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마하시전통에서는 왜 호흡수행을 버렸을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1. 10. 20:14

 

마하시전통에서는 왜 호흡수행을 버렸을까?

 

 

그래도 옛날보다는 많이 완화되기는 했지만 경계에 부딪칠 때 산산조각 깨질 때가 있다. 아직 갈 길이 먼 것이다. 어떻게 해야 번뇌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이런 가르침을 보았다.

 

 

수행승들이여, 호흡새김에 의한 집중을 닦고 호흡새김에 의한 집중을 익히면, 고요하고 승묘한 감로의 지복에 들어, 악하고 불건전한 현상이 생겨날 때마다 즉시 사라지고 그치게 한다.”(S54.9)

 

 

참으로 아름다운 문장이다. 호흡새김, 즉 아나빠나싸띠에 대한 것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이라고 번역했다. 아나빠나싸띠상윳따(S54)에서 베쌀리의 경(Vesālīsutta)’(S54.9)에 실려 있다.

 

호흡을 관찰하면 번뇌가 일어나는 즉시 사라진다고 했다. 이를 악하고 불건전한 현상이 생겨날 때마다 즉시 사라지고 그치게 한다. (uppannuppanne ca pāpake akusale dhamme hānaso antaradhāpeti vūpasameti)”라고 한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이 일어나는 족족 즉시에 사라지게 하고 가라앉게 한다.”라고 번역했다.

 

번뇌가 일어나는 족족

 

번뇌가 일어나는 족족 사라진다면 괴로움에서 해방될 수 있음을 말한다. 번뇌는악하고 불건전한 것이고, 나쁘고 해로운 것이다. 이는 빠빠(papa)와 아꾸살라(akusala)에 대한 설명이다. 빠빠는 뿐냐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공덕이 되지 않는 악행에 대한 것이고, 아꾸살라는 꾸살라와 반대되는 것으로 불선법에 대한 것이다.

 

악행과 불선법에서 자유로우려면 번뇌가 일어나는 족족 알아차림 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는 악하고 불건전한 현상이 생겨날 때마다에 대한 설명이 있다. 여기서생겨날 때마다(ūpasameti)”에 대하여 극복되지 않을 때 마다”(Vism.8.150)의 뜻이라고 했다.

 

번뇌가 생겨난다는 것은 번뇌가 극복되지 않았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번뇌를 극복할 수 있을까? 이어지는 설명을 보면 즉시 사라지고 그치게 한다. (hānaso vūpasameti)”라고 했다. 이 문구에 대한 주석을 보면 찰나지간에 사라지게 하고 극복하게 한다.”(Vism.8.150)라는 뜻이라고 했다. 알아차리면 사라지는 것이다.

 

모든 것은 일어나고 사라진다

 

번뇌는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모든 법이 그렇다. 어느 정도일까? 청정도론 도비도지견청정(20)을보면 이런 게송이 있다.

 

 

이미 괴멸한 것은 남지 않고

미래의 축적도 없다.

현재 생겨나 존속하더라도

송곳 끝의 겨자씨와 같다.”(Vism.20.72)

 

 

이 게송은 닛데사(Nidd.I.43)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게송에 대하여 우 조띠까 사야도는 위빠사나수행지침서 마음의 지도에서 다음과 같이 바꾸어 게송으로 설명했다.

 

 

모든 것은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모든 것은 사라지고, 사라진 것이

어디로 가거나 어디에 모이지 않는 것을 압니다.

단지 사라질 뿐입니다.

일어나기 전에 그것들은 어디에 있지 않습니다.

어디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의 지도, 182)

 

 

 

법이 매우 빠른 속도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을 말한 것이다. 조건에 따라 일어난 것은 그냥 사라질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축적되지 않는다고 했다. 법이 머물지 않음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닛데사 게송에서는 송곳 끝의 겨자씨와 같다.” (Vism.20.72, Nidd.I.43)라고 했다.

 

법이 일어나는 데는 조건을 필요로 한다. 원인 없는 결과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손바닥도 부딪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그러나 손바닥 부딪치는 소리가 머무는 것은 매우 짧다. 송곳 끝에 있는 겨자씨처럼 짧은 것이다.

 

법이 사라지는 데는 이유가 없다. 조건도 없다. 그냥 사라질 뿐이다. 생겨난 것은 머물지 않고 그 즉시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 조띠까 사야도는 소리는 경험입니다. 들음은 경험입니다. 닿음은 경험입니다. 움직임은 경험입니다. 이런 모든 경험들은 지금 일어나서 지금 사라집니다.” (마음의 지도, 182-183)라고 했다.

 

우 조띠까 사야도에 따르면 수행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사야도는 수행은 순간순간의 의식, 사띠 즉 알아차림입니다.”(183)라고 했다. 수행은 사띠하는 것, 알아차림하는 것임을 말한다.

 

고요함(santi)과 승묘함(paīta)에 대하여

 

아나빠나사띠를 하면 번뇌(: dhamma)이 일어나는 즉시 사라진다고 했다. 이것처럼 좋은 말은 없을 것이다. 마치 구원의 메시지 같다. 번뇌가 일어나는 족족 그 즉시 사라진다면 괴로움에서 해방될 수 있다. 이는 호흡새김에 의한 집중을 닦고 호흡새김에 의한 집중을 익히면(ānāpānassatisamādhi bhāvito bahulīkato)”(S54.9) 가능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실천수행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아나빠나사띠하여 번뇌를 보는 족족 소멸하게 하면 어떤 상태가 될까? 이에 대하여 고요하고 승묘한 감로의 지복에 들어(santo ceva paīto ca asecanako ca sukho ca vihāro)”(S54.9) 라고 했다. 이 구절에 대한 청정도론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 ‘고요하고 승묘한이라는 것은 고요할 뿐만 아니라 승묘한 것을 뜻한다. 양자에서 뿐만 아니라라는 말을 통해 결정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부정(不淨)의 명상주제는 단지 꿰뚫음의 관점에서만 고요하고 승묘하지, 대상은 거칠고 혐오스러운 것이므로 대상의 관점에서는 고요하지 않고 승묘하지도 않다.”(Vism.8.148)

 

 

청정도론은 수행지침서이자 동시에 니까야주석서라고 볼 수 있다. 이 구절은 니까야 주석에 대한 것이다. 이는 고요함(santi)과 승묘함(paīta)에 대한 설명이다. 아나빠나사띠를 하여 번뇌가 일어나는 족족 소멸했을 때 오는 고요함과 승묘함을 말한다다.

 

부정관 하다 자결한 수행승들

 

호흡수행을 하면 고요함과 승묘함을 맛볼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청정도론에서는 부정(不淨)의 명상주제와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호흡수행과 부정관과는 다른 것임을 말한다. 어떻게 다른 것인가? 이는 혐오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부정관을 하면 썩어가는 시체를 대상으로 한다. 호흡을 대상으로 하는 것과 다르다. 시체는 혐오스런 것이다. 그래서 부정관의 대상에 대하여 거칠고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청정도론에서 아나빠나사띠를 설명하면서 뜬금없이 부정관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이는 아나빠나사띠와 부정관이 관련 있음을 말한다.

 

상윳따니까야 베살리의 경’(S54.9)을 보면 부정관에서 호흡수행으로 바뀌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있다. 부처님이 베살리 마하 숲에 계실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부처님은 수행승들이 많이 보이지 않음을 알았다. 이에 부처님은 아난다여, 왜 수행승의 무리가 감소하였는가?”라며 물어보았다. 이에 아난다는 이렇게 말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수행승의 무리를 위하여 여러가지 부정에 관한 주제를 말씀하시고 부정을 찬탄하시고 부정에 대한 수행을 찬탄하셨습니다. 그 수행승들은 세존께서는 여러가지 부정에 관한 주제를 말씀하시고 부정을 찬탄하시고 부정에 대한 수행을 찬탄하셨다.’라고 다양한 형태의 차별을 지닌 부정에 대한 수행을 닦으며 지냈습니다. 그들은 이 몸을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혐오스러워하여 자결하려 했습니다. 하루에 열 명의 수행승이 자결하고 하루에 스무 명의 수행승이 자결하고 하루에 서른 명의 수행승이 자결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수행승의 무리가 궁극적인 앎을 얻도록 다른 방편을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S54.9)

 

 

사마타수행에서 40가지 명상주제가 있다. 그 중에 10가지는 부정관에 대한 것이다. 이는 시체에 관한 명상을 말한다. 그래서 팽창상, 청어상, 농란상, 단괴상, 식잔상, 산란상, 참작이산상, 혈도상, 충취상, 해골상이 있다. 수행승들은 이와 같은 시체명상을 하다가 자신의 몸에 혐오를 일으켜 자결하고 만 것이다.

 

주석을 보면 부처님은 이와 같은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있기를 거부하여 홀로 칩거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왜 이렇게 말했는가? 예전에 오백명의 사냥꾼이 토괴, 몽둥이, 그물 따위를 숲에 던져서 기뻐하고 만족하며 오로지 죽을 때까지 금수의 학살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그 후에 지옥에 태어났다.”(Srp.III.266)라고 했다.

 

부정관을 하다 자결한 수행승들은 전생에 무수한 살생업을 저지른 자들이었다. 지옥에서 태어났지만 지옥고가 다하여 예전에 행한 어떤 선업으로 인간으로 태어났다. 그 공덕의 힘으로 부처님 앞에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긴 받았지만 근본적인 불선업이 설익은 것이 있어서 부정관 수행 중에 자의로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부처님은 이런 상황을 예견하여 그들과 멀리 떨어져 홀로 계셨던 것이다.

 

부정관 대신 호흡관으로

 

아난다는 하루에도 열명 이상 자결하는 것에 대하여 우려를 표명했다. 그리고서는 방편을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방편이라는 말은 ‘pariyāya’의 번역어로 방법(method)을 말한다.

 

어떤 방법인가?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호흡새김에 의한 집중을 닦고 호흡새김에 의한 집중을 익히면, 고요하고 승묘한 감로의 지복에 들어, 악하고 불건전한 현상이 생겨날 때마다 즉시 사라지고 그치게 한다.”(S54.9)라고 말씀했다. 그런데 이 문장은 맛지마니까야 아나빠나사띠경’(M118)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수행승들이여, 호흡새김을 닦고 익히면, 커다란 과보, 커다란 공덕이 있다.”(M118.26)라는 정도로 언급되어 있다.

 

아나빠나사띠와 관련하여 상윳따니까야와 맛지마니까야는 근본 구조에 있어서는 같다. 호흡을 16단계로 설명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윳따니까야 베살리경에서는 부정관에서 호흡관으로 전환한 이유가 설명되어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아나빠나사띠를 하면 고요하고 승묘한 감로의 지복에 든다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부정관과 비교하여 이것은 그와는 달리 어떠한 이유로든 고요하지 않은 것도 없고 승묘하지 않은 것도 없다.”(Vism.8.148)라고 했다.

 

시체를 대상으로 부정관을 하면 대상이 거칠고 혐오스러울 것이다. 그래서 대상을 접하면 고요하지도 않고 승묘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호흡수행을 하면 꿰뚫음의 관점에서도 그리고 대상의 관점에서도 양자가 모두 고요하고 승며하여 지복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한다.

 

부처님은 비유의 천재

 

부처님은 비유의 천재이다. 아나빠나사띠를 하여 번뇌가 일어나는 족족 그 즉시에 사라지게 하는 것에 대하여 비구름의 비유를 들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한여름의 마지막 달에 먼지와 진흙이 흩날릴 때, 때 아닌 때의 커다란 비구름이 몰아닥치면, 그것들을 홀연히 사라지게 하고 그치게 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은 호흡새김에 의한 집중을 닦고 익히면, 고요하고 승묘한 감로의 지복에 들어, 악하고 불건전한 현상이 생겨날 때마다 즉시 사라지고 그치게 한다.”(S54.9)

 

 

한여름 땡볕에 흙먼지가 풀풀 날릴 때가 있다. 더구나 회오리바람이라도 불면 흙먼지를 뒤집어써야 할 것이다. 이럴 때 검은 구름이 몰려와서 비가 세차게 내린다면 흙먼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것이다. 아나빠나사띠도 그렇다는 것이다.

 

번뇌가 일어나는 족족 사띠하면 더 이상 번뇌의 의한 괴로움을 겪지 않게 될 것이다. 이는 호흡이라는 기둥에 사띠의 밧줄로 꽁꽁 묶어 두는 것과 같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여기 송아지를 제어하고자 사람이 기둥에 묶는 것과 같이, 새김을 확립하여 대상에 자신의 마음을 단단히 묶어야 한다.”(Vism.8.154)라고 했다.

 

아나빠사띠를 위빠사나로 보았을 때

 

아나빠나사띠에 대하여 호흡새김, 들숨날숨마음챙김 등으로 번역한다. 그렇다면 아나빠나사띠는 사마타일까 위빠사나일까? 분명한 사실은 청정도론에서 아나빠나사띠에 대하여 40가지 명상주제 중의 하나로 분류해 놓았다는 것이다. 이는 호흡수행 16단계에 대한 것이다.

 

16단계 호흡을 넘어서 사념처 수행단계로 들어가면 위빠사나가 된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아나빠나사띠경’(M118)에서도 볼 수 있다. 그래서 16단계 호흡 수행에 이어서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세상에서 수행승은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한다.”(M118.29)라고 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사념처에서 신념처에 대한 것이다.

 

아나빠나사띠경에서 신념처에 대한 것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이는 나는 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 몸들 가운데 어떤 몸이라고 말한다.”(M118.29)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어떤 몸(kāyaññatara)’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들이쉬고 내쉬는 것은 몸을 구성하는 네 가지 광대한 존재 가운데 바람()을 말한다. 그 주의를 기울이는 대상이 숨이 코를 드나들 때의 접촉감각이므로 호흡은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 사이의 감촉영역에 포함될 수 있다.”(Pps.IV.140)라고 했다.

 

아나빠사띠에서 사마타와 위빠사나 경계가 있다. 단지 호흡에 집중하면 사마타이고, 호흡할 때 코의 감촉을 알아차린다면 위빠사나라는 것이다. 사대중에서 풍대로 보는 것이다.

 

지수화풍 사대를 관찰한다면 위빠사나로 본다. 이는 마하시전통의 찬먜사야도의 수행지침서로도 알 수 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간행된 우 자나까 사야도의 수행지침서 위빳사나수행 28을 보면 여러분이 마음을 호흡의 들어오고 나가는 데 초점을 모으면 그것은 사마타수행입니다.”(406)라고 했다.

 

아나빠나사띠를 40가지 사마타명상주제로 보면 호흡은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대상에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대상을 관찰하면 위빠사나 수행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 자나까 사야도는 그래서 여러분이 마음을 호흡의 들어오고 나가는데 초점을 모으면 그것은 사마타수행입니다. 그에 비해 여러분이 숨을 들이쉬고 내실 때 공기가 콧구멍에 닿는데 그때 그 닿음을 관찰한다면 그것은 위빳사나 수행입니다.”(407)라고 했다.

 

 

호흡수행을 할 때 단지 호흡을 대상으로 하면 사마타수행이 된다. 그러나 호흡을 하여 공기가 콧구멍에 닿는 감촉을 관찰한다면 위빠사나 수행이 된다는 것이다. 호흡이라는 대상에 집중하면 사마타 수행이고, 감촉을 관찰하면 위빠사나 수행임을 말한다. 이는 경전을 근거로 한 것이다. 맛지마니까야 아나빠나사띠경에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 몸들 가운데 어떤 몸이라고 하는 것이 경전적 근거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어떤 몸은 ‘kāyaññatara’를 말하는데, 이는 사대중의 하나로서 바람의 몸(vāyokāya: 風大)’을 말하는 것이다.

 

마하시전통에서 왜 호흡수행을 버렸을까?

 

아나빠나사띠를 위빠사나로 보면 코의 감촉을 관찰해야 한다. 이에 대하여 신념처 정형구를 보면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한다.”라고 했다. 이 말은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서 주석에 따르면 “25가지 물질의 부분들인 물질의 몸 가운데 어떤 하나인 들숨날숨을 관찰하기 때문에 몸에서 몸을 관찰한다는 뜻이다.”(MA.iii.271)라고 했다.

 

아나빠나사띠에서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한다는 말은 우리 몸에서 코의 공기감촉을 관찰한다는 말과 같다. 이것이 위빠사나이다. 그러나 미얀마 마하시전통에서는 아나빠나사띠 대신에 복부의 일어남과 꺼짐을 관찰한다.

 

마하시전통에서는 아나빠나사띠를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하여 우 자나까 사야도는 순수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호흡수행(아나빠나사띠)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왜냐하면 두 세 번의 좌-수행으로 콧구멍에서 들락날락하는 호흡에 집중하는 것은 다소 어렵기 때문입니다.”(412)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아나빠나사띠는 사마타수행도 되고 위빠사나수행도 된다. 그러나 마하시전통에서는 호흡대신에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이에 대하여 콧구멍에서 들락날락하는 호흡에 집중하는 것은 다소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다. 코끝 공기의 접촉을 관찰해야 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음을 말한다.

 

마하시전통에서는 왜 호흡수행을 버렸을까? 이에 대하여 추론해 볼 수 있다. 아마도 사마타로 들어가버리기 쉽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코끝 공기감촉을 관찰하여 위빠사나한다고 앉아 있지만 조금만 방심하면 호흡을 대상으로하여, 즉 호흡을 개념으로 하여 사마타수행로 바뀔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복부의 일어남과 꺼짐을 관찰하면 사마타로 바뀔 염려는 줄어 들 것이라 생각한다.

 

마하시전통에서 복부관찰하는 이유는

 

마하시전통에서는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이는 순수위빠사나를 하기 위한 것이다.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하다고 사마타로 들어갈 염려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복부관찰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우 자나까 사야도의 위빳사나수행 28을 보면 복부의 움직임은 바람요소(와요 다투)의 특성으로, 위빳사나 수행의 대상으로 삼아 관찰하면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관찰했던 것입니다.”(440)라고 했다.

 

복부에서 일어남과 꺼짐을 관찰했을 때 이는 풍대에 대한 것이다. 사대관찰은 위빠사나에 해당되기 때문에 복부관찰을 위빠사나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경전에는 복부관찰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는 근세 미얀마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마하시사야도가 28세 되던 해 스승인 제따완 사야도 아래에서 수행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재가자가 단기출가하여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효과를 본 것이 시초이다.

 

복부관찰은 경전적 근거는 없다. 그러나 풍대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이는 몸들 가운데 어떤 몸이라고 말한다.”몸에서 몸을 관찰한다.”라는 경전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래서 왜냐하면 마하사띠빳타나숫따에 네 가지 기본적인 물질요소의 관찰이라는 부분이 있는데 복부의 움직임에 대한 관찰은 그 부분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440)라고 했다. 이것은 마하사띠빳타나숫따에서 네 가지 기본적인 물질요소의 관찰에 대한 설명이 일치하는 것으로 존귀하신 제따완 세야도께서는 복부의 움직임에 대한 관찰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441)라고 했다.

 

공부는 몸으로 하는 것

 

공부는 몸으로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최근 유튜브에서 고미숙 선생이 한 말이다. 공부를 머리로 하려고 하면 재미없다고 했다. 머리로 하는 공부는 검색하면 다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공부는 체험으로 해야 재미 있고 진정으로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수행에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이런 글쓰기도 머리로 하는 것인지 모른다.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책을 보고서 글을 쓰기 때문이다. 경전과 주석서, 그리고 수행지침서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글쓰기는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준다. 개념 잡는데 도움이 됨을 말한다. 이는 수행의 방향을 정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아나빠나사띠에 대하여 정리해 보았다. 수행한다고 했을 때 대부분 호흡에 집중한다. 그런데 호흡수행은 사마타의 길이 있고 위빠사나의 길이 있다는 것이다. 호흡을 대상으로 하여 집중하면 사마타가 되고, 호흡할 때 코 주변의 공기감촉을 관찰하면 위빠사나라고 했다. 그런데 미얀마 마하시전통에서는 아나빠나사띠라는 호흡수행 대신에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대 중에서 풍대를 관찰하는 것과 같다.

 

복부의 움직임 관찰은 풍대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경전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풍대도 호흡과 관련된 것이다. 호흡관찰하는데 있어서 코 주변의 공기접촉을 관찰하는 것보다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에 오늘날 대부분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좌선할 때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호흡을 관찰하면 이점이 있다. 그것은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호흡에 집중하다 보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음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악하고 불건전한 현상이 생겨날 때마다 즉시 사라지고 그치게 한다.”(S54.9)라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희망의 메시지다. 번뇌가 일어나는 족족 그 즉시 사띠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요하고 승묘한 감로의 지복을 맛볼 수 있다고 했다.

 

 

2020-11-1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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