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수행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2. 24. 08:09

수행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삐띠 짜 위라가
우뻬카꼬 짜 위하라띠
사또 짜 삼빠자노
수칸짜 까예나 빠띠상베데띠
얀땅 아리야 아찍칸띠
우뻬카꼬 사띠마 수카위하라띠
땅 따띠양 자낭
우빠삼빳짜 위하라띠



오늘 새벽 빠알리 팔정도경에서 삼마사마디(正定)의 세 번째 게송을 외웠다. 먼저 이전에 외운 것을 확인했다. 거의 30분 걸린 것 같다. 마치 마음 속의 사진을 보듯이 또박또박 떠올렸다. 차례로 암송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다음 단어가 척척 올라온다. 암기효과인 것이다.

에왕 메 수땅에서 부터 시작하여 삼마사마디 두 번째 선정 것까지 다 외운 것을 확인하고 세 번째 선정에 대한 게송을 외웠다 거의 한시간 걸렸다. 생소한 단어 몇개가 있기는 했지만 자꾸 반복하다 보면 외워진다.

세 번째 선정의 클라이막스는 우뻬카꼬 사띠마 수카(upekhako satim
ā sukha)”이다. 평정이 있고 사띠가 있는 행복을 말한다. 결국 세 번째 선정에서의 키워드는 행복(sukha)’이다. 그런데 그런 행복은 일반 행복과 다르다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감각적 행복과 다른 것이다. 눈과 귀, 코와 혀, 그리고 촉감으로 느끼는 오욕락과는 다른 것이다.

깊은 선정에서 오는 행복은 기본적으로 평온한 행복이다. 마음을 대상에 집중했을 때 오는 행복이다. 그런데 사띠가 있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깨어 있는 행복이다. 그래서 평정이 있고 사띠가 있는 행복이라고 했다.

행복도 행복 나름이다. 모두 행복이라 말하지만 거친 행복도 있고 미세한 행복도 있다. 욕계의 행복도 있고 색계와 무색계의 행복도 있다. 열반의 행복도 있다. 행복중의 행복은 열반의 행복일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nibb
āna parama sukha)”(Dhp.204)라고 했다.

사람들은 음식을 먹을 때 행복을 느낀다. 요즘 먹방채널을 보면 한입 가득 넣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오감이 총 동원된 감각적 행복이다. 이를 시청하는 사람도 행복을 느낀다. 시각적 행복이다. 눈으로 먹는 행복이다. 동시에 마음으로 먹는 행복이다. 마치 야동을 보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감각적 행복은 일시적이다. 아무리 예술작품 같은 음식을 먹었어도 목구멍을 넘기는 순간 끝이다.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일시적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즐길거리를 찾는다.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에 빠지면 갈애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갈애는 집착이 되고, 집착은 업이 된다. 그 결과는? 괴로움이다. 이렇게 본다면 감각적 행복은 괴로움이다.”라고 말 할 수 있다.

즐기는 것이 괴로움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일까? 그러나 모든 감각적 행복은 괴로움이다.”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행복이 있다면 일시적 또는 잠정적 행복이 있을 뿐이다. 잠시 즐거운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오래 지속되지 않아서 불만족이다. 때로 고통까지 야기하면 감각적 행복은 행복이 아니다. 이런 경우 짧은 행복 긴 괴로움이라 해야 할 것이다..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한다.”라는 광고문구가 있다. 충동구매 했을 때 긴 후회가 따를 수 있다. 순간적인 욕망으로 긴 고통이 될 수 있다. “연애는 짧고 생활은 길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행복은 짧고 고통은 길다.”라는 말과 같다. 연애를 하여 결혼했을 때 처음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고통의 시작이다. 연애의 감정은 온데간데 없고 생활만 남아 있는 것이다. 가족을 위하여 사는 삶이 된다. 그것도 늙어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 이런 것을 본다면 출가수행자는 선견지명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니 타고났다고 볼 수 있다. 세 가지 원인을 갖추고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아무나 수행자가 될 수 없다. 아무나 선정에 들 수 없다.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에 따르면 세 가지 원인, 즉 무탐, 무진, 무치의 조건을 갖추고 태어나야 수행자로 살 수 있고 선정에도 들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전생에 수행자로 산 자가 이 생에서도 수행자로 살 가능성이 높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출가수행자에게 예경할 수 있다.

남들이 감각적 욕망을 즐길 때 열심히 수행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미친짓이다. 뭐하러 힘들게 사서 고생하느냐고 말할지 모른다. 마치 등산하는 사람에게 올라갔다가 내려 올 거라면 뭐하러 힘만 들게 올라갑니까?”라고 묻는 것과 같다.

감각적 욕망을 행복이라 여기는 자들은 선정의 행복을 모른다. 그러나 선정의 행복은 눈과 귀, 코와 혀, 그리고 감촉으로 느끼는 행복과 비할 바가 아니다. 그들은 평정하고 사띠가 있는 선정의 행복을 모른다.

 

선정의 행복은 잔잔한 호숫가에 앉아 있는 것과 같다. 마음의 장애가 없어서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는 것과 같은 상태가 되었을 때 지극히 평온한 마음이 될 것이다. 이렇게 평정이 있고 사띠가 있는 행복이 세 번째 선정의 행복이다.

빠알리 팔정도경 외우기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이제 게송 하나만 외우면 끝난다. 팔정도경을 외우다 보니 클라이막스는 선정인 것 같다. 그것도 네 번째 선정이다. 이는 우뻬카 사띠 빠리숫딩 (upekh
ā sati-pārisuddhi)” 에 포커스가 맞추어 진다. 평정하고 사띠가 있는 청정함이다. 행복도 떨어져 나간 상태를 말한다.

우뻬카사띠빠리숫다를 한자어로 捨念淸淨이라 한다. 팔정도에서 절정인 것 같다. 이 상태는 사유라는 언어적 형성도 사라지고, 호흡이라는 신체적 형성도 사라진 경지를 말한다. 여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면 열반이다. 지각()과 느낌()정신적 형성마저 사라진다면 멸진정에 들기 때문이다. 언어적, 신체적, 정신적 형성이 모두 사라졌을 때가 열반이다. 이를 빠라마수카, 최상의 행복이라고 한다.

흔히 분별하지 말라고 한다. 이는 언어로써 개념화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선정에 들려면 분별해야 한다. 그것은 초선정에서 위딱까(사유)와 위짜라(숙고)로 나타난다. 언어의 힘을 빌어 선정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선정에 들어갈 때는 언어적 형성은 버려진다. 이는 두 번째 선정의 정형구 중에 위딱까 위짜라낭 뷰빠사마(Vitakka-vic
ārāna vūpasamā)”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사유와 숙고가 멈추어진 뒤라는 뜻이다. 멈춘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어지는 문구를 보면 아위딱캉 아위짜랑(avitakka avicāra)”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사유와 숙고를 여의어로 번역된다. 두 번째 선정에서는 언어적 형상이 사라지는 것이다. 남은 것은 삐띠(희열)와 수카(행복)이다.

세 번째 선정에서는 삐띠 짜 위라가(P
ītiyā ca virāgā)”라 하여 희열이 떨어져 나간다. 남아 있는 것은 행복이다. 그런데 그 행복은 지극히 평정하고 사띠가 있는 행복(upekhako satimā sukha)”이라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일 것이다. 감각적 행복과 비할 바 없는 선정의 행복이다.

깨달음은 무엇일까? 단지 분별을 멈추는 것이 깨달음일까? 이럴 때는 니까야를 보아야 한다. 상윳따니까야 까마부의 경’(S41.6)을 보면 단계적으로 사라짐을 설명해 놓았다. 사유로 표현되는 언어적 형성 2선정에서 사라지고, 호흡으로 표현되는 신체적 형성 4선정에서 사라지고, 지각()과 느낌()으로 표현되는 정신적 형성 9선정에서 사라진다고 했다. 언어적 형성, 신체적 형성, 정신적 형성 모두 사라졌을 때 열반이라고 한다. 깨달음의 완성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팔정도는 깨달음의 완성을 위한 실천도라고 볼 수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다. 경전문구를 외워도 실천하지 않으면 외우는 것으로 그친다. 맛을 보야야 한다. 맛을 보기 전에는 이러쿵저러쿵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경전문구를 외는 것은 방향을 잡기 위해서이다.

모든 학문은 외우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공부를 할 때는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외워야 한다. 외워서 내것으로 만들었을 때 응용할 수 있다. 팔정도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언제까지나 경전을 열어 볼 수 없다. 요즘 검색시대라 하지만 근본 가르침은 머리 속에 넣어 놓는 것이 좋다. 언제든지 꺼내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실천이다. 외웠으니 실천해야 한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세 가지 원인, 즉 무탐, 무진, 무치의 조건을 타고 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수행자로 살 수 없고 선정에도 들지 못할 것이라 한다. 전생에 수행했던 자들이 이 생에서도 수행할 수 있음을 말한다. 수행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과연 나는 이 생에서 수행자로 살아 갈 수 있을까?

 

 

2020-12-2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