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그윽한 고요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1. 22. 17:47

그윽한 고요


외롭다고 한다. 사람들은 외로워서 못살겠다고 한다. 홀로 되었을 때 고독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황혼 고독사가 늘어나는 이유이다.

노인이 되었을 때 세 가지 리스크가 있다고 한다. 돈과 건강과 외로움이다. 이 세 가지는 좀처럼 피해 갈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내 주머니에 있어야 내 것이다. 부동산이 천문학적이라 해도 장부상에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잉여라는 것이다. 있으나 없으나 별 차이 없는 것이다.

노인의 건강은 건강이 아니라고 한다. 오늘 밥 잘 먹고 건강해 보여도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 갑자기 악화되어 죽을 수 있다. 장례식장에서 이런 얘기 많이 듣는다.

다 참을 수 있어도 외로움만큼은 참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상처한 노인이 일년도 안되어서 여자를 들이는 것도 참을 수 없는 외로움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홀로 감내한다. 그런데 홀로 있으면 정신건강에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이다. 친구 없이 홀로 긴긴 노년을 산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일 것이다. 그래서 노인이 되면 애정보다는 우정이 좋다.

 

때로 홀로 있고 싶을 때가 있다. 멀리 떨어진 외딴 곳에 나홀로 살고 싶은 것이다. 요즘 인기 있는 자연인처럼 사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삶에 질려 버렸기 때문이다. 싫어 하는 마음이 너무 강한 나머지 도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실도피라 할 수 있다.

 


다섯 가지 감각 중에 시각과 청각으로 접하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다. 시각은 늘 접하는 것이다. 눈만 뜨면 대상을 접한다. 보기 싫은 것도 봐야 한다. 보기 싫다고 눈 감고 살 수 없다. 그럼에도 봐야 한다면 싫어 하는 마음이 생겨날 것이다. 똑 같은 영화를 두 번 또는 세 번은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열 번 보라고 하면 어떨까? 백번 보라고 하면? 고문이라 볼 수 있다.

 

고문이란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람이 숨기고 있는 것을 강제로 알아내기 위하여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며 신문하는 것"을 말한다. 반복적인 것에 특징이 있다.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면 고문으로 본다. 재미 있는 영화도 열 번, 백 번 보여 주면 고문이다. 듣기 좋은 말도 한두 번이다. 서너 번 들으면 짜증이 나고 열 번 들으면 괴로울 것이다. 백 번 들으면 고문이라 해야 할 것이다. 짜장면이 맛 있다고 하여 그 자리에서 여러 번 먹기 힘들다. 두 그릇 또는 세 그릇 까지는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열 그릇 먹으라면 고문이 된다.

보기 싫으면 눈 감으면 되고, 듣기 싫으면 귀 막으면 된다. 코도 막을 수 있다. 오감으로 부터 도망갈 수 있다. 그러나 생각만은 막을 수 없다. 마음의 문으로 들어오는 생각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싫어서, 세상이 싫어서 심산유곡에서 자연인처럼 살아도 문득문득 치고 들어오는 생각을 막을 수 없다.

홀로 있어도 괴롭고 함께 있어도 괴롭다. 홀로 있으면 외로워서 괴롭고, 같이 있으면 부대껴서 괴롭다. 이래저래 괴롭다. 홀로 있으면 생각 때문에 괴롭다. 함께 있으면 보고 듣는 것 때문에 괴롭다. 괴로움에서 해방되고자 한다. 어떻게 해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괴로움은 대상에 대한 호불호와 관련이 있다. 또 쾌블쾌와 관련이 있다. 좋으면 거머 쥐려 하고 싫으면 밀쳐 내려 한다. 극단은 "죽음"이다. 한번 좋으면 "죽어라"좋아 하고, 한번 싫은 사람은 "죽어도" 싫은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탐욕과 분노에 따른 것이다.

사람은 육체적 장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신적 장애도 있다. 그렇다고 정신병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탐욕도 장애이고 분노도 장애에 해당된다.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데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괴롭다. 행복한 삶에 장애가 되기 때문에 장애라 한다.

정신적 장애에는 오장애가 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 악의, 해태와 혼침, 흥분과 회한, 의심을 말한다. 이와 같은 오장애를 가지고 있는 한 결코 마음의 평화를 이룰 수 없다.

오장애를 어떻게 해야 극복할 수 있을까? 적을 제압하려면 전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해야 한다. 불선법을 꼼짝 못하게 만들려면 전력뿐만 아니라 전술도 있어야 한다. 욕망은 부정관으로, 분노는 자애관으로, 해태와 혼침은 니밋따로, 흥분과 회환은 호흡관으로 제압한다. 의심은 경전의 가르침으로 제압한다.

번뇌에서 자유로우려면 사마타 수행만으로 한계가 있다. 위빠사나 수행으로 뿌리를 말려야 한다. 강력한 사띠를 하는 것이다. 어떻게 사띠하는가? 알아차림하는 것이다. 즐거운 느낌이 발생했을 때 '즐겁다'고 알고, 싫은 느낌이 생겨났을 때 '싫다'고 알면 그 뿐이다. 더 이상 나가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좋음과 싫음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린다. 조건에 따라 발생하여 그 즉시 소멸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조건발생 하는 것은 어느 것이든지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다고 아는 것이다.

모든 것은 조건발생이다. 머물지 않고 즉시 사라진다. 즐거운 느낌도 괴로운 느낌도 발생했다가 즉시 사라진다. 그래서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갈애한다. 즐거운 느낌은 사라져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계속되기를 바라는 것은 망상이다. 더구나 "죽어도 좋아!"라고 하면 집착이다. 실체도 없는 즐거운 느낌, 이미 사라지고 없는 즐거운 느낌에 집착하는 것이다. 이 단계가 되면 개념에 집착하는 것이 된다. 실체도 없는 망상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

아픈만큼 성숙해진다. 괴로움을 겪어 보아야 성숙한다. 아픔이 크면 클수록 더욱 더 성숙한다. 정신적 성장은 괴로움 속에서 향상된다. 반면 행복만 있다면 머물러 있을 것이다. 향상이 없는 것이다.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작은 파고에도 휩쓸려 버린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고성제를 설했다.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아야 괴로움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즐거움(행복)의 거룩한 진리'를 설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고성제)'를 설했다. 지금 극심한, 죽을 것 같은 괴로움을 겪고 있다면 정신적 성장을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산전수전 겪은 사람이 있다. 요즘은 공중전도 겪은 사람이 있다고 한다. 겪고 나면 힘이 생긴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내면의 파워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어지간한 어려움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왠만한 괴로움은 내면의 힘으로 돌파한다. 또한 앞으로 닥칠 더 높은 파고를 넘을 준비가 되어 있다.

외롭다고 하여 "외로워 죽겠다."고 말하면 정말 외로워 죽을 수 있다. 함께 있어서 "괴로워 죽겠다."고 말하면 정말 괴로워 죽을 수 있다. 현명한 자들은 이겨 낸다. 어떻게 이겨내는가? 수행의 힘으로 이겨 낸다. 현상이 무상, , 무아임을 아는 것이다.

수행자는 조건발생 하는 것은 머물지 않고 즉시 사라짐을 안다. 그래서 실체도 없는 것에 갈애 하지 않는다. 당연히 집착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평온해진다. 어디에 있든지 고요하다. 홀로 있든 함께 있든, 심산유곡에 있든 저자거리에 있든 알아차림이 있는 고요이다. 이를 유적(
幽寂), 그윽한 고요라 할까?


Anicc
ā vata sakhārā

uppādavayadhammino
Uppajjitv
ā nirujjhanti
tesa
vūpasamo sukho ti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
모든 조건지어진 것은 무상하니,
생겨나고 소멸하는 법이네.
생겨나고 또한 소멸하는 것,
그것을 그치는 것이 행복이네." (S15.20)

 

 

2020-11-2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