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불명 사띠번역어 ‘마음챙김’은 폐기되어야
내생각이 틀림없음을 확인했다. 이는 최근 일묵스님의 유튜브법문을 통해 확인된 것이다. 스님은 법문에서 사띠는 마음챙김이 아니라 ‘기억’이라고 했다.
일묵스님은 왜 마음챙김을 왜 버렸을까?
사띠가 기억인 이유에 대하여 수년전부터 글을 써 왔다. 마음챙김이라는 용어가 대세인 시대에서 마음챙김이라는 용어의 사용이 부당함을 글쓰기로 저항했다. 그러나 보통불자의 글쓰기로서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일묵스님의 법문을 들으니 이제 마음챙김이라는 용어가 이제까지 잘못 사용되어 왔음을 증명하는 것 같다.
일묵스님의 예전 법문을 보면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는 초기불전연구원(이하 초불연) 번역서를 인용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에는 두 종류의 번역서가 엄연히 실재하고 있음에도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서만을 교재로 채택하여 법문한 것이다. 일묵스님은 왜 사띠 번역어 마음챙김을 버렸을까?
일묵스님은 최근 법문에서 사띠가 기억인 이유에 대하여 통찰과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사성제와 팔정도 등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실천하여 통찰이 일어났을 때 이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사띠의 진정한 의미라고 했다.
일묵스님의 사띠에 대한 이야기는 유튜브에서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유튜브에 ‘[음성] Sati는 왜 기억인가?ㅣ일묵스님ㅣ초기불교 제따와나선원 수행법담 304.’(2020-1-3)라는 타이틀을 가진 동영상을 말한다.
동영상은 18분짜리이다. 문답식으로 되어 있다. 동영상은 어느 재가불자가 사띠에 관한 질문으로 시작된다. 질문자는 사띠에 대하여 ‘마음챙김 또는 알아차림이라고 말하는데 잘 와닿지 않는다’는 취지로 질문했다. 이에 일묵스님은 사띠는 기억의 뜻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일부 녹취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사띠의 의미는 간단해요. 인도에서는 기억의 뜻이거든요. 잊지말고 항상 염두에 두어라, 이 말을 절대 잊지 마라, 명심해라, 이런 말이 다 기억의 다른 모습이잖아요.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리의 가르침을 절대 잊지 말고 그것을 마음에 새(?), 마음에 두고 항상 그것을 잊지 않고 작동되도록 하는 이게 폭넓게 말하면 기억이고, 그런 기억이 단순히 의식적인 수준이 아니라 설사 내가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그래 물에 푹 빠져서 죽음이 왔다 갔다 할 때도 망각되지 않는 그 정도의 수준을 이야기하는 거죠.”(일묵스님)
일묵스님은 사띠에 대하여 죽음에 이를지라도 망각되지 않는 기억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임종순간까지 잊지 않음을 말한다.
오력과 칠각지에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는 것에 대하여 사띠라고 주장한 바 있다. 사띠의 본래 의미는 기억인데, 여기서 말하는 기억은 담마에 대한 기억이라고 수없이 글을 썼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오력과 칠각지에서 사띠에 대한 설명을 보면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했다.
부처님은 오력에서 사띠에 대하여 "새김의 힘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고귀한 제자가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면, 수행들이여, 이것을 새김의 힘이라 한다.”(A5.14)라고 말씀했다. 또 칠각지의 사띠에 대하여 “그는 그와 같이 멀리 떠나서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멀리 떠나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면, 그 때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가 시작된다.”(S46.3)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은 기억해야 한다. 기억을 넘어서 새겨야 한다. 뼈에 새겨 놓는다는 말이 있듯이 죽어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일묵스님이 말한 기억은 이런 기억을 말한다.
한국불교에 이상한 현상이
일묵스님은 기억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새김이라는 말을 한번도 쓰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쓰지 않는 것 같다. 동영상 녹취록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새’자가 입밖으로 나왔지만 거두어 들였다. 이는 의도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이하 KPTS)본에서 사용되는 사띠의 번역어 새김을 애써 외면하는 것과 같다.
불교계에서 한 가지 현상을 발견했다. 그것은 KPTS본 번역서를 잘 인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두 종류의 번역서가 번역비교를 해보면 마치 두 개의 막대기를 비교해보듯이 금방 드러남에도 외면하는 것 같다. 왜 그럴까? 아마도 민간에서 번역했기 때문이다. 재가불자가 번역한 것 보다 스님이 번역한 것을 더 신뢰하는 것 같은 알 수 없는 분위기에 따른 것으로 본다.
사띠를 왜 ‘새김’이라고 번역했을까?
KPTS 에서는 사띠에 대하여 새김으로 번역했다. 사띠를 새김으로 번역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KPTS본 각 니까야 해제를 보면 용어설명이 있다. 사띠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역자의 번역과 다른 초기경전의 역자들 사이에서 가장 두드러진 번역의 차이를 보이는 것은 싸띠(sati)에 대한 것이다. 최근에 위빳사나 수행자들 사이에 싸띠를 두고 마음챙김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대세가 되었다. 일부에서는 마음지킴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싸띠는 내용적으로, 마음이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것이며, 분별적 사유나 숙고에 휩싸이지 않고 대상을 알아채고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것을 고려한다면, 싸띠를 ‘마음챙김’이나 ‘마음지킴’으로 번역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타당성을 지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몇 가지 모순을 갖는다.
첫째, 모든 가르침의 요소들이 마음과 관계되는 것인데 유독 싸띠에만 별도로 원래 없는 마음이란 단어가 부가될 이유가 없다.
둘째, 올바른 ‘마음챙김’이나 ‘마음지킴’이라는 말은 착하고 건전한 것을 지향하는 올바른 정진과 특히 내용상 구분이 어려워질 수 있다.
셋째, 네 가지 새김의 토대[四念處]에서 토대가 되는 명상주제에 하나에 마음이 포함되어 있어 그것에 대하여 마음에 대한 마음의 ‘마음챙김’이나 마음에 대한 마음의 ‘마음지킴’이라고 삼중적으로 번역하는 잘못이 발생할 수 있다.
넷째, ‘싸띠’라는 빠알리어 자체에는 ‘마음’은 커녕 ‘챙김’ 이나 ‘지킴’이라는 뜻도 어원적으로 없다.
이 싸띠에 대해서는 부처님이 직접 쌍윳따니까야에서 정의 내린 부분 –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멀리 떠나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면(anussarati anuvitakketi), 그 때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가 시작한다.(46.3)’ - 을 참고하여 번역하는 것이 제일 타당하다. 여기서는 분명히 기억과 사유가 새김의 전제조건으로 확실한 싸띠에 대한 해석학적 설명, 즉 기억과 사유의 일치점을 지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싸띠라는 말은 범어의 스무리띠( sk. Smrti)의 빠알리어 형태로 원천적으로 ‘기억’이란 뜻을 갖고 있으나, 기억과 사유가 일치하는 ‘지금 여기에서의 분명한 앎’이란 의미도 갖고 있으므로 그 둘 다의 의미를 지닌 우리말을 찾던 역자는 ‘새김’이란 가장 적당한 번역이라고 생각했다.
새김은 과거에 대한 ‘기억’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조각(彫刻)’ – 물론 사유를 은유적으로 이해할 때에 – 이라는 의미를 모두 함축하기 때문이다. 기억이 없이는 사물에 대한 지각을 올바로 알아차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KPTS본 각니까야 해제 용어설명에서,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회장)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회장은 KPTS본 각니까야 해제에서 마음챙김이라는 용어의 부당성에 대하여 조목조목 반박했다. 사띠가 마음챙김이 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사띠의 제1의 의미인 기억이라는 뜻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챙김이라고 했을 때 마음이 마음을 챙긴다는 뜻이 되어 버려서 이는 기억과 전혀 무관한 것이 된다.
방금 한 말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사람이 살아 가는데 있어서 기억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이 방금 한 말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횡설수설한다고 말할 것이다. 치매환자가 좋은 예이다.
치매환자는 방금한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 치매환자는 가장 최근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특징이 있다. 유년시절처럼 아주 오래된 아주 어렸을 적 기억은 하지만 가까이 있었던 일은 기억하지 못한다.
전재성회장에 따르면 사띠번역어 새김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과거의 기억’과 ‘지금여기에서의 분명한 앎’이라고 했다. 이는 사띠가 기억과 알아차림 두 가지 기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기억과 사유를 모두 포괄하는 우리말 새김을 사띠의 번역어로 채택했다고 각 니까야 해제에서 밝혔다.
사띠에 대하여 여러 가지 번역어가 있다. 이미 대세가 되어 버린 마음챙김이라는 말이 있다. 이밖에도 마음지킴, 알아차림 등의 말이 있다. 그러나 새김이라는 번역어는 KPTS 이외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것 같다. 기억과 사유를 아우르는 좋은 우리말이 있음에도 통용이 되지 않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또 사용하기에 생소한 것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사띠번역어 마음챙김이나 알아차림, 새김 등을 사용하지 않고 원어 그대로 사띠 또는 싸띠라고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사띠의 볼래 의미는 기억이다. 사람이 방금 말한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듯이, 불교인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불교인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빠알리사전에서도
사띠의 제1 의미는 기억이다. 이는 빠알리사전에서도 확인된다. 인터넷에서 누구나 다운 받을 수 있는 빠알리사전 PCED194를 보면 사띠에 대하여 제1의 의미로 ‘memory, recognition, consciousness’라고 했다. 부가적인 뜻으로 ‘intentness of mind, wakefulness of mind, mindfulness, alertness, lucidity of mind, self-possession, conscience, self-consciousness’라고 했다.
사띠의 제1의 의미는 기억이라는 뜻의 메모리이다. 그런데 부가적인 뜻으로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마인드풀니스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 ‘마음챙김’이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는 사띠에 대하여 마음챙김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마음챙김이 마치 천하를 평정하듯이 대세가 되었을까? 분명히 잘못된 번역어임에도 아무 거리낌 없이 사용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초기불전연구원의 왕성한 활동에 따른 역할도 있다고 보여진다.
가르침에 대한 기억
사띠는 초기불교경전에서 매우 중요한 술어이다. 니까야 어디를 열어 보아도 사띠라는 용어를 만나게 된다. 수행승이 탁발 나갈 때 “우리는 신체를 가다듬고 언어를 다스리고 정신을 수호하고 새김을 확립하고 감관을 제어하고 마을이나 거리로 탁발을 하러 가리라.”(S20.10)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아팠을 때도 사띠해야 한다.
부처님은 여러 차례 살해될 뻔했다. 한번은 깃자꾸따 산을 지날 때 바위가 떨어졌다. 악인의 대명사 데바닷따가 부처님을 살해하고 자신이 부처님의 자리에 오르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수에 그쳤다. 그 때 부처님은 돌조각에 다리를 다쳤다. 피가 날 정도로 다쳤다. 상윳따니까야 ‘돌 조각의 경’에 따르면 “그러나 세존께서는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마음을 가다듬어 상처받지 않으면서 참아내셨다.”(S1.38)라고 했다.
초기경전에서 사띠에 대한 것을 보면 크게 두 가지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가르침에 대한 기억이고, 또 하나는 지금 여기에서 관찰하는 것이다. 이런 행위는 모두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서 통증을 관찰하는 것도 이전 것을 기억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가르침에 대한 기억이다.
모든 학문은 외는 것부터 시작한다. 산수를 배울 때 구구단을 왼다. 영어를 배울 때 알파벳을 왼다. 고교시절 국어 시간에는 고문을 달달 외웠다. 불교수행자라면 부처님 가르침을 외워야 한다.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과 같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은 달달 외워야 한다.
의도적으로 삭제한 흔적이 보이는데
사띠에 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 놀랍게도 이번에 일묵스님 법문에서 유사한 이야기를 들었다. 주로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서를 교재로 사용하던 스님 입에서 사띠번역어 마음챙김을 폐기하고 기억이라는 용어를 대체한 것을 보고서 세월이 흘렀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시대가 바뀌어 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띠번역어 마음챙김은 이제 폐기되어야 한다.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함에 따라 혼란과 혼돈을 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법우님은 사띠에 대하여 기억이라고 알고 난 뒤부터 모든 의혹이 해소되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대체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초기불전연구원에서 편찬된 ‘초기불교이해’를 열어 보았다. 이 책은 스님들은 물론 불자들의 교재로도 활용되고 있다.
초기불교이해를 열어 보면 마음챙김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여러 가지 근거를 들어 용어설명을 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청정도론을 근거로 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마음챙김은 대상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청정도론은 말한다.
“마음챙김은 [대상에] 깊이 들어가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잊지 않는 것을 역할로 한다. 보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혹은 대상과 직면함으로 나타난다. 강한 인식이 가까운 원인이다. 혹은 몸 등에 대한 마음챙김의 확립이 가까운 원인이다. 이것은 기둥처럼 대상에 든든하게 서 있기 때문에, 혹은 눈 등의 문을 지키기 때문에 문지기처럼 보아야 한다.””(Vis.XIV.141) (초기불교이해, 281쪽, 각묵스님)
초기불전연구원 각묵스님은 청정도론을 근거로 하여 마음챙김이 사띠번역어가 된 이유를 설명했다. 마음챙김은 ‘[대상에] 깊이 들어가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라는 것을 제 1의 이유로 들었다. 그러나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왜 그런가? 사띠의 제1의미인 기억(memory)를 의도적으로 빼 놓았기 때문이다.
각묵스님은 처음 한줄을 삭제했다. 그리고 두 번째 줄부터 시작되는 내용을 근거로 삼았다. 그래서 사띠에 대하여 1)대상에 들어 가는 것, 2)대상을 잊지 않는 것, 3)대상을 보호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이것이 마음챙김이라는 것이다. 사띠의 가장 중요한 의미인 기억을 의도적으로 삭제한 것이다. 이는 올바른 행위가 아니다. 어쩌면 독자를 속이는 것인지 모른다.
청정도론에서 사띠에 대한 설명을 보면
청정도론 14장 141절을 보면 온전히 다 보면 첫줄에 기억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KPTS본 청정도론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새김] 새김은 그것에 의해서 기억하는 까닭에, 스스로 기억하는 까닭에, 그것이 기억하는 것 자체이기 때문에 새김이다. 그것은 부유하지 않음을 특징으로 삼고, 잊지 않음을 기능으로 삼고, 수호를 현상으로 삼거나 경계에 직면한 것을 현상으로 삼고, 견고한 지각을 토대로 삼거나 몸 등의 새김의 토대로 삼는다. 또한 기둥처럼 대상에 견고하게 확립되어 있고, 문지기처럼 시각의 문 등을 수호한다고 보아야 한다.”(Vism.14.141, 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 청정도론 968쪽, 전재성회장)
KPTS본 청정도론을 보면 사띠의 설명과 관련하여 분명히 첫줄에 기억에 관한 내용이 있다. 그래서 “새김은 그것에 의해서 기억하는 까닭에, 스스로 기억하는 까닭에, 그것이 기억하는 것 자체이기 때문에 새김이다.”라고 했다. 이것이 사띠의 제1의미이다.
사띠의 제1의미가 기억인 것은 초기불전연구원본 청정도론에서도 확인된다. 옮겨 보면 “이것 때문에 기억하고, 혹은 이것은 그 스스로 기억하고, 혹은 단지 기억하기 때문에 마음챙김(sati)이라고 한다.”라고 되어 있다.
호박과 돌맹이의 비유
청정도론에서 사띠용어에 대한 설명을 보면 제1의 의미로 분명히 기억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부가적으로 설명한 것이 ‘부유하지 않음을 특징으로 삼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각주를 보면 호박과 돌맹이의 비유를 들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새김이 없는 마음은 호박에 비유되고 새김을 수반하는 마음은 돌에 비유된다. 호박은 수면 위를 떠다니지만, 돌은 물 밑바닥에 이를 때까지 가라앉는다. 이처럼 강한 새김을 수반하는 마음은 대상의 겉모습 속에서 떠돌지 않고, 대상에 머물러 대상의 속성 속으로 깊이 침투해서,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통찰하는 기반을 제공한다.” (2468번 각주, 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 청정도론, 968쪽)
붓다고사가 지은 청정도론을 보면 한가지 원칙이 있다. 용어를 설명할 때 특징, 기능, 현상, 토대 이렇게 네 가지로 설명한다는 것이다. 사띠에 대한 설명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사띠에 대하여 “1)부유하지 않음을 특징으로 삼고, 2)잊지 않음을 기능으로 삼고, 3)수호를 현상으로 삼거나 경계에 직면한 것을 현상으로 삼고, 4)견고한 지각을 토대로 삼거나 몸 등의 새김의 토대로 삼는다.”(Vism.14.141)라고 했다. 이것이 사띠에 대한 올바른 설명이다.
붓다고사는 사띠에 대하여 네 가지로 설명했다. 그런데 네 가지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기억이다. 그래서 “새김은 그것에 의해서 기억하는 까닭에, 스스로 기억하는 까닭에, 그것이 기억하는 것 자체이기 때문에 새김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각묵스님의 ‘초기불교이해’ 책을 보면 사띠에 대한 설명에서 이 문장에 통째로 빠져 있다. 이는 의도적인 것이라고 본다. 왜 그런가? 사띠에 네 가지 설명에 대하여 기억이 전제된다고 했는데, 이 기억에 대한 문장을 집어 넣으면 마음챙김이라는 용어와 충돌이 일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초기불전연구원의 무리수
사띠번역어 마음챙김이라는 말에는 기억이라는 말에는 기억의 뜻이 전혀 없다. 이는 “넷째, ‘싸띠’라는 빠알리어 자체에는 ‘마음’은 커녕 ‘챙김’ 이나 ‘지킴’이라는 뜻도 어원적으로 없다.”(KPT본 해제)라는 글로도 확인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초기불교이해’ 책에서는 기억이라는 문장이 들어가는 설명을 삭제했을 것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번역어 마음챙김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무리수를 두었다. 가장 먼저 기억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삭제했다. 그래서인지 ‘초기불교이해’ 책에서는 “초기불전에서 사띠(sati)는 거의 대부분 기억이라는 의미로는 쓰이지 않는다.”(281쪽)라고 했다. 이유는 수념(隨念)에서와 같이 접두어 아누(anu)를 붙였을 때만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왜 이렇게 주장하는 것일까? 이는 사띠에 대하여 수행용어로 보기 때문이다.
각묵스님에 따르면 사띠를 마음챙김이라고 번역한 것은 철저하게 수행용어라는 뜻으로 설명했다. 사띠가 단독으로 쓰였을 때는 문자 그대로 기억에 대한 것이지만 수행용어로서 기억이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여러 가지 경전적 근거를 들었다. 그 중에 하나가 ‘운나바 바라문 경’(S48.42)이다.
각묵스님이 근거로 든 경을 보면 사띠는 마노와 해탈을 연결해 준다. 그래서 마노는 사띠를 의지하고, 사띠는 해탈을 의지한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이처럼 마음챙김은 마음을 해탈과 연결시켜 주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그래서 마음챙김으로 옮겼다.”(283쪽)라고 했다. 그러나 이는 근거가 약하다.
각묵스님이 근거를 든 경을 보면 사띠가 마음챙김인 이유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암반수의경을 예로 들었다. 2세기 후반 안세고의 불설대안반수의경을 예를 들어 “사띠는 염(念)이 아닌 수의 즉 마음(意, mano)을 지키고 보호(守)하는 기능으로 의역하고 있다.”(283쪽)라고 했다.
각묵스님의 사띠에 대한 이해는 놀랍다. 안세고의 안반수의경의 예를 들어 ‘사띠는 염(念)이 아니다’라고 간단히 부정해 버린 것이다. 이 말은 사띠는 기억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함에도
사띠란 무엇일까? 경전과 논서를 근거로 해 볼 때 기억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실참수행에서는 기억일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과연 기억 없이 수행할 수 있을까?
자신이 한말도 기억하지 못하면 치매환자라고 한다. 자신의 말을 기억해야 다음 말도 할 수 있고 대답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수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전 것을 기억해야 일관성을 갖는다.
호흡관찰이든 배의 부품과 꺼짐의 관찰이든 이전 것을 기억해야 계속 유지된다. 그럼에도 마음챙김이라 하여 기억을 배제시키고 오로지 지키고 잊지 않고 보호하는 역할만 있을 때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각묵스님은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한 것에 대하여 경과 논서를 근거로 들었다. 또 하나는 중국불교도 참조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이처럼 이미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던 최초기에 마음챙김은 보호로 이해되어 왔다. 이런 것을 참조해서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옮겼다.”(초기불교이해, 283-284쪽)라고 했다.
각묵스님이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한 이유는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것은 사띠에 대하여 ‘수의’ 또는 ‘보호’라 하여 지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여기에 기억은 없다.
초기불전연구원의 사띠번역어 마음챙김에는 기억이 없다. 사람이 기억을 하지 못하면 치매환자처럼 횡설수설할 것이다. 이렇게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한 것은 한국선종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각묵스님은 ‘초기불교이해’ 책에서 다음과 같이 각주 해 놓았다.
“한국에서 ‘sati(Sk, smrti,念)’을 마음챙김으로 제일 먼저 정착시킨 분은 고요한 소리의 고문이신 활성 스님이다. 활성 스님께서 이렇게 옮기자 저자를 비롯한 한국의 대부분 후학들이 이를 채용해 쓰고 있다.” (초기불교이해, 284쪽, 184번 각주)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번역어를 선택해야 함에도 스승이 쓰던 용어이기 때문에 채택했다는 의미로 파악된다. 과연 이것이 니까야 번역자의 바른 자세일까? 마치 선종에서 화두챙기듯이 마음을 챙긴다는 마음챙김이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띠의 번역어로서 적합한 것일까?
세상이 바뀌고 있다
일묵스님이 사띠 번역어 마음챙김을 버린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마음챙김으로 번역되어 있는 경을 읽어 보았을 때 의미가 다가오지 않아서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마음챙김 대신이 기억을 넣으면 의미가 명확해진다. 기억보다 더 강력한 ‘새김’을 넣었을 때도 역시 명확하게 드러난다.
일묵스님은 사띠에 대한 새로운 번역어로 기억을 말하고 있다. 교재로는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서를 사용하지만 마음챙김 만큼은 기억이라고 바꾸어 읽는다. 이런 기억에 대하여 “절대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다름 아닌 새김이다. 그러나 일묵스님은 새김에 대하여 한마디 말을 하지 않았다. 새김으로 말하려고 ‘새’자를 꺼냈으나 이내 거두어 들였다.
사띠 번역어 대하여 수많은 글을 썼다. 사띠는 마음챙김이 아니라 기억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기억은 다름아닌 가르침에 대한 기억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오력과 칠각지에 있는 사띠 정형구를 예로 들었다.
수행을 하면 힘이 생긴다. 마치 운동을 하면 근육이 생기는 것과 같다. 수행의 힘은 오래 앉아 있는 것만이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기억하고 새기고 사유하고 실천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수행에서 체득된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사띠의 진정한 의미이다.
세상이 바뀌고 있다. 그 동안 용어를 선점한 측에서는 이제까지 흐름을 주도해 왔다. 그러나 세월에 따라 변화가 감지된다. 잘못 사용되는 용어는 폐기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사띠번역어 마음챙김이다.
잡도리하다?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국어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인터넷검색결과 어학사전에는 나오지만 일반국어사전에는 보이지 않는다.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아마도 영어 마인들풀니스(mindfulness)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서양에서는 사띠를 마인드풀니스라고 한다. 이를 단순하게 풀이하면 ‘마음을 채우다’라는 뜻이 된다. 그래서 사띠에 대하여 마음챙김이라고 했을 것이다.
또 하나는 화두챙김을 들 수 있다. 이는 선종에서 쓰는 말을 차용해서 마음챙김이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선가에서 쓰는 용어를 초기불전연구원에서 종종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마나시까라(manasikāra)’라는 말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마나시까라에 대하여‘잡도리하다’라고 번역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스님들의 세계에서는 널리 쓰이는 말이라고 한다.
마나시까라는 영어로 ‘attention’라고 한다. 한자어로는 ‘작의(作意)’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정신활동을 기울이는 것’으로 번역했다.
요니소마나시까라(yonisomanasikāra)라고 했을 때 초불연번역서에서는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이라고 번역했다. KPTS에서는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는 것”이라고 했다. 영어로는 ‘proper consideration’의 뜻이고, 한자어로는 여리작의(如理作意)라고 한다.
마나시까라를 ‘잡도리하다’라고 번역한 것은 특수한 계층의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오해 받을 수 있다. 사띠를 마음챙김이라고 번역한 것은 마인드풀니스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라고 오해받을 수 있다. 더구나 선가의 화두챙김에서 힌트를 얻어 번역했다면 이는 특별한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번역했다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국적불명 사띠번역어 마음챙김은 폐기되어야
번역은 신중해야 한다. 가능하면 원어 그대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이도저도 아니면 차라리 빠알리원어 그대로 사용하는 것도 좋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사띠번역어 마음챙김은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광범위하게 통용되는 것은 주류에서 사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묵스님의 법문을 듣고 희망을 가졌다. 보통불자가 아무리 글을 많이 써도 영향력에 있어서 스님만 못하다. 영향력 있는 스님의 한마디는 파급효과가 크다. 이제 ‘용어권력’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국적불명 사띠번역어 마음챙김은 폐기되어야 한다.
2020-09-15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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