아마도 보수쪽과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그 카톡방에는 일체 정치적 이야기를 올리지 않는다.
“거기에 안나간 사람들이 훨씬 더 많거든?”
학교동기동창 카톡방에도 정치와 관련된 이야기는 일체 올리지 않는다. 보수적 성향의 친구들이 꽤 있기 때문이다. 3년전 광화문촛불이 절정을 이루었을 때 글을 올렸다. 그랬더니 어느 친구가 “거기에 안나간 사람들이 훨씬 더 많거든?”이라고 했다. 이런 식의 말은 보수성향을 가진 사람들에서 종종본다. 3일전에 있었던 서초동 백만명 이상 모인 것에 대하여 거기에 안나간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는 식이다.
나이가 들면 보수화 하는 모양이다. 그것은 아마도 현재의 위치와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많이 가진자일수록, 많이 배운자일수록, 지위가 높은자일수록 보수적이다. 현재 이대로 계속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화하는 것에 대하여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변화를 두려워하기 까지 한다. 그것은 자신들의 이익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개혁이라는 말도 좋아하지 않는다. 이제까지 보수기득권층에서 스스로 개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검찰은 왜 괴물이 되어 버렸을까?
고이면 썩는다고 했다. 끊임없이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세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하지 않고 정체 되어 있다면 썩게 되어 있다. 불교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승총무원장 체제 8년동안 한국불교는 크게 퇴보했다. 신도수 감소뿐만 불교의 사회적 이미지도 추락했다. 그것은 소위 권승들이 종단을 장악하여 사유화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요직을 독차지하고 사적인 이익을 취했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뜻 있는 불교인들은 지적하고 비판했다. 자승종권 8년동안 불교인들은 피켓팅, 삼보일배, 촛불법회, 기자회견 등으로 맞섰다. 최종적으로 검찰에 고발했다.
오늘날 검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고 있다. 왜 이렇게 괴물이 되어 버렸을까? 그것은 검찰에 너무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정치권에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툭하면 검찰에 고발한다. 수사권과 기소권이 있는 검찰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권의 이런 행위는 스스로 검찰권력에 종속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대화와 타협에 따른 차선을 추구하는 정치행위가 실종된 것이다.
정치에서는 최선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종교에서나 최선을 추구할 수 있다. 종교에서는 진리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정치를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다름아닌 파트너가 있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여가 있으면 야가 있는 것이다. 여와 야는 근본적으로 한목소리를 낼 수 없다. 상대방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합의점을 찾아 내야 하는데 그것은 차선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최선만을 바란다면 검찰에 고발하게 될 것이다.
고발해도 처벌받지 않는 권승들
정치에서는 차선을 추구하지만 종교에서는 최선을 추구해야 한다. 불교계에서 자승원장체제 8년동안 끊임없이 변화를 요구한 것은 부처님법대로 살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삼보일배, 촛불법회, 기자회견 등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동원해보았지만 쇠귀에 경읽기에 그쳤다면 그 다음 단계는 어떤 것일까? 검찰에 고발하는 것 밖에 달리 대안이 없다. 그것도 명백한 증거를 가지고 고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된일인지 명백한 물증을 가지고 고발했어도 이제까지 자승원장을 포함한 권승들이 처벌받은 적이 없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하여 어느 카톡방에 올려진 글을 공유하면 다음과 같다.
“검찰이 정의로운 검사들로 구성되어야 자승세력들의 적폐가 처벌 될 수 있는 것임을 명심해야 됩니다. 검사들이 경찰수사지휘권 직접수사권 그리고 재판에 회부 하는 기소독점과 기소편의주의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검찰이 봐주는 방법은 “증거충불분으로 혐의 없음”또는 범죄가 성립되어도 “기소유예”로 재판에 회부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승의 상습도박 이나 조계종 감로수 배임, 횡령사건 등은 모두 이 문턱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정치승려 자승과 정치검사들이 유착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피의자를 위해 탄원서를 검찰에 제출하는 것은 범죄가 아닙니다.”(M법우님)
검찰에도 정의로운 검사들이 있다고 했다. 이들이 일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검찰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공수처를 설립하여 검찰을 견재해야 한다. 현재와 같이 견재장치가 없다보니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지고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 되었다. 더구나 기소권은 검사의 마음에 달려있다. 검사가 마음 먹은대로 기소를 할 수도 있고 안할수도 있다는 것이다. 고발해도 증거불충분이나 기소유예로 기소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로비가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검찰개혁하지 않으면 불교개혁도 없다는 것이다.
전자승원장을 횡령혐의로 고발했는데
최근 정평불에서는 참여불교재가연대와 한국불자언론인협회와 함께 전자승원장을 검찰에 고발했다. 국가보조금을 횡령한 혐의이다. 한국불교문화사업단에서 국고를 지원받아 제작한 달력을 제작했는데 유통과정에서 횡령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와 같은 고발에 대하여 법보신문에서 크게 보도했다. 당연히 종단측을 옹호한 기사이다. 법보신문은 종단과 유착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최근 법보신문에서는 “정평불이 등이 종단 음해하려 날조”라고 하여 크게 타이틀을 달았다. 그리고 “고발 행위를 한 불교계 일부 단체들이 그동안 지속적으로 종단을 음해했던 전례로 볼 때 종단 비방과 음해의 목적이 아니고는 설명되지 않는다” (2019년 9월 24일자)고 비판했다. 정평불이 이렇게 친종단매체로부터 기사 타이틀로 나올정도가 된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다. 과연 자승전원장은 이번에도 빠져 나갈 수 있을까?
검찰개혁이 곧 불교개혁
요즘은 에스엔에스시대이다. 카톡방에는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이 있다. 당연히 이념도 다르다. 그러다보니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과 보수적 성향의 사람들이 섞여 있다. 이런 곳에서는 정치적 견해를 표출해서는 안된다. 특히 최근 조국사태에 대한 것이 그렇다. 그러나 진보와 보수 공통적으로 견해가 일치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검찰개혁이다.
검찰은 개혁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스스로 개혁하지는 못할 것이다. 외부에서 강력하게 압박을 가해야 한다. 그것이 이번 9.28 서초동 백만촛불로 표출된 것이다. 현장에서는 “조국수호” 와 “검찰개혁” 두 가지 구호가 있었지만 최종적으로는 검찰개혁이 되어야 한다.
검찰을 이대로 놓아 두면 돈 있고 백 있는 사람들은 모조리 빠져 나갈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수사권과 기소권을 제한해야 한다. 그리고 검찰을 견재할 수 있는 공수처가 설치 되어야 한다.
검찰개혁은 불교계에서도 바라는 것이다. 불교계에 쌓이고 쌓인 적페에 대하여 최종적으로 검찰에 고발해 보지만 모두 빠져 나가고 말았다. 이렇게 본다면 검찰개혁이 곧 불교개혁인 것이다. 블로그나 카페, 그리고 카톡방이나 페이스북 등 에스엔에스에 서초동촛불에 대하여 알리는 것은 검찰개혁에 관한 것이다. 검찰개혁이 곧 불교개혁인 것이다.
2019-09-3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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