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도무지 멈출 줄 몰라서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0. 24. 09:05

도무지 멈출 줄 몰라서

 

 

모든 것은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이를 한자어로 생멸(生滅)이라 할 것이다. 생겨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꼰단냐가 부처님 설법을 듣고 깨달은 것이다. 이것은 우주적 사건이 되었다.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측량할 수 없는 빛이 우주 끝까지 이루고 일만세계가 진동했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꼰단냐에게 법안(法眼)이 생겨났다.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새로 생겨난 담마짝쿠(Dhammacakkhu), 진리의 눈을 말한다. 생멸의 지혜가 생겨난 것이다. 진리의 흐름에 든 것이다. 그래서 양 낀찌 사무다야담망 삽반땅 니로다담만띠. (ya kiñci samudayadhamma sabbanta nirodhadhammanti)”(S56.11)에 대하여 수다원의 오도송이라고 한다.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하기 마련이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움직이고 있다. 명상한다고 멈추어 보지만 생각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일어난 것은 그대로 있지 않다. 이내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일어난다.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간난아기가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 것과 같다. 원숭이가 끊임없이 눈을 두리번 거리는 것과 같다. 생명 있는 것들은 멈춤이 없다. 죽어서나 멈출 것이다.

 

그대는 멈추어라.” 부처님이 앙굴리말라에게 한 말이다. 연쇄살인자 앙굴리말라는 부처님 마저 살해하려고 했다. 먼저 어머니마저 살해하고자 했다. 부처님은 어머니살해라는 무간죄를 막기 위해 앙굴리말라 앞에 나타난 것이다.

 

앙굴리말라는 부처님을 살해할 수 없었다. 부처님이 신통으로 앙굴리말라의 다리를 묶어 놓은 것이다. 앙굴리말라가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에서 런닝머신하는 것처럼 해 놓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앙굴리말라여,

나는 언제나 일체의 살아있는

존재에 폭력을 멈추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살아있는 생명에 자제함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멈추었고

그대는 멈추지 않았다.”(M86)

 

 

성자들은 멈출 줄 안다. 그러나 범부들은 멈춤이 없다. 성자들은 생겨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멈출 수 있다. 그래서 자제할 수 있다.

 

생겨난 것은 회오리바람과도 같은 것이다. 지나고 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평온하다. 사건은 오간데 없고 행위만 남는다.

 

행위에는 과보가 따른다. 이를 업력(業力)이라 할 것이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기 마련이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행위한 것은 과보를 산출하게 되어 있다. 한순간 마음이 일어나서 행위를 했다면 반드시 과보가 따른다. 욕을 하면 욕설을 듣는 것과 같다.

 

욕한 행위는 온데간데없지만 욕을 했다라는 업만은 남는다. 이는 미래 과보를 초래할 원인이 된다. 즉각적으로 나타날지 먼 훗날 나타날지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의도가 있어서 행위가 있었다는 것이다.

 

앙굴리말라는 잘못된 신념을 가졌다. 그 결과 수많은 살생업을 지었다. 누구도 막지 못했다. 왕도 두려워할 정도였다. 부처님만 막을 수 있었다.

 

부처님은 신통으로 앙굴리말라를 제압했다. 앙굴리말라의 발을 런닝머신에서 달리기 하듯이 묶어 놓고 멈추라고 했다. 더 이상 업을 짓지 말라는 것이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업을 짓지 말라는 것이다. 자제해야 함을 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일단 멈추어야 한다.

 

멈추어서 보면 보인다. 멈추어서 자신의 행위를 관찰하면 일어나고 사라짐만 있는 것을 알게 된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동시에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이는 행선을 해 보면 알 수 있다.

 

발을 들려는 의도가 일어난다. 이때 의도를 아는 마음도 일어난다. 의도와 의도를 아는 마음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의도를 조건으로 발을 든다. 이때 발을 드는 행위와 이를 아는 마음이 일어난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어느 것 하나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동시에 일어났다가 동시에 사라진다. 일어날 때는 일어날만 해서 일어난다. 그래서 조건발생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라질 때는 그냥 사라질 뿐이다. 조건소멸이 아니다. 생겨난 것에는 조건이 있지만 사라지는 것에는 조건이 없다. 손뼉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손뼉소리는 두 손을 마주하여 부딪쳐야 소리가 난다. 먼저 손뼉 치려는 의도가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손뼉치는 행위를 한다. 동시에 이를 알아차리는 마음도 있다. 이렇게 손뼉소리가 나는 데는 조건이 있다. 그러나 손뼉소리가 사라지는 데는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냥 사라질 뿐이다. 한번 일어난 것은 사리질 뿐이다. 사라지는 데는 이유가 없는 것이다.

 

손뼉치는 소리는 매우 짧다. 이는 소리가 머무는 시간이 매우 짧음을 말한다. 모든 것이 그렇다. 일어난 것은 매우 짧게 머물다가 사라진다. 그런데 짧은 기간에도 무수한 생멸이 있다는 것이다. 마치 오실로스코프로 시간을 분할해서 보는 것과 같다.

 

전자제품을 개발할 때 오실로스코프는 스펙트럼아날라이져와 함께 필수장비에 속한다. 주로 시간을 분할하여 주파수를 측정할 때 사용한다. 예를 들어 1초를 백번 쪼개면 보이지 않던 주파수가 보인다. 그것은 사인파의 형태로 되어 있다. 높낮이가 있어서 사건의 생멸을 보는 듯하다.

 

 

사인파의 꼭지점을 보면 짧다. 일어난 것들은 짧게 머물다가 사라진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생겨날 때는 조건발생하지만 짧게 머물다가 즉시 사라진다. 그래서 생멸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머무는 기간은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를 법구경에서는 송곳끝에 있는 겨자씨와 같다’(Dhp.401)고 했다.

 

머무는 것이 없이 일어나자 마자 사라진다. 어떤 움직임도 일어나자 마자 사라진다. 움직임 속의 움직임도 자세히 보면 생멸만 있을 뿐이다. 스코프로 시간을 확장해서 사인파를 보는 것과 같다.

 

일어나자 마자 사라지기 때문에 무상이다. 찰나에 생겨나서 찰나에 사라짐만 있을 뿐 머묾이 없다. 머물지 않아서 불만이다. 머물지 않아서 실체가 없다. 오로지 생멸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꼰단냐가 머묾을 생략하고 생멸만 이야기했을 것이다. 손뼉치는 것처럼 조건발생하여 즉시 소멸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조건발생할 뿐이다. 생멸의 지혜가 생겨 났을 때 더 이상 폭주하는 삶을 살지 않을 것이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이다.

 

인간이 축생과 다른 점이 있다면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이다.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면 축생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부끄러워할 줄 안다는 것은 자제로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다름아닌 멈출 줄 아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은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생명체가 꿈틀대어 보지만 하나의 사건에 불과하다. 마치 동화상을 보다가 정지화상을 보는 것과 같다. 한바탕 신나게 노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다. 시간이 되면 텅 비게 된다. 영화 서편제에서 청산도 돌담길 셋트장을 보는 것과 같다. 갑자기 나타난 가족이 신나게 놀다가 사라진 자리에는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고요만 남아 있을 뿐이다.

 

여기 텅 빈 운동장이 있다. 여기 텅 빈 객석이 있다. 경기는 끝났다. 환호는 온데간데없지만 기억에는 남아 있다. 생겨났다가 사라진 것이다. 그럼에도 생명 있는 것들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아기가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원숭이는 끊임없이 눈을 두리번 거린다. 참새는 끊임없이 지저귀며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날아다닌다. 도무지 멈출 줄 모른다. 멈추지 못하니 자제할 줄도 모른다. 그래서 끊임없이 업을 짓는다. 끊임없이 생멸을 반복한다.

 

 

신체적으로 자제하는 것도 훌륭하고

언어적으로 자제하는 것도 훌륭하고

정신적으로 자제하는 것도 훌륭하니,

모든 면에 자제하는 것은 훌륭하네.

어디서든 자제하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 자는

진실로 수호된 사람이라 일컬어지네.”(S3.5)

 

 

2020-10-2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