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해탈의 맛은 왜 모두 한 맛일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0. 9. 13. 12:30

 

해탈의 맛은 왜 모두 한 맛일까?

 

 

! 자유! 정말로 나는 완전히 벗어났다.” 이 말은 뭇따장로니가 한 말이다. 장로니는 세 가지 굽은 것에서 벗어 났다고 했다. 그것은 절구, 절구공이, 그리고 마음이 비뚤어진 남편이라고 했다.

 

한 번역서만 보아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또 다른 번역서를 참고해야 정확히 알 수 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 회장은 세 가지 굽은 것으로부터, 절구로부터 공이로부터 그리고 곱사등이 남편으로부터 벗어나 잘 해탈되었고 훌륭하게 해탈되었다.”(Thig.11)라고 번역했다.

 

번역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다. 앞서 일아스님은 마음이 비뚤어진 남편이라고 번역했으나 전재성회장은 곱사등이 남편이라고 번역했다.

 

빠알리 원문을 찾아보았다. 찾아보니 “patina khujjakena”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khujja’‘humpbacked (person)’의 뜻으로 등이 굽은 사람, 즉 곱사등이 또는 꼽추를 말한다. 전재성회장은 빠알리원문에 충실하여 번역했다. 그러나 일아스님은 의역해서 번역했다.

 

세 가지 굽은 것은 힘겨운 재가의 삶을 상징한다. 테리가타 주석에 따르면, 이는 절구통에 곡식을 넣을 때도 등을 구부려야 하고, 공이로 빻을 때도 등을 굽혀야 하고, 구부려야 하기 때문에 그 두가지를 굽은 것이라고 하고, 남편도 곱추이므로 세 번째로 굽은 것이라고 한 것이다.”(ThigA.13)라고 했다.

 

테라가타에도 위와 유사한 게송이 있다. 쑤망갈라 장로가 읊은 게송을 보면 잘 해탈했다. 아주 잘 해탈했다. 세 가지 굽은 것에서 잘 해탈했다.”라고 했다. 그 세 가지는 어떤 것일까? 이는 낫에서 잘 해탈하고, 쟁기에서 잘 해탈하고, 괭이에서 나는 아주 잘 해탈했다.”(Thag.43)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 쟁기, 괭이는 농기구이다. 공통적으로 굽은 것이다. 그리고 재가의 삶을 상징한다. 이러한 농기구에서 벗어난 삶에 대하여 잘 해탈했다.”라고 했다. 전재성 회장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아마도 낫, 쟁기, 괭이는 각각 굽어진 신체적 행위, 굽어진 언어적 행위, 굽어진 정신적 행위를 상징한다고 보아야 한다.”(테라가타, 271번 각주)라고 각주에서 설명해 놓았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한 삶

 

사람들은 자유를 갈망한다. 억압되고 속박되어 있을수록 자유에 대한 갈망은 강렬하다. 노동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것도 자유에 대한 갈망이다. 힘겨운 재가의 삶으로부터 해방되는 것도 자유에 대한 갈망이다.

 

출가한다고 하여 자유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절에서 산다고 하여 모두 다 깨닫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옭아 매고 있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진정한 자유인이 된다. 그래서 부처님 제자들은 이렇게 해탈을 노래했다.

 

 

세 가지 굽은 것으로부터,

절구로부터 공이로부터 그리고 곱사등이 남편으로부터 벗어나

잘 해탈되었고 훌륭하게 해탈되었다.

생사로부터 해탈되었으니

나에게 존재의 통로는 제거되었다.”(Thig.11)

 

잘 해탈했다. 아주 잘 해탈했다.

세 가지 굽은 것에서 잘 해탈했다.

낫에서 잘 해탈하고, 쟁기에서 잘 해탈하고,

괭이에서 나는 아주 잘 해탈했다.

여기저기에 있을지라도,

충분히 있을지라도,

쑤망갈라여, 선정에 들어야 하리.

선정에 들라. 쑤망갈라여, 방일하지 말라.”(Thig.43)

 

 

쑤망갈라 장로는 자신에게 쑤망갈라여, 선정에 들어야 하리.”라고 말했다. 여기서 선정으로 번역한 말은 자야(jhaya)이다. 자야는 동사의 형태로 ‘jhāyati’라고 하는데 이는 ‘meditates’ 또는 ‘contemplates’의 뜻이다. 대상에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대상에 집중하면 잡념이 없어지고 번뇌가 사라진다. 이런 상태를 지금 여기에서 행복한 삶이라고 한다. 한자어로는 현법락주(現法樂柱)’라고 하고 빠알리어로는 딧타담마수카비하라 (diṭṭhadhammasukhavigāra)’라고 한다.

 

백가지 맛 보다도

 

지금 여기서 행복을 바라거든 멈추어야 한다. 멈추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보아야 한다.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하여 집중했을 때 마음이 고요해진다. 번뇌로 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래서 명상하는 것에 대하여 지금 여기서 행복한 삶 (diṭṭhadhammasukhavigāra)’이라 했을 것이다. 그것은 해탈의 맛과 관련이 있다.

 

 

오늘 내가 맛본 것은

백 가지 맛의 청정한 음식으로도 생각지 못한 것이니,

앎과 봄이 한량없으신,

고따마 부처님께서 설한 가르침이다.”(Thag.91)

 

 

자유의 맛, 해탈의 맛은 어떤 것일까? 빠리뿐나까 장로에 따르면 백 가지 맛을 지닌 음식과 비교할 바 아니라고 했다. 빠리뿐나까 장로가 맛본 것은 멸진정이다. 주석에 따르면 오늘 지금, 멸진정의 성취를 통해서, 경지의 성취를 통해서 궁극적인 적멸, 승묘, 열반의 지복을 맛본 것을 말한다.”(ThagA.I.201)라고 했다. 이를 해탈의 맛이라 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먹는 것을 즐긴다. 몇시간에 걸쳐 온갖 정성들인 음식을 만든다. 마치 예술작품 같은 음식을 만들어 놓고 그냥 먹기가 아까워서일까 사진으로 남겨 놓는다. 실시간으로 소통되는 에스엔에스에 올려 놓기도 한다.

 

예술품 같은 음식도 목구멍을 넘어 가는 순간 끝이다. 눈과 코와 혀 등 오감으로 음식을 먹지만 목구멍을 넘기는 순간 허무하게 사라진다. 피고 되고 살이 되겠지만 결국 똥이 되어서 나온다. 목구멍을 넘기는 순간을 위해서 목숨을 거는 것 같다. 즐거운 느낌을 위하여 돈과 시간과 정력을 아끼지 않는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목숨을 거는 것과 같다.

 

한가지 음식은 한가지 맛 밖에 나지 않는다. 지난 겨울 편의점에서 군고구마를 팔았다. 군고구마 세 개를 사서 점심을 먹었다. 달달한 것이 맛은 있었지만 금방 물리고 말았다. 김치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한가지 음식은 한가지 맛만 나온다.

 

지난 봄 친구 모친상이 목포에서 있었다. 그때 음식으로 홍어가 나왔다. 홍어 가는 곳에 따라 가는 것이 있다. 수육과 묵은지를 말한다. 이른바 삼합을 하면 오묘한 맛을 느낀다. 입에서 세 가지 맛을 느끼는 것이다.

 

열 가지 재료로 음식을 만들면 열 가지 맛이 날 것이다. 백 가지 음식으로 만든다면 백 가지 맛이 날 것이다. 그러나 해탈의 맛보다는 못하다고 했다. 그래서 어리석은 일반사람이 즐기는, 자양 있는, 오염에 기초한 음식은 고귀한 님들이 즐기는 자양없는, 오염에 기초하지 않은 음식에 비해 16분의 1의 가치에도 미치지 못한다.”(ThagA.I.201)라고 했다.

 

해탈의 맛이 있다. 이를 위뭇띠라사(vimuttirasa)라고 한다. 해탈의 맛과 관련하여 빠하라다여, 또한 커다란 바다가 유일한 맛인 짠 맛을 지니고 있듯, 빠하라다여, 이와 같이 이 가르침과 계율은 유일한 맛인 해탈의 맛을 지니고 있습니다.”(A8.19)라고 했다.

 

각각 맛이 있다. 바다는 짠 맛이 특징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과 계율에도 맛이 있다고 했다. 이를 해탈의 맛이라고 한다. 해탈의 맛은 감각적 욕망의 쾌락의 맛과 비할 바가 아니다. 백가지 맛과도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감각적 욕망에 목숨을 건다.

 

해탈의 맛에 대하여

 

뭇따 장로니는 ! 자유! 정말로 나는 완전히 벗어났다.”라고 했다. 일아스님이 번역한 것이다. 이 문구는 “samuttā sādhu muttāmhi”(Thig.11)를 번역한 것이다. 전재성회장은 잘 해탈되었고 훌륭하게 해탈되었다.”라고 번역되었다. 해탈을 뜻하는 ‘mutti’에 대하여 자유 또는 해탈이라고 번역했음을 알 수 있다.

 

무엇에선가 벗어나는 것이 자유이고 해탈이다. 그래서 ‘mutti’‘release; freedom’의 의미이다. 그런데 일시적 자유가 아니라 진정한 자유라는 것이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진정한 자유를 한자어로 해탈이라 해야 할 것이다.

 

모든 음식에 맛이 있듯이 해탈에도 맛이 있다고 했다. 해탈의 맛은 어떤 것일까? 해탈과 관련하여 수많은 설명이 있다. 초기불전연구원의 초기불교이해에 따르면 모두 열 가지로 설명해 놓았다. 그 중에서 열 번째 해탈에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해탈은 가장 넓게는 네 가지 과(즉 예류과 일래과 불환과 아라한과)의 증득을 뜻하기도 하고 아라한과의 증득을 뜻하기도 하고 열반을 뜻하기도 한다. 이러한 성자의 경지를 체득하지 않고서는 결코 그것을 해탈(vimutti)이라고 부르지 않는다.”(초기불교이해, 422-423)

 

 

각묵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열반체험이 있어야 사과를 증득할 수 있다고 했다. 수다원이 되려면 반드시 열반체험이 있어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네 가지 과는 한 찰나라도 열반에 들었다 나와야 한다.”라고 말하고, 이어서 이러한 열반의 체험이 없으면 그 사람을 결코 예류자부터 아라한까지의 성자라고 부르지 않는다.”라고 했다. 이는 청정도론에도 실려 있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해탈과 열반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아무튼 해탈은 한 찰나라도 열반의 체험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열반의 체험이야말로 해탈인 것이다.”(423)라고 했다.

 

해탈의 맛은 왜 모두 한 맛일까?

 

해탈에 대한 설명은 광범위하다. 이른바 팔해탈도 있어서 해탈이 반드시 열반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 자애의 마음에 의하 해탈, 즉 자심해탈도 있어서 반드시 열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해탈의 맛이라고 했을 때 이는 열반의 맛과 동의어로 쓰인다. 해탈의 맛과 관련하여 앙굿따라니까야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이 잠부디빠에 즐길 만한 정원, 즐길 만한 숲, 즐길 만한 땅, 즐길 만한 호수는 아주 적고, 반면에 가파른 절벽, 건널 수 없는 강, 줄기와 가시로 뒤덮인 정글, 험준한 산은 매우 많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의미의 맛과 원리의 맛과 해탈의 맛을 획득하는 뭇삶은 아주 적고, 반면에 의미의 맛과 원리의 맛과 해탈의 맛을 체득하지 못하는 뭇삶은 매우 많다.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의미의 맛과 원리의 맛과 해탈의 맛을 체득하리라고 배워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A1.367)

 

 

하나의 맛이 있다. 의미의 맛도 있고 원리의 맛도 있고 해탈의 맛도 있다고 했다. 이들 맛은 각각 맛이 있다. 그래서 주석에 따르면 의미의 맛은 네 가지 수행자의 경지(四果)를 말하고, 원리의 맛은 네 가지 도(四向)을 말하고, 해탈의 맛은 불사의 열반을 뜻한다.”(Mrp.II.39)라고 했다.

 

초기경전을 보면 아홉 가지 출세간법을 말한다. 이를 구분교라고 하여 사향사과와 열반을 뜻한다. 출세간의 수행자라면 누구나 추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분교의 가르침이 있을 때 정법이 살아 있다고 말한다.

 

정법이 있어야 사향사과의 성자가 출현할 수 있다. 그런데 구분교의 가르침을 보면 반드시 열반이 있다는 것이다. 수다원이 될 때도 열반을 체험해야 하고, 사다함이 될 때도, 아나함이 될 때도, 아라한이 될 때도 열반을 체험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열반 체험은 모두 동일하다는 것이다. 수다원의 열반이 다르고 아라한의 열반이 다른 것이 아님을 말한다. 모두 한 맛이다. 이를 불사의 열반(amata nibbāna)’이라 하여 해탈의 맛(vimuttirasa)이라고 했다.

 

수행하는 이유는

 

지난 98일 화요일 우실라 사야도 공양청을 한 바 있다. 점심공양하면서 사야도에게 이런 저런 질문했었다. 그 때 사야도는 고요함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불교를 종교로 갖는 것은 고요함에 이르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유의 맛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자유의 맛에 대하여 위뭇띠라싸라고 했다. 해탈의 맛을 말한다.

 

자유의 맛을 맛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번뇌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자유는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번뇌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고요함이 찾아올 것이라고 했다.

 

왜 수행을 하는가? 고요해지기 위해서 수행한다. 여섯 단계 행선을 하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발걸음은 가볍다. 어떤 이는 하늘의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마음이 집중된 상태에서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움직이면 발끝마다 연꽃이 피어나는 것 같다는 스님도 있다.

 

눈을 감고 앉아 있는다. 마음의 문 하나만 열어 두고 있지만 그것 마저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하면 단속된다. 번뇌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고요가 찾아온다. 자유의 맛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해탈의 맛일 것이다. 그렇다고 열반을 체험했다는 것은 아니다.

 

눈만 감고 있어도 자유롭고 행선만 해도 자유롭다. 하물며 해탈의 맛을 보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제자들은 테라가타와 테리가타에서 해탈의 기쁨을 노래했다.

 

 

부처님께서 설한 가르침에

흔쾌히 기뻐하는 수행승은

적정의 경지와

형성이 지멸된 지복을 얻는다.”(Thag.11)

 

내게 모든 탐욕은 버려졌고

모든 분노는 뿌리째 뽑혔고

모든 어리석음은 사라졌으니,

나는 적정에 들어 청량하다.”(Thag.79)

 

싸끼야 족에서 태어난

견줄 수 없는 깨달은 님,

그는 삿된 견해를 뛰어 넘는

가르침을 나에게 주었다.

 

괴로움, 괴로움의 발생,

괴로움의 초월,

괴로움의 지멸로 이끄는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 있다.

 

나는 그 분의 말씀을 듣고

가르침에 기뻐하며 지냈다.

세 가지 명지를 성취하였으니

깨달은 님의 교법이 나에게 실현되었다.”(Thig.192-194)

 

 

2020-09-1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