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사띠(sati)는 도와 과의 전제조건이자 전조현상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2. 10. 09:18

 

사띠(sati)는 도와 과의 전제조건이자 전조현상

 

 

목숨을 싸띠보다 우위에 두지 않는 것. 이 말은 혜송스님의 수행기에서 본 것이다. 현재 혜송스님의 밴드 삿담마마마까에서는 스님의 수행기가 연재되고 있다. 92회 째를 보면 막상 수행의 한 과정을 경험해 보니 수행의 왕도(붓다의 말씀이 맞았다)는 완벽한 스승의 완벽한 법문을 듣고 건강, 목숨을 싸띳보다 우위에 두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수행에는 왕도가 있다

 

수행에도 왕도가 있을까? 어떤 이들은 그런 것 없다고 말한다. 특히 이것을 말하는 자들이 그렇다. 유튜브에서 이것을 말하는 자의 법문을 들어 보니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한다. 이미 다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하신 말씀도 방편이라 하면서 그 말에 속지 말라고 말한다.

 

이것을 말하는 자들의 법문을 가만 들어 보면 결국 힌두교를 말하는 것 같다. 부처님당시 브라만교의 범아일여사상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나의 궁극적 실체가 있어서 합일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작은 나를 버리고 큰 나, 참나와 합일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논리라면 세상의 모든 종교는 하나의 진리를 갖는다. 하나를 가지고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음을 말한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이 말하는 등산이론과도 맥을 같이 한다. 정상은 하나인데 올라가는 길은 여럿이라는 것이다.

 

2011년 조계종에서는 소위 아쇼카선언이라 하여 종교평화선언을 발표하려고 했다. 진리는 모두 하나이기 때문에 서로 평화롭게 살자는 것이다. 취지는 좋았지만 이는 불교를 유일신교에 통째로 바치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블로그에 수십개의 글을 쓰면서 격렬하게 저항했다. 하늘의 도움이 있어서일까 그때 당시 조계종 종정스님이었던 법전스님이 재가하지 않아서 아쇼카선언은 무산되었다.

 

진리는 하나만 있다. 그것은 어떤 진리인가? 과거불에서부터 현세불에 이르기까지, 또 미래불에 이르기까지 제불이 발견한 연기법이다. 조건발생하는 연기법을 말한다. 연기법을 말하지 않으면 진리라 볼 수 없다. 장님 코끼리만지듯이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열반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면 진리가 아니다. 부처님 가르침이야말로 진리이다.

 

수행에는 왕도가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스승에게 배워야 함을 말한다. 부처님당시부터 전승되어온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실천했을 때 도와 과를 이룰 수 있음을 말한다. 그 첫번째 조건은 스승을 잘 만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혜송스님은 완벽한 스승을 만나는 것이라고 했다. 완벽한 스승에게서는 완벽한 법문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그런 법문이 수행자를 도와 과로 이끌 수 있음을 말한다.

 

혜송스님의 수행기를 읽어 보면 1996년 미얀마로 건너간 그 해에 성과를 이루었다. 수행기가 막바지에 치닫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19961028일자 92회 수행기를 보면 좌선시에 깊이 들어감이라고 써 놓았다. 하루에도 여러 번 들어간 것이다.

 

93회 수행기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적어 놓았다. 19961031일부터 113일까지 수행기를 보면 좌선시에 계속 적멸에 들어감이라고 적어 놓았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들어가는데, 한번 들어가면 1시간 이상 3시간 되는 것 같다. 종소리도 못듣고 적멸체험했다고 한다.

 

혜송스님이 수행기를 쓴 이유는

 

혜송스님은 왜 이렇게 밴드를 만들어 수행기를 올려 놓은 것일까? 거의 백 회 가까이 수행기를 연재하면서 그날그날 있었던 수행과정을 시간대별로 꼼꼼히 기록해 놓은 것을 24년만에 공개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혜송스님은 93회 수행기에서 이렇게 기록을 남겼다.

 

 

내가 구태여 드러내지 않아도 될 수행기를 예기치 못하게 개방한 이유는

1) 과거에 수행을 조금 해 봤던 분

2) 지금 수행해서 지혜가 잘 일어나고 있는 분

3) 미래에 수행을 한번 해 보고 싶은 분

4) 이생에 기필코 도 과 열반을 체험하고야 말겠다고 서원한 분

5) 사악도의 문을 이생에 닫고 싶은 분

6) 번뇌가 없는 순간을 체험하고 말겠다는 분들이

좀 더 인내하고, 좀 더 지혜롭게 노력하고, 한 개의 힘이라도 아끼지 말고 한 개한 힘이라도 남기지 말고 다 뽑아쓰게 하고 싶어서이다.”(혜송스님, 93회 수행기)

 

 

혜송스님이 수행기를 인터넷에 공개한 이유는 분명하다.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이는 자비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본다. 본래 수행자가 자신의 수행의 성과를 말하는 것은 허물이라고 말한다. 이는 율장에서도 언급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개하는 것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초심 수행자이든 구참수행자이든 수행기를 보면서 자신의 현재를 점검할 수 있다. 가장 좋은 것은 직접 지도를 받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혜송스님은 종종 집중수행을 지도한다. 코로나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가을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직지사 백련암에서 일주일 집중수행을 시행한 바 있다. 이번에는 이박삼일 주말에 집중수행을 계획하고 있다.

 

나이는 숫자와 무관

 

혜송스님의 수행기를 읽어 보면 나이는 숫자와 무관함을 알 수 있다. 미얀마에 있었을 때 일이라고 한다. 스님이 96년도 미얀마에서 수행하고 있었을 때 만난 노보살이 있었는데 그때 당시 나이가 66세였다고 한다. 늦은 나이임에도 수행을 시작했는데 다리가 아파서 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나이가 90세로 선원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미얀마선원에 가면 봉사자를 볼 수 있다. 선원 종무소에서 일을 하고 통역을 하고 숙소사감 등을 하는 봉사자를 말한다. 혜송스님의 수행기에 따르면 이들 봉사자들에 대하여 봉사자는 최소한 평등심의 지혜를 체험한 간부들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중에서 11번째 단계인 상카루뻭카냐냐단계에 이른 수행자임을 말한다. 범부로서 올라 갈 수 있는 최고의 지혜를 말한다.

 

선원봉사자 중에는 나이가 85세 된 고령의 할머니가 있었다고 한다. 놀랍게도 이 할머니는 87세에 출가했다고 한다. 선원에서 105세까지 살다가 열반했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다. 이는 법구경 115번 인연담에 실려 있는 바후뿟띠까와 관련된 이야기로도 잘 알 수 있다.

 

바후뿟띠까는 노령의 나이에 출가했다. 열명의 자식을 낳았지만 버림받았다. 남편이 죽자 재산을 자식들에게 모두 물려주고 난 것이 화근이었다. 나중에 자식들조차 하찮게 여긴 것이다.

 

바후뿟띠까는 갈 데가 없어서 비구니교단으로 출가했다. 늦은 나이에 출가했지만 목숨을 걸고 수행했다. 이는 나는 나이가 들어 출가했으니, 방일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구절로 알 수 있다. 또한 밤새도록 수행자의 삶을 닦아야지.”라는 구절로도 알 수 있다.

 

바후뿟띠까는 다리에 힘이 없어서 기둥을 붙잡고 경행을 했다. 이렇게 용맹정진하여 마침내 아라한이 되었다. 테리가타에는 다음과 같은 게송이 전해져 오고 있다.

 

 

“이러한 집적의 몸으로

열 명의 자식을 낳았으니,

그 후 허약하고 늙어서

나는 수행녀를 찾아갔다.

 

그녀는 내게 가르침을 주었다.

존재의 다발과 감각의 영역과

인식의 세계에 대하여

그 가르침을 듣고

머리를 깍고 나는 출가했다.

 

그러한 내가 정학녀였을 때에

하늘눈이 청정해졌고,

예전에 내가 살았던

전생의 삶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마음을 통일하고 잘 정립하여

인상을 여읨을 닦고

나는 즉시의 해탈을 얻었으니,

집착 없이 적멸에 들었다.

 

실로 다섯 존재의 다발들은

완전히 알려졌고 뿌리째 뽑혔다.

비참한 노령의 그대여, 부끄럽다.

그러나,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Thig.102-106)

 

 

쏘나장로니의 게송이다. 바후뿟티까와 쏘나장로니는 같은 인물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늙었다고 수행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걸을 힘이 없어도 무언가 붙잡고 행선할 수 있고, 가부좌를 틀 수 없어도 의자에 앉아서도 수행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나이타령만 한다면 그 사람에 대하여 비참한 노령의 그대여, 부끄럽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이 들어서 무엇을 해야 할까? 할 것이라고는 수행밖에 없는 것 같다. 바후뿟띠까와 같은 고령의 여인도 용맹정진하여 도와 과를 이루었다.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이 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다.

 

사띠(sati)는 도와 과의 전제조건이자 전조현상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고 수많은 수행방법이 있다. 그러나 어는 것이 바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럴 때는 스승을 잘 만나야 한다. 훌륭한 스승에게서 훌륭한 지도를 받았을 때 수행성과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혜송스님은완벽한 스승의 완벽한 법문을 듣고 건강과 목숨을 싸띳에 바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수행의 첫번째 왕도이다. 수행의 두번째 왕도는사람노릇, 사람의 인격보다 오직 사띳을 우선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사띠의 중요성을 말한다.

 

전조현상이 있다. 디가니까야에 따르면 “벗들이여, 광대한 빛이 생겨나고 광명이 생겨나는 징조들이 보이면, 하느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광대한 빛이 생겨나고 광명이 나타나는 것은 하느님이 나타나는 전조이기 때문입니다. (D18)”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은 브라흐마(범천)을 말한다.

 

해가 뜨기 전에도 전조현상이 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태양이 떠 오를 때 그 선구이자 전조가 되는 것은 바로 새벽이다. ”(S45.54)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이어지는 가르침을 보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 생겨날 때 그 선구이자 전조가 되는 것은 방일하지 않는 것이다.”(S45.54)라고 했다.

 

방일하지 않는 것이 깨달음의 전조현상이다. 이는 다름 아닌 사띠를 말한다. 부처님이 최후로 압빠마데나 삼빠데타라 하여 불방일정진을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불방일을 뜻하는 압빠마다는 사띠와 동의어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혜송스님이 늘 강조하는 사띠는 도와 과를 이루는 전제조건이자 전조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참 좋은 인연

 

혜송스님은 호칭할 때 늘 작가라고 말한다. 소설쓰는 작가도 아니고 시를 쓰는 작가도 아님에도 작가라고 하는 것은 글을 많이 써서 일 것이다. 글 쓰는 것에 대하여 늘 칭찬을 잊지 않는다. 자비의 마음이 있어서 일 것이다.

 

김진태 선생의 인솔로 재작년 미얀마 양곤 근교 담마마마까 국제선원에서 2주간 있기도 했다. 작년 여름에는 직지사에서 열린 56일 위빠사나 템플스테이도 참여했다. 참 좋은 인연이다.

 

 

 

 

2020-12-1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