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어떤 느낌이든 그것은 괴로움 안에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1. 2. 12:06

 

어떤 느낌이든 그것은 괴로움 안에

 

 

어떤 느낌이든지 그것은 괴로움 안에 있다. 이 말은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다. 상윳따니까야 느낌의 모음’(S36)을 보면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 가지의 느낌 곧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관해 말했다. 나는 이러한 세 가지 느낌에 관하여 말했다. 그런데 나는 어떠한 것이 느껴지든 그것은 괴로움 안에 있다고 했다.”(S36.11)

 

 

느낌에는 대표적으로 낙수, 고수, 불고불낙수가 있다. 그러나 확장하면 더 많다. 경에서는 108가지 느낌이 있다고 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백여덟 가지 느낌이란 무엇인가? 서른여섯 가지 과거의 느낌, 서른여섯 가지 미래의 느낌, 서른여섯 현재의 느낌이다. 이것이 백여덟 가지 느낌이다.”(S36.22)라고 말씀한 것에서 알 수 있다.

 

108가지 느낌이 있는데

 

서른여섯 가지 느낌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여섯 가지 재가의 만족, 여섯 가지 출가의 만족, 여섯 가지 재가의 불만, 여섯 가지 출가의 불만, 여섯 가지 재가의 평정, 여섯 가지 출가의 평정이다.”(S36.22)라고 했다. 크게 만족, 불만, 평정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낙수, 고수, 불고불낙수와 같은 범주에 속한다.

 

재가나 출가나 모두 여섯 가지 만족과 불만, 평정이 있다고 했다. 여기서 여섯 가지는 무엇을 말할까? 경에 따르면 여섯 가지 느낌이란 무엇인가? 시각의 접촉에서 생겨난 느낌, 청각의 접촉에서 생겨난 느낌,..”(S36.22)이라 하여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접촉하여 발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니다. 내탓도 아니고 남탓도 아닌 것이다. 부처님은 느낌에 대하여 이들 세 가지 느낌은 접촉을 발생으로 하고 접촉을 근본으로 하고 접촉을 인연으로 하고 접촉을 조건으로 한다.”(S36.10)라고 했다. 접촉 없이 느낌이 발생될 수 없음을 말한다.

 

세 가지 느낌 중에 즐거운 느낌은 탐욕과 관련이 있고, 괴로운 느낌은 분노와 관련이 있다. 그런데 부처님은 어떠한 것이 느껴지든 그것은 괴로움 안에 있다. (ya kiñci vedayita ta dukkhasmi)”(S36.11)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탐욕도 괴로움이고 분노도 괴로움이라는 말이다. 느낌에는 108가지가 있는데 108가지 느낌 모두가 괴로움이라는 뜻이다.

 

느낌이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욕심을 내서도 안되고 분노해서도 안된다. 그럼에도 일반사람들은 좋으면 거머쥐려 하고, 싫으면 밀쳐 내려 한다. 이런 경향은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사람에 대한 호불호와 쾌불쾌가 대표적이다. 좋아하는 사람은 죽어라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죽어도싫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행위는 결국 괴로움으로 귀결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이다. 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이다.

 

조건의 조건발생임에도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늘 사띠(正念)하고 삼빠자나(正知)하면 괴로움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때를 기다려야 한다.”(S36.7)라고 말씀했다. 여기서 때를 기다린다(kāla āgameyya)’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각주를 보면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시간이 지나가야 한다.”라는 뜻이다.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방일하지 않고 성실하게 정진할 때에 즐거운 느낌이 생겨나면, 그는 이와 같이 ‘나에게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다.’라고 분명하게 안다. 그것은 조건적이지 조건 없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을 조건으로 하는가? 이 몸을 조건으로 한다. 그런데 이 몸은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며 조건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며 조건적으로 생겨난 이 몸을 원인으로 생겨난 즐거운 느낌이 어떻게 향상할 것인가? 그는 몸에 관하여 그리고 즐거운 느낌에 대하여 무상을 관찰하고 괴멸을 관찰하고 사라짐을 관찰하고 소멸을 관찰하고 버림을 관찰한다. 그는 몸에 관하여 그리고 즐거운 느낌에 대하여 무상을 관찰하고 괴멸을 관찰하고 사라짐을 관찰하고 소멸을 관찰하고 버림을 관찰하면, 몸에 관한 그리고 즐거움에 느낌에 대한 탐욕의 경향을 버리게 된다.(S36.7)

 

 

부처님은 탐욕에 대하여 조건발생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탐욕은 조건의 조건발생이라는 것이다. 몸도 조건발생인데, 그 조건발생된 느낌 역시 조건발생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조건발생은 무상한 것이다. 그럼에도 느낌에 대하여 목숨을 건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느낌의 발생과 소멸과 유혹과 위험과 여읨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한다.”(S36.6)라고 했다. 이는 배우지 못한 자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모르는 자들이 일반 배우지 못한 범부들이다. 그들은 호불호와쾌불쾌로 산다. 이런 삶을 살면 어떤 결과에 이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 속박된 자, 괴로움에 속박된 자라고 나는 부른다.”(S36.6)라고 했다. 느낌에 집착하면 그 결과는 괴로움이다. 그래서 괴로움에 속박된 자라고 했다.

 

잘 배운 부처님 제자는 느낌에 대하여 괴로운 것으로 안다. 그래서 욕망이 일어났을 때 괴로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즐거운 느낌에 대하여 무상을 관찰하고 괴멸을 관찰하고 사라짐을 관찰하고 소멸을 관찰하고 버림을 관찰하면, 몸에 관한 그리고 즐거움에 느낌에 대한 탐욕의 경향을 버리게 된다.(S36.7)라고 했다. 수행으로 힘으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파도가 그치면 고요함이

 

부처님은 어떠한 것이 느껴지든 그것은 괴로움안에 있다고 했다. 괴로운 느낌만 괴로운 것이 아니라 즐거운 느낌도 괴로움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즐거운 느낌이 오래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괴로움 안에 있다는 사실은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는 것에 관하여 말한 것이다.”(S36.11)라고 했다. 그런데 부처님은 무상이라는 말 하나만 쓴 것이 아니다. 모든 형성된 것은 파괴되고야 마는 것이고, 괴멸하고야 마는 것이고, 사라지고야 마는 것이고, 소멸하고야 마는 것이고, 변화하고야 마는 것이라고 했다.

 

변화하기 때문에 무상한 것이다. 변화하지 않는다면 즐거움은 즐거움 그 자체로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열반을 제외하고 그 어떤 것도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어떠한 것이 느껴지든 그것은 괴로움안에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느낌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욕망을 괴로움이라고 알아야 한다. 어떤 느낌이라도 발생되는 족족 사띠하며 삼빠자나 하면 괴로움이 그친다. 마치 파도가 사라지고 그치면 고요함이 찾아오는 것과 같다.

 

 

2020-11-0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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