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마음 보는 수행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20. 7. 8. 11:04

마음 보는 수행에 대하여

 

 

어느 카톡방에 초대받았다. 수행관련 카톡방이다. 동의 받지 않은 일방적 초대이다. 이럴 경우 단지 객에 지나지 않는다. 불이 들어왔으니 구경만 할 뿐이다. 방장이 이런 글을 올렸다.

 

 

단지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기만 하라. 무슨 소리를 들으면, 단지 들음을 알기만 하라. 듣고 있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자기 자신이 안다면, 그것은 생각이다.

 

아는 마음과 관찰하는 마음두 개의 마음이 있어야만 수행이다. 하나의 마음만 있다면거기에는 항상가 있다.

 

대상을 따라가거나 인지하거나 알 필요가 없다. 앎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다.

 

사람이 잠자고 있는 동안에도 담마는 잠들지 않으며, 죽어가고 있거나 기진맥진할 때에도, 기진맥진한 느낌은 단지 기진맥진한 느낌이여, 그것을 아는 것은, 느낌과 분리되어 있다. 마음으로 마음을 지켜보기 무슨 수행을 하든지, 서고, 걷고, 앉고, 눕고, 먹는 등의 모든 자세에서, 마음을 지켜보라. -아짠차-”

 

 

아짠차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짠차 스님 어록에 있는 것을 옮겨 놓은 것 같다. 이 글에 대해 어떤 이가 그런데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만 든다고 배웠는데 이것은라고 하는 육식의 경우이고 배경에 항상 알아차림이 있는 두개의 마음이 있을 때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 것이라 여기면 되는지요.”라고 물었다.

 

질문자는 두 개의 마음을 얘기하고 있다.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마음만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한순간에 두 마음이 있을 수 없다. 탐욕과 성냄이 동시에 일어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이와 같은 질문에 또 어떤 이가 위 법문은 제가 알기로는 아잔차 스님 법문이 아니라아니라꼬살라 꼬살라 사야도 법문인듯 합니다. 케마왐사 스님이 쓴 찌따누빠사나의 구절인 것 같습니다.”라고 글을 달았다.

 

아짠차스님은 잘 모른다.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러나 우 꼬살라 사야도는 알고 있다. 쉐우민 국제선원을 창립한 미얀마의 사야도인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직제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는 이른바 마음 보는 수행을 지도한 사야도로 잘 알려져 있다. 한국명상원 묘원선생을 통해서 2009년 부터 알게 되었다.

 

의문자는 마음이 마음을 보는 것에 대하여 아짠차 스님이 아니라 우 꼬살라 사야도의 말이 아닌지 묻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사실 대념처경에 있는 말이다. 심념처를 말한다.

 

흔히 심념처를 마음 보는 수행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남의 미음을 보는 타심통을 말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마음을 보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보는 것일까? 대념처경에서 심념처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sadosa vā citta sadosa cittanti pajānāti, vītadosa vā citta vītadosa cittanti pajānāti,

 

성냄에 매인 마음을 성냄에 매인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을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D22.19)

 

 

성냄(dosa)에 대한 것이다. 화가 났을 때 두 번 알아차려야 함을 말한다. 화나 났을 때 화가 난 것을 알아 차려야 하고, 화가 사라졌을 때 역시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성냄이 생멸한 것에 대하여 두 번 알아차림 하는 것이다.

 

심념처에서는 모두 16가지 마음이 소개되어 있다. 특징은 모두 쌍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8쌍을 나열하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 위축된 마음, 계발된 마음, 탁월한 마음, 집중된 마음, 해탈된 마음 이렇게 8가지 마음이다. 이와 같은 8쌍은 생멸에 대한 것이다. 형식은 성냄 문구와 똑같다. 정형문에서 단어만 바꾸면 된다.

 

심념처에서는 왜 두 번 알아차림 하라고 했을까? 이는 나의 마음과 관련이 있다. 화가 났을 때 단지 화가 난 줄 모른다면 그 화는 내가 낸 것이 될 것이다. 나의 화가 되는 것이다. 이는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는 유신견 정형구에 해당된다.

 

유신견은 존재를 세세생생 윤회하게 하는 마음이다.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 , 나의 자아라고 보는 것은 갈애와 자만과 유신견에 따른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나의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한 괴로움에서 벗어 날 수 없고, 윤회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 수행을 하는 것은 어쩌면 유신견 타파라고도 볼 수 있다.

 

화가 났을 때 화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화는 내것이 된다. 그렇다면 화를 알아차렸을 때 그 알아차린 마음은 무엇일까? 알아차린 마음을 나의 마음이라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심념처에서는 다시 한번 더 알아차리라고 말한다. 화가 사라진 그 마음을 알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두 번 알아 차렸을 때 나의 마음이라는 유신견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성냄에 매인 마음을 성냄에 매인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을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D22.19)라고 하는 것이다.

 

심념처를 보면 해탈된 마음도 있다. 해탈된 마음도 쌍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정형문식으로 표현하면 해탈된 마음을 해탈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해탈되지 않은 마음을 해탈되지 않은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가 된다. 이렇게 두 번 알지 못하면 나는 해탈했다.”라는 자만이 생겨날 것이다.

 

자만은 흔히 내가 누군데.”라는 말로 표현된다. 지위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도 자만이다. 사장이라면 내가 명새기 사장인데.”라는 자만이 생겨날 것이다.

 

많이 배운 자는 배운 자의 자만이 있고, 많이 가진 자는 부자의 자만이 있다. 태생의 자만도 있다.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었던 바라문이 대표적이다. 성직자도 태생의 자만에 해당된다. 대개 내가 누군데.” 또는 내가 누군데 감히!”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지위를 자아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유신견이다.

 

유신견을 타파하려면 마음 보는 수행을 해야 한다. 탐욕이 일어 났을 때 탐욕에 매인 마음이라고 알아차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탐욕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아는 것이다. 이렇게 두 번 아는 것에 대하여 심년처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쉐우민 선원 출신자들은 노팅(noting)과 왓칭(watching)으로 설명한다.

 

성냄을 예로 든다면, 노팅은 성냄에 매인 마음을 아는 것이고, 왓칭은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을 아는 것이다.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만 알기 때문에 노팅 다음의 왓칭은 뒤이어 오는 마음이다.

 

화가 났을 때 화가 난 것을 아는 것이 노팅이다. 이렇게 노팅하면 더 이상 화나는 마음이 아니다. 그런데 이 상태로 있게 된다면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을 자신의 마음이라고 여길 것이다. 이럴 때 마치 확인사살하듯이 다시 한번 알아차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을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아는 것이다. 화가 났을 때 이렇게 두 번 알아차림 해야 유신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작년 1월 미얀마 담마마마까 국제선원에서 12일가량 머물렀다. 그리고 12일 동안 선원순례를 했다. 그 중의 하나가 마음 보는 수행으로 유명한 쉐우민 국제선원이었다. 그때 담마와나선원장 떼자사미 스님이 신도 두 명과 함께 수행중이었다. 찾아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떼자사미 스님에 따르면 사념처 수행은 결국 심념처로 수렴됩니다.”리는 말을 했다. 이는 한번 더 알아차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확인사살 하듯이 내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청정도론을 보면 정신-물질 과정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있다. 이는 다름 알아차림에 대한 것이다. 정신과 물질은 함께 생겨서 함께 소멸함을 아는 것을 말한다.

 

행선할 때 발을 들면 아는 마음이 있다. 발을 이동하면 역시 아는 마음이 있다. 이처럼 행위와 아는 마음이 있다. 몸을 관찰 했을 때 행위와 아는 마음은 함께 일어나 함께 사라진다. 다음 동작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대상을 아는 마음은 두 번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사띠하는 것이고 하나는 아는 마음이다. 여기서 사띠는 대상을 토대로 하고 알아차림 하는 마음이다. 대상에 딱 붙어 있는 마음이다. 마치 송아지를 기둥에 맨 줄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 전과정을 아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뒤이어 일어 나는 아는 마음이다. 이를 냐나()라고 한다. 그래서 행위, 사띠, 냐나 이 세 가지는 함께 일어나서 함께 사라진다. 이것이 대상을 토대를 둔 사띠빳타나이다. 이렇게 관찰수행하는 것에 대하여 사띠빳타나위빠사나라고 한다.

 

사띠의 대상이 무엇이 되느냐에 따라 명칭이 달라진다. 호흡처럼 신체에 대한 것이라면 몸관찰이 된다. 몸에 토대를 둔 위빠사나가 된다. 이를 까야누사띠빳타나라 한다. 신념처라고 말한다. 느낌을 토대로 하면 수념처가 되고, 마음을 토대로 하면 심념처가 되고, 현상을 토대로 하면 법념처가 된다. 어느 경우이든지 생멸에 대한 것이다. 그것도 찰라생찰라멸에 대한 것이다.

 

찰라생찰라멸하기 때문에 무상한 것이다. 변하기 때문에 괴롭다. 생멸만 있을 뿐 머묾이 없어서 실체가 없다. 대상에 토대를 두어 관찰하면 오온의 생멸을 보게 된다. 사띠빳타나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오온에 대하여 무상, , 무아를 통찰하게 된다. 그래서 오온에 대해 집착하지 않게 된다. 탐욕과 성냄과 미혹에서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사띠빳타나위빠사는 부처님이 발견한 위대한 수행이다.

 

 

2020-07-0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