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는 눈물
지금은 새벽 세 시, 만상이 고요한 시간이다. 이럴 때 미얀마 선원을 떠 올려 본다. 새벽 네 시가 되면 하루 첫번째 좌선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새벽 세 시 반이 되면 종이 울린다.
대로변에 있는 고층 아파트는 고요하다. 평소 차소리로 요란하다. 이 시간에는 차도 잠들은 것 같다. 새벽 세 시는 이른 시간이다.
홀로 깨어 스마트폰 자판을 똑똑친다. 엄지 손가락 가는 대로 간다. 손가락이 뇌가 되는 것이다. 글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다.
새벽의 어둠을 사랑한다. 새벽의 고요를 좋아한다. 명상하는 것 같다. 눈과 귀가 차단되니 마음이 편안하다. 이를 다른 말로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네 가지 번뇌가 있다. 감각적 쾌락의 번뇌, 존재의 번뇌, 사견의 번뇌, 무명의 번뇌를 말한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번뇌라고 한다. 눈과 귀 등으로 오욕락을 추구하는 삶이 번뇌라는 것이다. 매혹적인 형상에 탐닉하는 것도 번뇌이고, 아름다운 음악을 듣는 것도 번뇌이다. 맛 있는 음식을 즐기는 것도 번뇌이다. 감촉을 즐기는 것도 번뇌이다. 모두 욕망과 관계된 것들이다.
욕망을 채우면 만족한다. 그러나 일시적이다. 마치 밥 먹고 나면 포만감에 만족할지 모르지만 끼니 때가 되면 허기지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불만족이다. 불만족은 괴로움이다. 그래서 모든 감각적 욕망은 괴로움이다.
존재가 번뇌라고 했다. 이렇게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번뇌라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괴로움의 덩어리라는 말이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말인지 모른다. 잠시도 가만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늙고 병드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생, 노, 병, 사가 괴로움이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태어남과 죽음이 괴로움인지 모른다. 태어남을 기억하거나 죽음을 경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노와 병이 괴로운 것은 확실하다.
견해도 번뇌라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견해는 연기법에 어긋나는 것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을 들 수 있다. 유일신을 믿는 영원주의적 종교는 상견에 해당되므로 번뇌가 된다. 허무주의, 숙명론, 우연론 등 갖가지 견해는 번뇌를 야기한다.
무명을 왜 번뇌라고 했을까? 알지 못하는 것, 모르는 것을 번뇌라 한 것이다. 무엇을 모른다는 것일까? 당연히 부처님 가르침을 모르는 것이다. 가르침이 잘 설해져 있음에도 있는 줄조차 모른다. 어두운 밤에 길을 잃고 헤매는 것과 같다. 내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번뇌가 일어난다.
나는 누구일까? 수많은 사람들이 묻는 것이다. 이렇게 보고 듣고 말하는 ‘이놈은 누구일까?’라며 의문하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줄만 안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감각적 쾌락의 번뇌도 존재의 번뇌도 견해의 번뇌도 자동으로 풀린다. 나는 누구일까?
거울에 비친 얼굴이 나일까? 소년의 얼굴은 어디로 갔을까? 이걸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아이엠 낫 왓아이 워즈.(I am not what I was)”라고 말할 수 있다. 중학교 때 영어시간에 배운 것이다. 지금까지 기억하는 것은 “나는 옛날의 내가 아니다.”라는 해석이 너무나 멋들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옛날의 내가 아니다. 참으로 심오한 말이다. 중학교 2학년짜리가 이런 심오한 말의 깊은 뜻을 알 리가 없었다. 다만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다.”라는 뜻 정도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 말이 진리라는 것이다. 연기법을 접하고 알았다.
연기법은 조건발생법이다. 이는 빠띳짜사뭅빠다(paṭiccasamuppāda)라는 말 자체에 설명이 있다. 조건에 따라(paṭicca) 함께 발생하는(samuppāda) 것이다. 십이연기가 대표적이다.
십이연기의 순환고리를 보면 내가 있을 수 없다. 있다면 조건발생하는 내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무아(無我)이다.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내가 아니다. 그럼에도 연결고리가 있기 때문에 나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이 몸을 나라고 말한다. 생각하는 것도 내가 생각하는 것이라고 한다. 욕망도 성냄도 내가 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이 몸을 나의 몸이라고 하듯이, 생각도 나의 생각이 되고 심지어 욕망도 나의 욕망이고 성냄도 나의 성냄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몸과 생각, 욕망, 성냄을 자아와 동일시한다. 이는 오온을 자아로 보는 것과 같다. 색, 수, 상, 행, 식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것이 유신견이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내것이라고 보는 견해를 말한다.
가르침에 따르면 이 몸은 내것이 아니다. 이 몸이 내 것이라면 내 마음대로 해야 한다. 그러나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모습을 보면 소년의 얼굴이 아니다. 이 몸이 내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내뜻대로 되지 않으면 내것이 아니다. 나의 통제 밖에 있으면 내것이 아니다. 몸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다. 특히 마음이 그렇다. 내마음이라 하지만 내뜻대로 되지 않으면 내마음이라 할 수 없다.
몸도 마음도 내것이 아니다. 있다면 시시각각 조건발생하는 내가 있을 뿐이다. 어느 것이 나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무아라고 한다.
이것을 내것이라 하여 꽉 움켜 쥐고 있으면 번뇌가 일어난다. 탐, 진, 치가 대표적이다. 탐욕도 나의 것이 되고, 성냄도 나의 것이 되어서 괴롭다. 욕망과 성냄은 단지 조건발생한 것임에도 이를 자아와 동일시했을 때 괴로움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연기가 회전되면 반드시 절망에 이르기 때문이다.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이는 어느 것에도 갈애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집착은 갈애가 더욱 더 강화되어 떨어지지 않는 상태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느낌단계에서 알아차리라고 말한다. 대상과 접촉하여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단지 “즐겁네.”라고 알아차려야 함을 말한다.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서 화가 났다면 “아, 나에게 분노가 일어났구나.”라며 조건발생에 따른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욕망이나 분노는 허망한 것이다. 마치 회오리바람과도 같은 것이다. 단지 스쳐 지나가는 바람과도 같은 것이다. 지나고 나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요하게 된다. 그럼에도 욕망이나 분노의 격정에 휘말린다. 그때마다 상처로 남는다.
욕망이나 분노는 오간데 없다. 남는 것은 행위밖에 없다. 행위는 과보를 유발하기 때문에 결국 절망으로 귀결된다. 이것이 보통사람들이 사는 삶의 방식이다.
케이블채널에서 영화 ‘그린북(Green Book, 2018)’을 보았다. 그린북이란 1960년대 미국에서 흑인을 위한 여행안내서를 말한다. 백인기사와 함께 여행하는 유명 흑인이 겪는 인종차별에 대한 것이다.
주인공 흑인은 백인 경찰로부터 갖은 모욕을 당하지만 인내한다. 이는 자존심 상한다고 하여 분노가 폭발한 백인운전사와 대조적인 모습이다. 흑인으로 살면서 참고 인내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그런 모습이 마치 성자처럼 보였다. 반면 개인적 감정을 표출하는 백인 운전사의 모습에서 탐, 진, 치로 살아 가는 범부의 모습을 보았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탐, 진, 치를 가졌다. 탐, 진, 치를 잠재성향으로 하여 태어났음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탐, 진, 치는 타고난 것이 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은 본래부터 불선한 존재로 태어 났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성악설적 존재임을 강력히 뒷받침하는 말이다.
탐, 진, 치를 잠재성향으로 태어난 존재는 탐, 진, 치로 살아간다. 거의 대부분 존재가 그렇다. 그러나 흐름을 거슬러 가는 존재도 있다. 탐, 진, 치로 사는 세상에서 무탐, 무진, 무치로 살아 가고자 하는 사람을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을 말한다.
탐, 진, 치로 살면 유아적인 삶이 된다. 반면 무탐, 무진, 무치의 삶을 살면 무아적인 삶이 된다. 오온을 나의 것, 나, 나의 자아라고 여기면 탐, 진, 치의 삶이 되어 괴로움과 함께 결국 절망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겨 무탐, 무진, 무치의 무아적 삶을 살게 되면 지유롭게 산다.
번뇌를 아사와(āsava)라고 한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줄줄 샌다’라는 의미이다. 어원이 같은 말로 눈물을 뜻하는 앗수(assu)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번뇌는 눈물을 뜻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서 “번뇌는 눈물이다.”라고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
네 가지 번뇌, 즉 감각적쾌락의 번뇌, 존재의 번뇌, 견해의 번뇌, 무명의 번뇌는 결국 자아에 기반한 것이다.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 나, 나의 자아라고 집착하는 한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결국 눈물을 흘리게 되어 있다. 자아에 기반한 삶은 탐, 진, 치의 삶이 되기 때문에 연기가 회전하면 절망에 이르게 된다.
사람들은 절망의 길로 가고 있다. 결국 늙고 병들어 죽음에 이르렀을 때 절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아의 삶을 살면 절망에 이르지 않는다. 연기를 거꾸로 회전시키면 무명이 타파된다. 무아의 삶을 사는 것이다. 무탐, 무진, 무치의 삶을 사는 것이다.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다. 불사의 삶을 살게 된다. 번뇌에서 해방되어 대자유인이 된다. 새벽처럼 항상 고요한 삶이다.
스마트폰을 똑똑 치다 보니 날이 밝아 온다. 나는 오늘도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경계에 부딪쳤을 때 알아차림으로 제압할 수 있을까? 분명한 사실은 갖가지 경계속에서 성장한다는 것이다. 때로 처참하게 깨지기도 하지만 가르침이 있어서 힘이 된다. 가르침이 없다면 이 험난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2020-10-2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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