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번역비교

잘못을 지적했을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21. 3. 2. 15:44

잘못을 지적했을 때

 

 

사람의 생각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고착화되는 것 같다. 남이 지적하면 발끈한다. 이는 어쩌면 자연적 현상인지 모른다. 생각보다 먼저 앞서기 때문이다. 특히 느낌이 그렇다.

 

대상과 접촉했을 때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발생한다. 이런 느낌은 범부나 성자나 모두 똑같다. 그 다음이 문제이다. 범부는 휘말려 들어가 버리고, 현자는 알아차린다.

 

오늘 A스님의 글에 대하여 지적했다. KPTS(한국빠알리성전협회)번역이 잘못되었다고 했다. 불교계 신문사이트에도 올려진 글이다. 관련 내용을 보면 하필이면 잘못된 번역을 가져온 것이다.”라고 했다.

 

잘못된 번역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오역이나 생뚱맞은 번역을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정말 오역이나 생뚱맞은 번역일까? 문제의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깨달은 님 앞에서 수행승의 참모임에 공양하는 것보다, 사방의 참모임을 위해 승원을 세운다면, 그것이 더욱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A9.20)

 

 

앙굿따라니까야 벨라마의 경에 실려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부처님은 보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동물의 보시에서부터 시작하여 범부, 성자 등의 보시의 과보에 말씀하셨다.

 

가장 수승한 보시는 어떤 것일까? 보시의 중간단계에 승가에 보시하는 대목이 있다. 관련된 것이 깨달은 님 앞에서 수행승의 참모임에 공양하는 것이다. 이 말에 대한 빠알리 원문을 보면 “buddhappamukha bhikkhusagha bhojeyya”라고 되어 있다.

 

문제가 된 번역어는 buddhappamukha이다. 이를 KPTS에서는 깨달은 님 앞에서라고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부처님을 상수로 하는이라고 번역했다. 이에 대하여 A스님은 pamukha상수(上首)’의 뜻이 있으므로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이 맞다고 했다. 그리고 KPTS앞에서라는 번역은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인터넷에서 다운 받은 빠알리어 사전 PCED194에서 pamukha에 대하여 찾아 보았다. 빠알리어 pamukha ‘forest; chief; prominent. (nt.) the front’의 뜻이 있다. ‘상수의 뜻도 있고 의 뜻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문맥으로 보아서도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한편은 잘된 번역이고 또 한편은 잘못된 번역이라고 한 것이다. 더구나 교계신문에까지 내었다.

 

A스님은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에서도 오류를 찾아 내었다. 어떤 내용일까? 이는 자애의 마음을 닦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다. KPTS에서는 단지 스치는 향기처럼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닦는다.”(A9.20)라고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소젖을 한번 짜는 동안만큼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닦는다면이라고 번역했다.

 

두 종류의 번역서는 번역이 완전히 다르다. 단어 선택도 다르다. KPTS에서는 직역을 했고,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주석적 번역을 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스님은 KPTS번역이 올바르다고 했다. 그러나 초기불전연구원번역이 잘못된 번역이라고 하지 않았다. 이런 점을 지적했으나 반영되지 않았다.

 

현재 한국불교에서는 두 종류의 번역서가 있다. 하나는 KPTS번역이고 또 하나는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이다. 이를 재가의 번역과 출가의 번역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스님이 번역한 것을 더 쳐주고 있는 것 것 같다. 특히 승가에서는 스님이 번역한 것을 교재로 삼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편견인지 모른다.

 

두 종류의 번역서를 비교해 본 바 있다. 블로그에 니까야번역비교 카테고리를 만들이 2013년부터 2017년까지 200개가량의 글을 남겼다. 비교대상은 상윳따니까야 1권이다. 1번 데와따상윳따에서부터 13번 삭까상윳따까지 비교했다.

 

길고 짧은 것은 대 보면 금방 드러난다. 어떤 이들이 “KPTS번역은 오류투성이다.”라고 했다. 그런 것 같지 않은데 그렇다고 하니 의문이 들었다. 그 말을 듣고 직접 비교해 보기로 했다. 비교 결과는 정반대였다. 이는 블로그에 글로서 남아 있다.

 

2000년 이후 십년 이상 니까야를 근거로 하여 글을 쓰고 있다. 블로그에 매일 의무적으로 올리고 있다. 두 종류의 니까야번역서를 모두 갖추어 놓았으므로 비교해 본다. 서로 장단점이 있다. 문제는 수용여부이다.

 

KPTS에서는 대단히 탄력적이다. 초기불전연구원과 정반대의 번역을 지적했더니 바로잡았다. 더구나 개정판에서는 감사의 말을 전하면서 필명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초간 때 오류가 있던 것에 대하여 바로잡으면 각주에 이를 설명해 놓은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번역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바로 잡는 것이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더구나 방대한 니까야 번역에서 단어 하나를 잘못 선정하여 오류가 되는 경우도 있다. 이는 교정 과정에서 걸러지지 않으면 그대로 유통된다. 그래서 경전은 개정판이 많을수록 점점 완성되어 간다고 볼 수 있다.

 

전자제품 개발자 출신이다. 상품을 개발할 때 첫 제품은 만족스럽지 않다.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들이 필드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수정에 들어간다. 다음 번 생산부터는 문제가 없는 제품이 출하된다. 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의 성향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개과천선했다고는 하지만 어떤 상황이 되면 그 성향이 다시 나온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누군가 지적해도 쉽게 바꾸지 않는다. 그러나 사고가 유연한 사람도 있다.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지적해 주는 것에 대하여 오히려 감사해한다. 나는 과연 사고가 얼마나 유연할까?

 

 

잘못을 지적하는 님,

꾸짖어 충고하는 님, 현명한 님,

숨겨진 보물을 일러주는 님을 보라.

이러한 현자와 교류하라.

그러한 사람과 교류하면,

좋은 일만 있고 나쁜 일은 없으리.”

(Dhp76)

 

 

2021-03-0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