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수행중에 왜 말하지 말라고 했을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0. 9. 23. 12:21

 

수행중에 왜 말하지 말라고 했을까?

 

 

나에게 있어서 사띠란 무엇인가? 그것은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는 매일 아침 글쓰기 주제로 나타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무엇을 써야 할까?”라며 고민한다. 이전에 생각해 놓았던 것을 떠 올리며 그 중의 하나를 쓰기로 작정한다. 글은 일단 주제만 정해지면 그 다음 부터는 살을 붙이는 작업이다. 마음 속으로 시나리오를 구성해 보는 것이다.

 

글쓰기에서는 반드시 경전을 근거로 해야 한다. 재가불자가 제아무리 자신의 견해를 주장한다고 해도 그것은 사견이 된다. 그러나 가르침을 근거로 하면 정견의 글쓰기가 된다.

 

운전하는 것처럼

 

한번 글쓰기 주제가 정해지면 이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이는 잊어버리지 않음을 말한다. 세수할 때도 밥 먹을 때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 마치 운전하는 것과 같다. 목적지를 향해 운전할 때 네비도 보고 라디오 귀 기울이기도 하지만 늘 전방을 주시한다. 마찬가지로 글쓰기 주제가 정해지면 주제를 항상 마음에 두고 있어야 한다. 아마도 이런 것도 사띠라 할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일상사띠가 될 것이다.

 

사띠는 이전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좌선이나 행선할 때는 한 찰나 전의 것을 기억하라고 했다. 만약 한 찰나전을 놓친다면 그 사이에 망상이 치고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한 찰나 전의 것을 계속 기억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명상 주제를 잊어버리지 않는 것은 가능하다.

 

대념처경을 보면 일상사띠에 대한 내용이 있다. 일상사띠라는 말은 보이지 않지만 정황상 그렇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몸에 대한 알아차림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로 확인된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어떻게 올바른 알아차림을 실천하는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은 나아가는 것과 물러나는 것에 관해 올바로 알아차리고, 보는 것과 살피는 것에 관해 올바로 알아차리고, 굽히는 것과 펴는 것에 관해 올바로 알아차리고, 법복과 발우와 가사를 지니는 것을 올바로 알아차리고,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보는 것에 관해 올바로 알아차리고, 대변과 소변을 보는 것에 관해 올바로 알아차리고, 가고 서고 앉고 잠자고 깨고 말하고 침묵하는 것에 관해 올바로 알아차리는 것이다.”(D22.6, S47.2)

 

 

경에서는 알아차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는 빠알리어 삼빠쟌나(sampajañña)를 번역한 말이다. 영어로는 ‘clarity of consciousness, 또는 ‘clear comprehension’의 뜻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에서는 올바른 알아차림이라고 번역했고,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분명한 앎이라고 번역했다. 삼빠쟌나와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는 삼빠자나(sampajāna)에 대해서는 알아차림으로 번역한다.

 

올바른 알아차림은 명상주제를 놓치지 않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경에서는 대소변을 볼 때도 올바로 알아차리라고 했다. 그런데 사띠와 삼빠쟌나는 범위가 다르다는 것이다.

 

사띠는 명상대상에 대한 일종의 주제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사띠에 대하여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한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몸은 몸관찰의 주제가 된다. 몸이 명상 주제가 됨을 말한다. 이렇게 주제를 정해 놓으면 그 다음 해야 할 일은 관찰하는 것이다.

 

명상주제는 항상 기억해야 한다. 명상주제를 잃어버리면 마치 운전자가 눈을 감고 있는 것과 같다. 운전할 때 늘 앞과 옆, 뒤를 주시한다. 동시에 라디오도 듣고 옆사람과 대화도 한다. 운전자는 귀로 듣고 말도 하지만 시선은 잠시도 놓치지 않는다.

 

일상사띠도 운전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세수할 때도 옷을 입을 때도 설거지할 때도 대소변을 볼 때도 명상주제를 놓치지 않는다면 이는 명상주제를 잘 기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잘 사띠하고 있다는 말과 같다. 사띠라는 말은 본래 기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사띠한다는 것은

 

사띠한다는 것은 기억한다는 뜻이다. 사띠를 알아차림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경에서는 사띠마삼빠자나라 하여 항상 페어로 사용되는데, 이는 기억을 기반으로 하여 현상을 아는 것을 말한다. 몸은 크게 한정 짓는 것을 말하고, 이는 몸을 주제로 함을 말한다. 그 다음 부터는 세부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마치 총론이 있고 각론이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옷을 입을 때, 대소변을 볼 때 올바로 알아차림하라고 말한다.

 

사띠는 크게 한정 짓는 것이고 삼빠쟌나는 작게 범위를 정하는 것과 같다. 이는 마치 전체적인 그림을 보고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일상에서 사띠는 명상주제를 잊지 않는 것과 같다고 본다. 마치 화두를 드는 것과 같을 것이다.

 

화두 중에 이뭐꼬 화두가 있다. 이에 대하여 어느 법우님은 간화선에서는 바로 하나 전 찰나를 기억하는것이 아니라 바로 전 찰나를 기억하는그 놈, 그 주인공을 찾습니다. ‘이뭐꼬?’하면서 찾습니다. 이뭐꼬?, 내가 무엇인고?를 하다보면 들끓던 망상이 점점 줄어들고 의심이 커지면서 그 의심위에서 밥먹고, 일하고, 공부하고 , 똥누고 합니다. 단순,간단합니다. 이뭐꼬?”라고 댓글을 달아 주셨다.

 

화두는 주인공을 찾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본래 부처인 것을 한시도 잊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대변을 볼 때도 이뭐꼬?’하는데, 이는 대변을 보는 이 놈은 누구인가?”라고 의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간화선에서 이뭐꼬?’하는 것은 명상주제를 놓치지 않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사념처 수행에서 있어서도 사띠는 명상주제를 놓치지 않는 것과 같다. 이는 다름 아닌 가르침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는 것과 같다. 가르침을 기억해야 올바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수행만 하는 사람이 있다. 오로지 앉아만 있는 사람을 말한다. 불교인이라고 하지만 부처님 그 분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더구나 부처님 그 분이 어떤 말을 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저 앉아만 있으면 깨달을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오로지 교학만 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수행을 하지 않는다. 오로지 경전의 말씀만 가치가 있다고 여겨서 한평생 문자에만 매달려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는는 인간을 초월하는 심오한 경지를 모를 것이다.

 

교학과 수행은 함께 가야 한다. 새가 한쪽 날개로만 날 수 없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수행자라면 가르침과 수행을 양날개로 해서 가야 한다. 그래서 가르침은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가르침을 잘 기억해야 수행도 잘 할 수 있다. 가르침을 잘 기억해야 잘 알아차림 할 수 있다.

 

알아차림 하면 네 가지 이점이 있는데

 

수행은 수행처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행선과 좌선하는 것만 수행이 아니다. 수행은 일상에서도 해야 한다. 어떻게 일상에서도 수행할 수 있는 것일까? 이는 마치 운전하듯이 일상에서도 사띠를 놓치지 않음을 말한다. 사띠를 놓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이는 명상주제를 잃지 않음을 말한다. 이것은 일상에서 올바로 알아차림으로 나타난다.

 

일상에서 올바로 알아차림 한다는 것은 명상주제를 놓치지 않음을 말한다. 이는 명상주제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몸에서 몸을 관찰한다고 했을 때 몸은 사띠에 대한 것이고 관찰은 삼빠쟌나에 대한 것이다.

 

삼빠쟌나는 명상주제에 대한 관찰을 의미한다. 그래서 대소변을 볼 때도 대변보고 소변보는 것에 대하여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라고 했고, 밥 먹을 때도 먹고 마시고 소화시키고 맛보는 것에 대하여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라고 했다. 이렇게 명상주제를 잘 관찰하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이점이 있다.

 

첫째는 목표를 올바로 알아차림(sātthaka sampajañña)’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의도한 행위가 가치가 있고 이익됨을 올바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적당한 수단을 올바로 알아차림(sappāya sampajañña)’하는 것이다. 이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적당한 수단에 대한 올바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행경을 올바로 알아차림(gocara sampajañña)’이다. 이는 명상주제에 대하여 올바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넷째는 미혹함 없이 올바로 알아차림(asammoha sampajañña)’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행위에 있어서 실체적 자아가 없음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 새김의 경’(S47.2)에 실려 있는 주석(Srp.III.182)을 옮겨 본 것이다. 주석을 보면 일상사띠에 대한 이점을 설명한 것처럼 보인다. 이는 올바른 알아차림(sampajañña)’이라는 말로 알 수 있다.

 

행경을 올바로 알아차린다는 것은

 

행선과 좌선과 달리 일상에서는 알아차림해야 한다. 행선과 좌선에서는 한찰나도 놓칠 수 없어서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래서꿰뚫어 본다는 뜻을 가진 빠자나띠(pajānāti)’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는 호흡에서 길게 숨을 들이쉴 때는 나는 길게 숨을 들이쉰다고 분명히 안다.”(D22.2)라는 정형구로 알 수 있다.

 

호흡관찰(ānāpānasati)에서 분명히 안다는 것은 빠자나띠에 대한 번역이다. 이는 한순간, 한찰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일상에서 사띠에서는 명상주제를 놓치지 않겠다는 말로 볼 수 있다. 마치 운전자가 시야를 놓치지 않는 것과 같다.

 

운전자는 운전하면서 라디오도 듣고 말도 한다. 그러나 시야는 놓치지 않는다. 일상사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상에서 세수를 하고, 밥을 먹고, 옷을 입고, 대소변을 보지만 명상주제를 잊지 않고 있다면 이는 일상사띠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주석에서는 행경을 올바로 알아차림(gocara sampajañña)’으로 설명하고 있다.

 

행경을 올바로 알아차린다는 것은 명상주제를 잊지 않음을 말한다. 일상에서 일상사를 보지만 명상주제를 잊지 않고 있다면 이는 일상에서 사띠가 끊어지지 않고 있음을 말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가르침에 대한 기억이다. 그런데 행경이 깨질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언어와 관련이 있다.

 

고귀한 침묵에 대하여

 

부처님은 잡담하지 말라고 했다. 잡담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부처님은 놀랍게도 잡담에 대하여 왕에 대한 이야기, 도적에 대한 이야기, 대신들에 대한 이야기, 군사에 대한 이야기, 공포에 대한 이야기, 전쟁에 대한 이야기, 음식에 대한 이야기, 음료에 대한 이야기, 의복에 대한 이야기, 침대에 대한 이야기, 꽃다발에 대한 이야기, 향료에 대한 이야기, 친척에 대한 이야기, 수레에 대한 이야기, 마을에 대한 이야기, 부락에 대한 이야기, 도시에 대한 이야기, 지방에 대한 이야기, 여자에 대한 이야기, 영웅에 대한 이야기, 도로에 대한 이야기, 목욕장에서의 이야기, 망령에 대한 이야기, 사소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시시비비 거리에 대한 이야기”(D9.3)가 있다고 했다. 이런 잡담은 오늘날 그대로 볼 수 있다.

 

부처님은 잡담을 금했다. 그러나 법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장려했다. 부처님은 법담 이외에는 침묵할 것을 말씀했다. 그래서 법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고귀한 침묵을 지키는 일이다. (M26)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입을 닫고 말하지 않는 것이 침묵일까? 누군가 묵언수행한다고 했을 때 단지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침묵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명상주제와 관련이 있다.

 

명상주제를 가지고 있으면 말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는 고귀한 침묵을 하기 때문이다. 고귀한 침묵에 대한 주석을 보면 두 번째 선정과 근본적인 명상주제가 모두 이 고귀한 침묵에 해당된다. 두 번째 선정을 성취할 수 없는 자들에게 근본적인 명상의 토대를 닦게 함으로써 고귀한 침묵을 유도한다." (Pps.II.169)라고 설명되어 있다.

 

일상사띠에서는 항상 명상주제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사십가지 사마타명상주제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불수념, 법수념, 승수념, 사수념 같은 것이다. 사십가지 명상주제 중에 한가지를 선택하여 사띠했을 때 이는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 된다. 모든 수행은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왜 말하지 말라고 했을까?

 

일상에서 명상주제를 잊지 않는다는 것은 일상에서 사띠가 유지됨을 말한다. 그렇게 하려면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말하는 순간 사띠가 깨질 것이다. 그래서 고귀한 침묵이라고 했을 것이다.

 

일상에서 사띠가 깨진다는 것은 어떤 경우를 말할까? 최근 혜송스님의 미얀마 수행기에서 본 것이 있다. 밴드 '삿담마마마까'에 올려져 있는 22회 수행기를 보면 인정이 농후하면 도심을 장애한다’(2020-09-10)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두 가지 타입의 선원봉사자에 대하여 설명했다.

 

첫번째 타입의 선원봉사자는 수행이 깊은 봉사자를 말한다. 수행을 해본 경험이 있는 봉사는 행주좌와에 싸띠하는 수행자를 보면 마음속으로 매주 존중하나 수행자의 싸띠를 깨지 않도록 못 본 척 배려한다.”라고 했다.

 

두번째 타입의 선원봉사자는 수행을 깊이 체험해 보지 못한 봉사자를 말한다. 수행경험이 없이 신심만 있는 봉사자에 대하여 정말 개인적이다. 뭐라도 한개 올리고 청소라도 해주고 자신의 복을 짓고 싶은 봉사자.”라고 했다. 그래서 자기 먹으려고 들고 있던 바나나 한개를 보시하는가 하면, 숙소에까지 와서 과일을 선물한다.”라고 했다.

 

 

두번째 타입의 봉사자를 만나면 사띠가 깨질 것이다.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는 순간 분별하게 되어 고귀한 침묵이 깨지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명상주제를 잊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혜송스님은 일상에서 사띠가 깨지는 것에 대하여 봉사자의 과잉친절도 해당된다고 했다. 봉사자가 숙소에 찾아와서 과일을 보시했을 때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 하는데 미얀마어든 영어든 소통이 잘 안 되니 결국 생각하면 수행에 장애다.”라고 했다.

 

말을 건다는 것은 수행에 장애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이 어린 사얄리(여성출가자)들이 보낸 영문편지에 예의상 답장했다가 수행에 장애 받는다.”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글을 쓰는 것도 언어적 행위이다. 그래서 무지한 봉사자에 대하여 싸띠를 생각하면 한개의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수행처에서는 말을 하지 않는다. 아무 생각없이 입 닫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명상주제를 정하여 명상주제를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만일 말을 한다면 그 순간 명상주제를 잊어버릴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사띠가 깨진다고 말한다. 그래서 혜송스님은 수행할 때는 자기 할 일만 잘 하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이다.”라고 했다.

 

실체적 자아가 없음에 대하여

 

올바른 알아차림에서 행경을 올바로 알아차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이는 미혹함 없이 올바로 알아차림(asammoha sampajañña)’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복주석에서는 나아감과 물러감 등에 대하여 미혹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행주좌와어묵동정간에 실체적 자아가 있다고 보지 말라는 것이다.

 

실체적 자아가 없다고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온에 대하여 정신-물질 작용인 것을 알아야 한다. 이는 하나하나 사실로 관찰할 때는 궁극적 의미로는 내가 있다.’라든가 나이다.’라는 집착의 토대가 되는 뭇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는 오직 명색만 있을 뿐이다.”(Vism.18.28)라는 가르침에서도 알 수 있다.

 

가르침에 대한 기억을 토대로 하여 올바로 알아차림 했을 때 오로지 정신-물질적 과정만 있게 됨을 알게 된다. 이는 행선과 좌선수행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상에서는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일상에서 사띠한다는 것은 명상주제를 놓치지 않음을 말한다. 항상 사띠가 끊어지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앉거나 서거나 옷을 입거나 대소변을 보거나 올바로 알아차려야 하는데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물질 작용으로 알고 보는 것이다.

 

알아차린다는 것이 단지 행위를 알아차리는 것 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명상주제를 잊지 않는 것도 알아차림이고, 행위의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도 알아차림에 해당된다. 그래서 올바른 알아차림에 대하여 단지 그에게 순수한 앎과 순수한 새김이 있는 정도만큼 몸이 있다.’라는 새김이 이루어진다.”(D22.6)라고 했다.

 

어디에도 나는 없다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오온이 가는 것이고, 내가 서는 것이 아니라 오온이 서는 것이다. 밥을 먹는 것도 오온이 먹는 것이고, 옷을 입는 것도 오온이 입는 것이고, 대소변을 보는 것도 오온이 보는 것이다. 어디에도 나는 없다. 있다면 정신-물질 작용만 있는 것이다.

 

 

실제로는 여기 명과 색뿐이다.

여기에 뭇삶도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만들어진 꼭두각시처럼, 이것은 텅 빈 것()이다.

괴로움의 다발일 뿐, 풀과 나뭇등걸 같다.”(Vism.18.31)

 

 

2020-09-2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