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와나선원

진리를 설하는 자의 목소리는

담마다사 이병욱 2020. 6. 24. 12:29

진리를 설하는 자의 목소리는

 

 

책을 읽었으면 써야 한다. 유튜브에서 고미숙 선생이 한 말이다. 단지 읽는 것으로 그치면 90프로는 잊어버린다고 했다. 새기려면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읽으면 써야 하고, 들었으면 말해야 한다. 최진석 선생이 한 말이다. 역시 유튜브에서 들었다.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야 함을 말한다. 쓰는 것은 일상이 되었지만 말하는 것은 일상이 아니다.

 

말할 기회가 별로 없다. 말을 할 줄 모른다. 대중 앞에 서 본적이 없다. 토론할 줄도 모른다. 토론을 해 본 적이 없다. 말을 잘 하는 사람이 부럽다. 대중연설이든 토론이든 조리 있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사람이 부럽다.

 

강단에서 선 사람들은 청중에 대한 두려움이 없을 것이다. 학생들 앞에 서는 것이 일인 사람들이 있다. 강의하는 것은 밥 먹는 것처럼 일상이고 지극히 자연스러울 것이다.

 

비주얼보다 오디오

 

강의나 강연, 법문을 잘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끊임없이 갈고 닦았을 것이다. 공부도 많이 하고 사유도 많이 했을 것이다. 원고를 보지 않고 말할 정도면 외웠다고 본다. 하나의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한 것이다. 그런 콘텐츠를 유튜브에서 보고 있다.

 

대중 앞에 서려면 어느 정도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비주얼이 어느 정도 되어야한다. 이왕이면 준수한 용모가 주목받는다. 호감형이면 무난할 것이다. 이왕이면 준수한 용모가 주목받는다. 그러나 무엇보다 목소리이다.

 

목소리가 좋아야 한다. 비주얼은 좋은데 목소리가 좋지 않으면 반감된다. 반면 비주얼은 별로이지만 목소리가 좋으면 크게 커버 된다. 비주얼과 오디오가 모두 좋으면 금상첨화이다. 비주얼과 오디오, 이 두 가지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 오디오이다.

 

목소리가 좋지 않으면 듣기가 괴롭다. 유튜브에서 본 어느 스님의 강의가 그렇다. 주로 칠판을 이용하여 강의한다. 법문도 아니고 강연도 아닌 강의인 것이다.

 

스님의 목소리는 독특하다. 사투리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음절에서 두 번째 음을 올린다. 예를 들어서 “불교가”라고 했을 때, 교자를 크게 올리는 식이다. 모든 음절에서 이렇게 두 번째 음을 올린다. 그러다 보니 울퉁불퉁 자갈길을 차가 달리는 것 같다. 강의 내용에 집중해야 하나 독특한 스님의 억양 때문에 집중이 되지 않는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비주얼보다 오디오이다.

 

구관조와 같은 사리뿟따 존자의 목소리

 

법사의 조건은 어떤 것일까? 초기경전을 보면 방기사 존자가 사리뿟따 존자를 찬탄하는 게송이 있다.

 

 

“간략하게 가르치기도 하고

상세하게 가르치기도 하네.

구관조의 목소리처럼

자유자재한 말솜씨를 발휘하네.

 

매혹적이고 듣기에

즐거운 미묘한 목소리로

가르침을 설할 때

그 감미로운 소리를 듣고

수행승들은 한껏 고무되어

기뻐하며 귀를 기울이네.”(S8.6)

 

 

방기사 존자는 시인수행승으로 잘 알려져 있다. 테라가타에서 대미를 장식하는 대련시집은 방기사 존자가 읊은 것이다. 모두 80연 시로 되어 있다.

 

방기사 존자는 새내기 수행승일 때 사리뿟따 존자의 법문을 듣고 감화받아서 시를 썼다. 그런 사리뿟따 존자는 ‘법의 장군’으로 알려져 있다. 대승에서는 십대제자 중의 하나라서 지혜제일로 알려져 있다.

 

법의 장군으로서 사리뿟따 존자는 법문을 종종했다. 부처님이 부재 중에 부처님을 대신해서 법문 한 것이다. 그래서 니까야를 보면 사리뿟따 존자가 법문한 것이 종종 있다.

 

시인 수행승 방기사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의 목소리를 찬탄했다. 구관조와 같다고 했다. 말도 자유자재로 달변이지만 목소리 또한 탁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듣기에 즐겁다고 했다. 듣기에 즐거우면 법문도 쏙쏙 귀에 들어 놀 것이다. 구관조는 어떤 새일까?

 

살리까(Sāḷikā)라 불리우는 구관조는 일종의 앵무새이다. 인간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데 있어서 탁월함이 있다고 한다. 주석에 따르면 “법을 설할 때에 장로의 감미로운 목소리는 달콤한 잘 익은 망고를 맛보고 날개로 미풍을 일으키며 감미로운 목소리를 내는 구관조를 닮았다.”(Srp.I.276) 라고 했다. 사리뿟따존자의 목소리가 구관조처럼 매우 매혹적이었음을 말한다.

 

천상의 목소리

 

목소리가 좋으면 전달력도 좋을 것이다. 청중들이 집중하기 때문이다. 집중을 넘어 몰입했을 때 강연이나 법문의 목적은 달성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음성은 부처님의 32상에도 들어간다.

 

위대한 사람은 32가지 신체적 특징이 있다. 그 중에서 28번째를 보면 “수행승들이여, 위대한 사람은 까라비까 새의 소리처럼 청정한 음성을 갖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위대한 사람이 까라비까 새의 소리처럼 청정한 음성을 갖고 있다면, 수행승들이여, 그것이 위대한 사람들의 특징이다.”(D30.2)라고 했다. 여기서 까리비까는 한역으로 가릉빈가를 말한다. 경전에 등장하는 상상속의 새를 말한다.

 

불교 신행단체에서 가릉빈가는 합창단 이름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까라비까 새의 소리는 청정한 음성이 특징이라고 했다. 이는 ‘brahmassaro’를 번역한 말이다. 영어로는 ‘The voice of Mahābrahma’의 뜻이다. 그래서일까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범천의 목소리’로 번역했다.

 

범천은 청정함을 상징한다. 청정한 삶(Brahmacariya)을 살아야 갈 수 있는 곳이범천이다. 이와 같은 청정한 삶을 사는 범천의 목소리는 청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범천의 목소리를 ‘신의 목소리’ 또는 ‘천상의 목소리’라고 할 수 있다.

 

심오한 목소리

 

부처님은 천상의 목소리를 가졌다. 천상의 목소리는 어떤 것일까? 초기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존자 고따마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여덟 가지 요소를 갖춥니다. 또렷하고, 명료하고, 감미롭고, 듣기 좋고, 청아하고, 음조 있고, 심오하고, 낭랑합니다. 그러나 존자 고따마의 목소리는 청중이 있는 곳까지 알려지지만, 그 목소리가 청중을 떠나서까지 퍼져가지는 않습니다.” (M91)

 

 

바라문 브라흐마유는 부처가 출현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에 제자를 시켜서 부처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게 했다. 제자가 보고한 것 중에서 목소리에 대한 것이 있다. 부처님의 목소리는 한마디로 신의 목소리였다. 이는 “하느님 씨낭꾸마라가 이러한 의취로 말할 때 그 목소리는 여덟 가지 특징 곧, 유창하고, 지적이고, 달콤하고, 또렷하고, 낭랑하고, 분명하고, 심오하고, 공명하는 특징을 갖추었습니다.”(D18.15)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형상을 한 불상은 이곳 저곳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목소리는 알 수 없다. 다만 경전에 쓰여 있는 표현으로 알 수 있다. 그것은 여덟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렷하고, 명료하고, 감미롭고, 듣기 좋고, 청아하고, 음조 있고, 심오하고, 낭랑한 목소리를 말한다. 주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1) ‘유창하고’는 것은 잘 통해서 장애가 없다는 뜻이다.

2) ‘지적이고’는 목소리는 의미를 분명히 한다는 뜻이다.

3) ‘달콤하고’는 감미롭고 부드럽다는 뜻이다.

4) ‘또렷하고’는 듣기에 알맞고 귀에 즐겁다는 뜻이다.

5) ‘낭랑하고’는 일체가 되어 흩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6) ‘분명하고’는 명료하여 혼란이 없다는 뜻이다.

7) ‘심오하고’는 단전으로부터 깊이 일으킨다는 뜻이다. 단지 혀-이빨-입술-윗턱을 단지 움직여서 일으킨다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감미롭지도 않고 멀리서 들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8) ‘공명하고’는 큰 비구름의 북소리처럼 크게 울린다는 뜻이다.

(Smv.640)

 

 

디가니까야 주석을 보면 여덟 가지 음성에 대하여 설명해 놓았다. 이 중에서 가장 와 닿는 것은 일곱 번째 심오한 목소리이다. 이 말은 빠알리어 감비로(gambhīro)를 번역한 말이다. 영어로는 ‘Deep, unfathomable; profound’의 뜻이다.

 

부처님은 심오한 음성을 가졌다. 범천도 심오한 음성을 가졌다. 이렇게 본다면 심오한 음성은 천상의 목소리와 같다. 그런데 심오한 음성은 단지 입에서만 나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주석에 따르면 단전에서 나는 소리라고 했다.

 

부처님은 깊고 깊은 음성을 가졌다. 더구나 공명음이라고 했다. 이처럼 단전에서 나오는 깊고 공명하는 목소리는 누구나 명료하게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목소리를 사자후로 표현하기도 한다.

 

사자후(獅子吼, sihanado)는 최상의 지혜에서 나오는 당당하고 의미 있는 선언을 말한다. 누구나 진리를 설하면 사자후를 토할 수 있다. 설령 그가 비주얼이 되지 않고 외모도 보잘 것 없지만 진리를 꿰뚫은 자라면 사자후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단전에서 우러나오는 심오한 목소리, 그리고 공명음이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아직까지 이런 강사를 보지 못했다.

 

진리를 설하는 자의 목소리는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감 받았다는 내용이 많다. 진리를 설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최상의 지혜에서 나오는 당당하고 의미 있는 말을 했을 때 감화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부처님의 32상도 한몫 했을 것이다. 거룩한 모습의 부처님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화를 받았을 것이다. 마치 천상의 존재를 본 듯했을 때 매료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상에서 최고의 미인도 천상에서는 암원숭이정도로 보인다는 말이 있다. 부처님은 일반사람들과 확연이 차이가 나는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신체적 특징만으로도 감화를 받을 정도였다면 천상의 존재를 보는 것 같았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다 목소리도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심오한 목소리가 특징이다. 단지 입에서만 우물쭈물 나오는 목소리가 아니다. 배에서 나오는 배울림 목소리이다. 이를 공명음이라고 했다. 그리고 부드럽고 감미롭다고 했다. 사람들은 부처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마음이 청정해졌을 것이다.

 

진리를 설하는 자의 목소리는 아름답다. 설령 비주얼이 되지 않아도 진리를 설하는 자의 목소리는 청정하다. 진리를 설하면 목소리는 심오해지고 공명음이 일어날 것이다. 그런 목소리를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러나 비슷한 목소리는 접한다. 한국테라와다불교 빤냐와로 스님을 말한다.

 

 

빤냐와로 스님은 삼장법사이다. 삼장에 대하여 꿰뚫고 있어서인지 들을만하다. 법문을 듣고 있으면 차분해진다. 나직이 조곤조곤 말하지만 깊이가 있다. 때로 부드럽고 감미롭다. 오는 7월 5일 담마와나선원에서 안거 입재법문이 있다.

 

 

2020-06-2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