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욕망과 불선법을 잠재우려면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2. 21. 08:28

욕망과 불선법을 잠재우려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즉각적이다. 보배경에서청정한 삼매는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삼매이니”(Stn.226)라는 말로 알 수 있다. 가르침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접하는 순간 즉각적 효과가 있다. 그래서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S11.3)이라고 했다. 대상에 집중했을 때 특히 그렇다.

빠알리 팔정도경(S45.8) 외우기가 이제 막바지에 접어 들었다. 팔정도 중에 가장 마지막에 있는 삼마사마디 외우기에 들어 갔기 때문이다. 네 가지 선정이 있기 때문에 네 단락을 외워야 한다. 오늘 새벽 초선정 정형구를 외웠다.


위위쩨와 까메히
위위짜 아꾸살레히 담메히
사위딱깡 사위짜랑
위웨까장 삐띠수캉
빠타망 자낭
우빠삼빳자 위하라띠


이 게송을 외우기 전에 먼저 이제까지 외운 것을 확인했다. “에왕 메 수땅부터 시작하여 삼마사띠까지 외운 것을 확인 했을 때 삼마사마디 외우기에 들어 간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말이다. 뜻을 알면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이는 감각적인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에서 떠난 뒤,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S45.8)라는 말이다.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수행자라면 반드시 암기하고 있어야 한다.

선정에 들려면 가장 먼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떠나라고 했다. 이 말은 위위쩨와 까메히(vivicceva k
āmehi)”라는 말로 표현된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뜻하는 단어가 까마(kāma)임을 알 수 있다.

 

인도에서 성과 관련된 책이 있다. 까마수트라를 말한다. 여기서 까마라는 말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뜻한다. 그런데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악행이라는 사실이다. 왜 그런가? 까마가 아꾸살라담마와 함께 쓰였기 때문이다. 이는 삼마와짜(正精進)에서 웁빤나낭 빠빠까낭 아꾸살라낭 담마낭 (Uppannāna pāpakāna akusalāna dhammāna)”이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악행을 뜻하는 빠빠(pāpa)와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뜻하는 아꾸살라담마(akusala dhamma)가 함께 쓰였기 때문이다.

 

감각적 욕망이 있으면 선정에 들어 갈 수 없다. 그래서 까마와 아꾸살라를 함께 사용했는데, 이는 까마가 선정과 상반된 까닭에 악하고 불건전한 것(아꾸살라 담마)”(Vism.4.85)이라는 것이다.

삼마사띠에서는 빠빠와 아꾸살라담마가 함께 쓰였고, 삼마사마디에서는 까마와 아꾸살라담마가 함께 쓰였다. 공통적으로 아꾸살라담마가 바탕에 깔려 있다. 이는 악하고 불건전한 것임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빠빠(악행)와 까마(감각적 쾌락의 욕망)는 같은 것이 된다.

누군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왜 잘못된 것인가?”라며 이의를 제기할지 모른다. 배고프면 먹고 갈증 나면 마시는 행위는 지극히 당연하다고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정한 삶을 추구하는 수행자의 입장에서 본 다면 악행에 해당된다. 욕망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탐욕이다.

탐욕은 성냄과 어리석음과 함께 삼독이라 하여 극복대상이다. 그래서 수행자라면 무탐, 무진, 무치의 삶을 살아간다. , , 치의 소멸은 깨달음의 완성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삼마사마디에서 가장 첫번째로 위위쩨와 까메히(감각적인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라고 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초선정에서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벗어나기 위한 구체적 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그것은 사위딱깡 사위짜랑(savitakka
savicāra)”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라고 번역된다. 키워드는 위딱까와 위짜라이다.

위딱까(vitakka)를 사유라고 했다. ‘일으킨 생각이라고도 번역된다. 위짜라(vic
āra)를 숙고라고 했다. ‘지속적 고찰이라고도 번역된다. 이 두 단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의 비유로 설명되어 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위딱까의 특징에 대하여 대상을 향해 떠오르게 하는 것”(Vism.4.88)이라고 했다. 부처님의 열 가지 덕성을 계속 떠올리는 불수념을 한다면 위딱까의 대상은 부처님이 된다. 이는 마치 종을 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위딱까에 대하여 치고 두드리는 것을 기능으로 삼는다.”(Vism.4.88)라고 했다.

 

초선정에서 위딱까와 위짜라는 항상 함께 한다. 종을 쳤다면 종이 울릴 것이다. 종을 치는 것은 위딱까와 같고, 종의 울림은 위짜라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청정도론에서는 종을 치는 것과 같은 위딱까에 대하여 어떤 때는 분리되지 않지만, 거친 경우에 선행하는 것과 같이 마음의 최초 공략이 사유이다.”(Vism.4.89)라고 했다. 그래서 위딱까에 대하여 일으킨 생각으로 번역했을 것이다.

 

선정에 들 때 마음의 최초 공략이 위딱까라고 했다. 이는 거친 것이다. 아직 외외부대상으부터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다. 언제든지 잡념이 치고 들어 올 수 있다. 일으킨 생각, 예를 들면 부처님을 생각한다면 다음 부터는 부처님의 열가지 덕성을 계속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고짜라에 대하여 종의 울림처럼 지속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숙고이다.”(Vism.4.89)라고 했다. 위짜라에 대하여 지속적 고찰로 번역한 이유일 것이다.


위딱까와 위짜라는 언어적 사유에 대한 것이다. 언어가 개입된 것이다. 언어는 개념화 된 것이기 때문에 분별에 해당된다. 삼마사마디는 언어적 수단을 이용하여 삼매에 드는 것이다. 그러나 딱 초선정까지만 해당된다. 두 번째 선정에서는 위딱까 위짜라낭 뷰빠사마(Vitakka-vicārāna vūpasamā)”라 하여, 이는 사유와 숙고가 멈추어진 뒤라고 설명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두 번째 선정부터는 언어적 사유가 멈추어 짐을 말한다. 선정에 들기 위해서는 먼저 언어적 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초선정에서 위딱까와 위짜라는 언어적 개념을 활용하는 것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과 불선법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다. 청정도론에는 40가지 사마타 명상주제가 설명되어 있다. 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삼매에 들어간다. 그 중에 수념이 있다. 계속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불수념, 법수념, 승수념, 사수념 같은 것을 말한다. 불수념이라면 계속해서 부처님의 열 가지 덕성을 생각하는 것이다.

불수념 했을 때 다른 생각이 치고 들어올 수 없을 것이다. 까마와 아꾸살라담마가 발붙일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적 개념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초선이 한계이다. 딱 초선 까지만 해당되는 것이 수념(隨念: anussati)이다. 두 번째 선정부터는 언어적 사유를 초월한다.

팔정도경(S45.8)을 빠알리어로 외우고 있다. 매일 새벽 짤막한 게송을 외운다. 단어 하나하나에 의미를 파악하며 외운다.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외워진다. 마치 사진을 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드러난다. 다 외웠을 때는 희열을 느낀다. 집중에 따른 희열이고 성취한 것에 대한 희열이다. 이는 초선정 정형구에서 위웨까장 삐띠수캉(vivekaja
pīti-sukha)”이라는 말과 일치한다.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말한다.

빠알리 경전 외우기를 하여 희열과 행복을 맛보고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눈을 감고 외운 것을 하나하나 떠 올렸을 때 충만해진다. 마음 속에서 기쁨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삐띠(喜悅)와 수카(幸福)라고 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과 불선법을 잠재우는 행복이다. 이처럼 삼매는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다준다. 지금 희열과 행복을 맛보려 거든 게송을 외우면 된다.

 

 

2020-12-2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