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2. 21. 07:26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지금 나는 행복할까? 확실히 변화는 감지된다. 사오년전 정치적 현실과 비교하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한 상태이다. 그러나 우울하다. 이유는 무엇일까? 선거에서 압승하고 공수처 출범도 눈 앞에 두고 있지만 여전히 근심걱정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만족지수가 있다. 행복지수라고도 한다. 소유 대 욕망에 대한 것이다. 아무리 많이 소유해도 욕망이 크면 만족지수는 떨어진다. 반대로 소유와 관계없이 욕망을 최소화 하면 만족지수는 올라간다. 이는 만족지수=소유/욕망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많은 성과를 내었다. 그러나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아직도 해야 할 것이 많다. 그래서 행복하지 않다. 오륙년전과 비교하면 만족해야 하나 만족하지 않는 것은 아직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울하다.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되고 있다. 정치가 일상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에 영향받는 삶이라면 행복하지 않는 삶이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 한다. '불가근불가원'이어야 한다. 너무 가까이하면 휩쓸려 버린다. 너무 멀리 하면 방관자가 된다. 이럴 때 중도의 지혜가 요구된다.

지난 시절을 되돌아본다. 유권자가 된 이래 한방향으로만 갔다. 도중에 한번 일탈한 적은 있다. ‘혹시나했는데 역시나였다. 앞으로도 방향은 바뀌지 않을 것 같다.

누구나 신념이 있다. 이를 견해라고도 말 할 수 있다. 한번 견해가 생겨나면 여간해서는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고 틀렸다고 보면 안된다. 나와 생각이 다를 뿐이다. 견해는 존중해 주어야 한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으로 인하여 괴롭다. 아무리 많은 성과를 내었어도 만족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다. 치료가 필요하다. 어떻게 힐링할 것인가? 누군가 토닥토닥해 주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가르침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가르침에 답이 있다. “이럴 땐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라며 경전을 열어 보아야 한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해법이 있다.

요즘 빠알리 팔정도경을 외고 있다. 삼마사띠에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관찰한다.”(S45.8)라는 구절이 있다. 심념처에 대한 것이다. 이 구절에서 희망을 찾는다. 탐욕과 근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결국 탐역과 근심에 대한 문제이다. 욕심을 내 보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분노가 일어난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애만 탈 뿐이다. 정신적 고뇌를 말한다. 때로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수 있다.

여기 하나의 방법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아 성냄이 일어났을 때 그 마음을 알아 차리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심념처수행이라고 한다.

마음이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현재 일어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러면 현재의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린다. 왜 그런가? 마음은 한 순간에 하나의 마음만 있기 때문이다. 한 순간에 두 마음이 있을 수 없다. 예를 들어 탐욕과 성냄이 동시에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울다가 웃다가 하는 것이다. 울움과 웃움을 동시에 할 수 없다.

지금 나에게서 불선한 마음이 일어났다. 누군가의 이름을 접하자 불쾌한 감정과 함께 근심이 일어났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럴 때 수행처에서 늘 하는 말이 있다.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내 마음이 그 사람으로 인하여 근심이 생겼다면 근심이 생긴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근심은 남아 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알아 차려야 한다. 그래서 , 나에게 근심이 일어 났구나.”라고 아는 것이다. 이는 두 번 알아차림 하는 것이다. 먼저 알아차림 한 것을 노팅(noting)’이라 하고, 뒤에 아는 마음을 왓칭(watching)’이라 한다. 그래서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관찰한다. (citte citt
ānupassī viharati) “(S45.8)라고 말한다.

근심하는 마음을 관찰하면 근심하는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된다. 이제 근심이 사라졌다는 마음만 남는다. 그런데 이 마음 마저도 사라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가? 위와 똑같은 방법으로 한다. 근심이 사라졌다는 그 마음을 아는 것이다. 이는 마치 확인사살하는 것과 같다. 다음과 같은 심념처 정형구가 말해준다.

 

 

성냄에 매인 마음을 성냄에 매인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을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D22.19)



확인사살은 죽인 자를 다시 한번 죽이는 것이다. 심념처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근심이 일어나서 근심을 죽였는데, 죽였다는 그 마음마저 죽이는 것이다. 이처럼 심념처는 두 번 죽임으로 인하여 불선법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만든다. 이렇게 되면 어떤 상황속에서라도 흔들리지 않게 된다.

시국문제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 분명히 사오년전과 비교하면 행복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 행복하지 않다. 더구나 근심걱정까지 생겼다.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세상만사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이럴 때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너무 가까이도 너무 멀리도 하지 않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자신의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다.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여기서 그쳐서는 안된다. 그렇게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또 그렇게 아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모두 네 번 앎이 있을 때 자유롭게 된다. 핵심은 현재 알고 있는 마음을 다시 알아차리는 것이다.

 

 

2020-12-2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