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아버지의 영역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1. 3. 10:46

 

아버지의 영역

 

 

사띠와 삼빠자나는 항상 함께 쓰인다. 이는 수행의 관점에서 그렇다. 일상에서의 삶도 수행과 다름 없다. 반드시 좌선과 행선을 해야만 수행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사띠라 하여 일상에서도 알아차림 해야 함을 말한다.

 

정념이라 말하는 사띠와 정지라 말하는 삼빠자나는 늘 함께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을 보면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은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새김을 확립하여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한다.”(S47.17)라고 되어 있다. 이는 네 가지 관찰 중에서 몸관찰(身念處)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문구를 정형구라고 한다.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경을 보면 올바로 알아차리며 새김을 확립하여라고 되어 있다. 삼빠자나가 사띠 앞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돌 조각의 경을 보면 그러나 세존께서는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마음을 가다듬어 상처받지 않으면서 참아내셨다.”(S1.38)라고 되어 있다. 사띠가 삼빠자나 앞에 있는 것이다. 이처럼 경에서는 삼빠자나-사띠라고도 표기되고 사띠-삼빠자나라고도 표기된다. 수행관련 염처경에서는 전자이고, 일반 경에서는 후자가 많다.

 

사띠와 삼빠자나는 어떤 관계일까? 사띠에 대하여 행경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를 고짜라(gocara)라고 한다. 소가 풀을 한 곳에서 풀을 뜯어 먹듯이, 수행자가 움직일 수 있는 반경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수행승이 장시간 형상 등의 대상을 추구하여 흐트러진 마음은 호흡에 대한 새김의 삼매라는 대상을 지향하길 원하지 않고 마치 야생소가 끄는 수레처럼 잘못된 길로 치닫는다. 그러므로 또한 예를 들면, 목우자가 야생의 암소의 모든 우유를 삼키고 성장한 야생의 송아지를 제어하고자 암소에게서 떼어내어 한쪽 구석에 커다란 기둥을 박고 거기에 밧줄로 묶으면, 그 송아지가 여기저기로 날뛰어도 도망 갈 수가 없고 그 기둥에 가까이 앉거나 누울 수 있듯이, 그 수행승은 오랜 시간 형상 등의 대상의 맛에 심취한 사악한 마음을 제어하고자 형상 등의 대상에서 떼어내어 숲으로 가거나 나무 밑으로 가거나 빈집으로 가게 해서 그곳에서 호흡의 기둥에 새김의 밧줄을 묶으면, 그 마음이 여기저기로 날뛰어도 이전에 습관화된 대상을 얻을 수 없고 새김의 밧줄을 끊고 도망갈 수가 없고, 그 대상에 대하여 근접삼매와 근본삼매를 통해서 가까이 앉고 누울 수 있게 된다.”(Vism.8.153)

 

 

아나빠나사띠에 대한 것이다. 호흡새김이라고도 한다. 들숨날숨마음챙김이라고도 한다. 핵심은 호흡의 기둥에 새김의 밧줄을 묶으면라는 구절일 것이다. 미쳐 날뛰는 마음을 호흡으로 제어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호흡을 관찰해야 할 것이다.

 

호흡을 어떻게 관찰하는가? 대념처경을 보면 가부좌를 틀고 몸을 바로 세우고 얼굴 앞으로 새김을 확립하여 새김을 확립하여 숨을 들이쉬고 새김을 확립하여 숨을 내쉰다.”(D22.3)라고 되어 있다. 먼저 얼굴 앞으로 새김을 확립 하라고 했다. 이를 빠리무캉사띠(parimukha sati)라고 한다.

 

무카(mukha)라는 말은 코 또는 얼굴의 뜻이다. 여기서는 얼굴의 뜻으로 번역했다. 얼굴 앞으로 사띠를 확립하라는 것이다. 전면에서 호흡을 보라는 말과 같다. 어떻게 보는가?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길게 숨을 들이쉴 때는 나는 길게 숨을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D22.3)라 설명 되어 있다. 호흡의 전 과정을 따라가며 빠짐 없이 아는 것이 사띠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분명히 안다는 것은 빠자나띠(pajānāti)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알아차림으로 번역하는 삼빠자나와는 뜻이 다르다. 삼빠자나는 대소변 등에 대하여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지만, 빠자나띠는 알아차림 그 이상임을 말한다. 그래서 꿰뚫어 아는 것처럼 면밀히 아는 것이다.

 

사띠가 없는 마음은 야생마와도 같고 야생의 소와도 같다. 야생의 소가 이끄는 수레라면 아무곳이나 마구 달릴 것이다. 야생의 송아지 역시 천방지축 날 뛰어 다닐 것이다. 오역락의 마음도 똑같다. 마음을 제어하지 않으면 오욕락에 빠지기 쉽다. 즐거운 느낌을 찾아 끊임없이 헤매는 것이다. 그런데 즐거운 느낌은 오래 가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불만이다. 결국 오욕락은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눈과 귀 등으로 오욕락을 추구해 보지만 나중에 남는 것은 괴로움 밖에 없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감각적 대상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된다. 그래서 호흡의 기둥에 새김의 밧줄을 묶으라고 한 것이다.

 

호흡은 기둥이고 사띠는 줄이다. 기둥에 묶인 송아지는 줄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기둥을 중심으로 한 줄의 반경 이내에서 풀을 뜯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행자도 호흡이라는 기둥에 사띠의 줄을 묶어 놓아야 한다. 형상이나 소리 등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호흡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여기 송아지를 제어하고자 사람이 기둥에 묶는 것과 같이, 새김을 확립하여 대상에 자신의 마음을 단단히 묶어야 한다.”(Vism.8.154)라고 게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사띠한다는 것은 수행주제에 자신의 마음을 꽁꽁 묶어 놓는 것과 같다. 여기서 수행주제는 사마타의 경우 40가지가 있다. 호흡새김이라 불리우는 아나빠나사띠도 이에 해당된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복부의 움직임을 대상으로 삼는다. 복부의 일어남과 꺼짐을 관찰하는 것이다. 복부의 움직에 마음을 묶어 두는 것이다. 이것이 사띠이다.

 

사띠의 대상은 호흡이나 복부의 움짐임만 있는 것이 아니다. 행선의 경우 발의 움직임이 대상이 된다. 발을 들어서 올리고 나아가서 내리고 딛고 누르는 여섯 단계 행선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마음을 수행 대상에 두면 마음은 외부로 달아나지 않는다. 이는 오욕락에 빠지지 않음을 말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감각기관을 수호하는 것이다.

 

사띠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 즉 오욕락으로부터 자신을 보호 하는 것이다. 수행 주제에 마음을 묶어 놓으면, 즉 감각기관을 수호하면 마음이 형상, 소리 등 외부로 향하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행경(gocara)라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띠를 확립하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했다.

 

 

수행승들이여, 자신의 의지처, 아버지의 영역을 거닐어라. 수행승들이여, 자신의 의지처, 아버지의 영역을 거닌다면, 악마가 그 기회를 얻지 못하고 악마가 그 대상을 얻지 못한다.”(S47.6)

 

 

부처님은 자신에게 의지처를 거닐라고 했다. 또 아버지의 영역을 거닐라고 했다. 이 말은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지 남을 귀의처로 삼지 말고, 가르침을 섬으로 삼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삼지 남을 귀의처로 삼지 말라.”(S47.9)는 말과 같다. 이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영역에 들어 가지 말라는 말과 같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오욕락의 영역은 낯선 영역이다. 원하고 즐겁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자극하고 애착이 되상이 되는 영역을 말한다. 이와 같은 영역에 대하여 악마의 영역이라고 했다. 그래서 수행들이여, 그러므로 자신의 의지처가 아닌 곳, 낯선 영역을 거닐지 말라, 수행승들이여, 자신의 의지처가 아닌 낯선 영역을 거닐면 악마가 그 기회를 얻고 악마가 그 대상을 찾는다.”(S47.7)라고 했다.

 

악마의 영역에 들어가면 괴로울 것이다. 즐거움을 찾아 오욕락을 즐겨 보지만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즐거움이 아니라 단지 느낌일 뿐이다, 즐거운 느낌은 일시적이다. 모든 조건지어진 것은 무상하고 괴멸되기 마련이어서 즐거운 느낌 역시 오래 가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어떠한 것이 느껴지든 그것은 괴로움 안에 있다. (ya kiñci vedayita ta dukkhasmi)”(S36.11)라고 했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악마의 영역 안에 들어 가서는 안될 것이다.

 

부처님의 영역이 가장 안전하다. 그래서 아버지의 영역을 거닐어라.”라고 했다. 여기서 아버지의 영역은 무엇일까? 경에 따르면 그것은 바로 네 가지 새김의 토대이다.”라고 했다. 사념처가 아버지의 영역인 것이다. 가장 안전한 곳이다.

 

 

2020-11-0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