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길 위에 서고자
왜 도(道라) 했을끼? 불현듯 이런 생각이 떠 올랐다. 길 위에 있기 때문에 도라 하는 것이다. 길을 가기 때문에 도라 하는 것이다. 길 위에 있지 않거나 길을 가지 않는다면 도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부처님은 길에서 태어나 길을 갔고 길에서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만약 부처님이 길 위에 있지 않았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불교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물론 부처는 출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시기가 언제 일 지 알 수 없다. 현겁이 될지 열겁후가 될지 그 이상 무량겁이 될지 알 수 없다.
설령 현겁에 부처가 출현하더라도 정법시대에 태어나지 않는다면 가르침을 접할 수 없다. 마치 맹구우목의 비유처럼 정법 만나기가 어려운 것이다.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 부처님이 길 위에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정법시대에 살게 되었다.
부처님이 길 위에 있었다는 것은 우주적 사건이다. 부처가 출현였다는 것은 희유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맛지마니까야를 보면 보살이 입태하고 보살이 탄생한 것에 대하여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것(acchariyabbhuta)’(M123)이라고 했다.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것은 무엇일까? 우주끝까지, 오역죄를 저질러 한겁 동안 빛이 없는 ‘사이지옥’이라 불리우는 로깐따리까(lokantarika) 무간지옥에 이르기까지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을 비춘 사건을 말한다. 동시에 일만세계가 진동한 사건을 말한다. 보살이 깨달아 정각을 이룬 순간에도 그랬고, 부처가 되어 처음 설법했을 때 꼰당냐에게서 법안이 생겨 났을 때도 그랬다. 이렇게 부처의 출현은 희유한 일이다.
부처의 출현은 출가로부터 시작되었다. 만약 태자가 세 개의 궁전에서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삶을 살았더라면 부처는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길 위에 있었기 때문에 부처가 된 것이다.
집에만 있으면 도를 이룰 수 없다. 만나야 한다. 사람을 만나서 배워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집을 뛰쳐나와야 한다. 출가하는 것이다. 랏타빨라도 그랬다.
장자의 아들 랏타빨라는 부인이 여럿 있었음에도 집을 뛰쳐나왔다. 어느 날 부처님 설법을 들은 것이 계기가 된 것이다. 집을 나와서 집없는 곳으로 간 것이다. 그곳은 다름아닌 길이다. 선재동자도 길을 떠났다. 화엄경 입법계품에 따르면 53명의 선지식을 만났다. 만나서 가르침을 청했다. 그 중에는 창녀도 있었다.
길 위에 서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한마디로 ‘만남’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길 위에 있으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밖에 없다. 만나면 대화를 하게 된다. 그 사람의 인생과 대화를 하는 것이다. 힘들지 않고 배움을 얻을 수 있다. 집에서 안락하게 살면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학작품도 길에 대한 것이 많다. 길을 가다 보고 듣고 배운 것을 문자화 했을 때 감명을 준다. 그리고 고전이 된다. 서유기, 돈키호테, 어린왕자 같은 것이다. 어느 것 하나 길 위에서 벌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집 바깥에서 일어난 것에 대한 기록이다. 이렇게 본다면 종교서적 역시 길 위에서 있었던 것을 기록한 것이 된다. 경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책을 접하는 것도 길을 가는 것이 된다. 자기계발을 하는 것도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수행은 말할 나위도 없다. 자신의 향상과 성장을 위한 것이라면 길 위에 서 있는 것과 같다.
집에만 있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밥 때가 되면 밥 먹는 것이 하루 일과 중의 가장 큰 행사가 되었을 때 사실상 죽은 목숨과 다를 바 없다. 백세 시대에 백세를 사는 노인과 다를 바 없다. 숨만 쉬고 있을 뿐이다. 삶의 목표가 없다면 좀비나 다름없다.
집 밖으로 뛰쳐나가야 한다. 길 위에 있으면 사람과 만날 수밖에 없다. 사람과 만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과 만난다는 말과 같다. 잘 경청하면 손쉽게 배울 수 있다. 집 밖으로 나가서 사람을 만나야 한다. 길 위에 서 있어야 한다. 하다못해 배낭을 메고 산에라도 가야 한다.
길 위에 답이 있다. 길 위에 갈 길이 있다. 집을 박차고 길 위에 있어야 한다. 사람을 만나면 더 좋다. 찾아 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해야 한다. 안락을 추구하거나 게으르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에스엔에스(SNS)로 소통하는 것과도 다른 것이다.
만나야 한다. 만나서 밥을 먹어야 한다.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해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친구이든 지인이든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설령 만나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만남의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만나서 차를 마시면 서로가 ‘만남 갖기를 잘 했다’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일단 집을 벗어나야 한다. 집에 있으면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용기 있는 자만이 길을 갈 수 있다. 부지런한 자만이 갈 수 있는 길이다. 도의 길로 가고자 하는 자만이 길 위에 설 수 있다. 집 바깥이면 모두 길이다. 오늘 아침도 길을 나선다. 오늘도 길 위에 서고자 한다.
2020-10-2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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