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빤냐완따 스님의 경행예찬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1. 7. 11:54

빤냐완따 스님의 경행예찬

 

 

사무실에 명상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틈만 나면 앉아 있거나 거닐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요즘 좌선과 행선을 거의 하지 못한다. 집중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혼자 수행하는 것에 대한 한계일 것이다.

 

집중이 잘 되지 않아서 틈틈이 스쿼트를 하고 있다. 한타임에 약 20번 하면 허벅지가 뻐근해서 하는 맛이 난다. 아마 108배도 이런 성과가 있어서일 것이다. 허리가 뻐근하게 해야 하는 맛이 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좌선이나 행선은 너무 정적이다.

 

운동을 즐겨 하는 사람들은 좌선과 행선에 관심을 갖지 못하는 것 같다. 마치 굴신 운동하듯이 절수행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좌선과 행선은 싱겁다고 느껴질지 모른다. 특히 학춤 추는 것처럼 천천히 움직이는 행선에 대해서는 무슨 재미로 하는지 모를 것이다.

 

스쿼트를 하고 나서 행선하면 조금이나마 집중이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오래 지속되지 않기 때문에 맛을 모른다. 이런 때 행선에 대한 자료를 접하게 되었다.

 

걷는 수행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지난 111일 한국테라와다불교 까티나 법요식에 참석했다. 그때 두 가지 책자를 가져왔다. 하나는 빤냐와로 스님의 법문집이고 또 하나는 빤냐완따 스님의 행선에 대한 소책자이다. 이는 선원에서 특별히 제공한 것이다. 법요식 참석자들에게 법보시한 것이다.

 

걷는수행 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빤냐완따스님).pdf
0.87MB

 

빤냐완따 스님의 걷는 수행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읽어 보았다. 모두 78페이지가량 되는 책으로 법보시용이라고 쓰여 있다. 빤냐완따 스님이 특별히 편집하여 만든 것이다. 그런데 책을 읽어 보니 놀라운 내용으로 가득하다. 이제까지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이 모두 해결된 듯하다. 물론 실천이 따라야 할 것이다.

 

 

빤냐완따 스님은 걷는 수행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했다. 왜 이렇게 자극적인 제목을 달았을까? 이에 대하여 스님은 서문에서 돌이켜보면, 이승은 출가 초기부터 좌선수행보다는 걷는수행을 많이 해온 편입니다. 좌선보다는 주로 걷는수행을 통해 삼매의 근력을 길렀고, 걷는수행을 통해 더 많은 법들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3)라고 했다.

 

부처님도 행선했다

 

빤냐완따스님은 시인스님이다. 그래서인지 글을 잘 쓴다. 경전을 근거로 해서 썼고, 무엇보다 미얀마에서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해서 쓴 것이다. 그래서 빨려가듯이 단번에 다 읽었다. 지난 8월 초 비가 억수로 내리는 날 거처에 찾아가 공양 올리기도 했다. 이를 일상사띠를 넘어 이제 팔정도의 삶으로’(2020-08-02)라는 제목으로 기록을 남겼다.

 

 

빤냐완따 스님은 스스로 경행예찬론자라고 했다. 이는 좌선보다는 경행을 통해서 얻은 것이 더 많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소책자는 경행, 행선, 또는 걷는수행에 대한 결정판이라고 볼 수 있다. 마치 경행 교과서와 같은 책이다.

 

스님은 먼저 행선이 경전적 근거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부처님도 행선 했음을 말한다. 그 중에 하나를 보면 그런데 그 때 세존께서는 날이 밝아 일어나셔서 바깥을 거닐고 계셨다.”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거닐기 (cakama)’는 걷는 수행, 즉 행선으로 보는 것이다. 하나 더 보면 오라 수행승이여, 깨어 있음에 전념하라. 낮에는 경행과 좌선으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하라.”(M125)라고 되어 있다.

 

부처님은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세 가지 조건을 말씀했다. 니까야 도처에서는 감각기관을 단속하는 것, 식사에 적당량을 아는 것, 그리고 깨어 있음에 전념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원리가 해탈과 열반으로 이끈다고 했다. 여기서 깨어 있음에 전념한다는 것은 경행과 좌선을 말씀하신 것이다.

 

깨달음의 길에 있어서 경행은 좌선 못지 않다. 그래서인지 미얀마 마하시전통에서는 행선과 좌선을 동등하게 취급한다. 한시간 좌선하면 한시간 경행 하는 식이다. 대개 짝수시간에는 좌선을 하고 홀수 시간에는 행선을 한다.

 

빤냐완따 스님의 두더지체험

 

아난다존자는 행선으로 아라한이 되었다. 1차 결집을 앞두고 밤새도록 거닐다가 잠자리에 들 때, 머리가 베개에 닿는 순간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비밀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빤냐완따 스님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설명했다.

 

지난 81일 성남에 있는 빤냐완따 스님 거처를 찾았을 때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들은 것을 블로그에 써 놓았지만 기억에 한계가 있다. 그런데 이번 소책자를 보니 미얀마에서 체험담이 그대로 실려 있다. 이는 마음 보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빤냐완따 스님에 따르면 한시간 행선 하는데 경행대에서 약 500회 이상 반복한다고 했다. 이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오래 집중했을 때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발걸음에 주의를 기울이면 감각들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것도 눈으로 실제 보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빤냐완따 스님은 어느 날 한가지 의문이 생겼다고 한다. 그것은 의도에 대한 것이다. 더 나아가 의도하는 마음은 어디서 생기는 것일까?’에 대한 것이다.

스님은 그 마음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아난다 존자의 밤샘경행과 관련해서 설명했다. 스님은 이를 일명두더지 체험으로 설명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5일째 되던 날 밤이었습니다. 아름드리 망고나무에서 덜 익은 망고가 땅바닥에 ‘툭’하고 떨어지는 순간, ‘피곤하다’ ‘들어가서 쉬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발걸음을 숙소로 옮겼습니다. 발걸음이 숙소 앞 계단(3~4계단) 밑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마치 두더지가 굴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사라진 것처럼, 눈 앞에(혹은 가슴 중심 쯤에서) 무언가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 포착되었습니다. 순간, 동작이 멈춰 졌습니다. 계단 앞에 선 채로 몸 전체를 주시했습니다. 일순, 두더지가 다시 얼굴을 내미는가 싶더니 마침내 발걸음이 계단 위로 옮겨지기 시작했고, 세 계단 쯤 오른 다음 현관문 앞에서 현관문의 손잡이를 돌리려는 순간 놀라운 현상을 목격되었습니다. 어두운 굴속에 웅크리고 있던 두더지 한 마리가 달빛 환한 굴 밖으로 불쑥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순간, 가슴이 뛰었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희열이 온몸을 감싸 안았습니다. ‘아, 이것이 마음이로구나!’ 하고 무릎을 쳤습니다.”(걷는수행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62)

 

 

스님은 마음을 본 것이다. 마치 두더지처럼 숨어 있는 마음이 어느 날 하고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노력이 있었다. 스님의 글에 따르면, “하루일고가 끝나고 모두 취침에 들고 나면, 뜰에 홀로 나와 발의 동작에 주의집중하면서 밤새도록 걷고 또 걸었습니다.”(62)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바구존자의 기연(機緣)

 

스님은 남이 잠자는 시간에 밤새도록 경행했다. 마침내 그 순간이 왔다. 문고리를 잡는 순간 마음을 본 것이다. 두더지처럼 쏙 내미는 마음을 보았다고 한다. 이는 마치 테라가타에서 바구존자의 기연(機緣)을 보는 것 같다.

 

 

“혼침에 정복되어

나는 정사를 나왔다.

경행처로 올라가다

거기서 땅에 넘어졌다.(Thag.271)

 

“사지를 주무르고,

다시 경행처로 올라가서

안으로 잘 집중하여

경행처에서 경행을 했다. (Thag.272)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이

그 때문에 나에게 일어났고

위험이 분명하게 보였고

싫어하여 떠남이 정립되었다. (Thag.273)

 

“나의 마음은 그래서 해탈되었다.

여법하고 훌륭한 가르침을 보라.

세 가지 명지를 성취했으니

깨달은 님의 교법이 나에게 실현되었다. (Thag.274)

 

 

빤냐완따 스님은 의도라는 마음을 보았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그토록 보고 싶었던 마음을, 그토록 애를 써도 볼 수 없었던 마음을, 보려는 의지를 놓아버리고 들어가서 쉬려는 순간 보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마치 아난존자가 밤샘 경행을 했지만 진척이 없자 이번 생에는 안되겠구나. 이제 쉬어야 겠다.”라며 침상에 눕는 순간, 머리가 베개에 닿는 순간 알게 되었다는 것과 유사한 말이다. 또한 테라가타에서 바구존자의 기연과도 유사하다. 이는 경행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두더지체험을 하고 나자 변화가

 

빤냐완따 스님은 일명 두더지체험을 하고 나서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숙면을 취한 그 다음 날부터 항상 깨어 있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알아차림이 저절로 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눈을 뜨려는 의도, 눈꺼풀이 위로 올라가는 감각, 흐린 불빛 속의 사물들에 대한 인식, 팔을 움직여 담요를 접어놓고 세수를 하는 동안에도,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명상홀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알아차림 의식이 저절로 따라다니는 것이었습니다.”(63)라고 했다.

 

빤냐완따 스님은 행선의 놀라운 효과에 대하여 소책자에 써 놓았다. 한번 마음을 보게 되자 알아차림이 저절로 이어졌고, 더 이상한 현상을 목격했다고 한다. 이를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좌선을 마치고 <걷는수행>을 하기 위해 눈을 드려는 의도와 함께 눈을 뜨는 순간 또 한 번 이상한 현상이 목격되었습니다. 명상홀 10m 전방쯤에 걸려 있는 벽시계가 눈에 들어오는 왔습니다. 그러나 그날의 그 시계는 이 승이 늘상 보아오던 그 시계가 아니었습니다. 그 시계는 찰라지간 퍼즐 조각처럼 맞추어지면서 시계의 모양이 되었고, 시간을 인식하는 과정 역시 순간적으로 부품조립 과정을 거치면서 로봇이 완성되는 것과 같았고, 부분 부분 촬영된 슬라이드 사진을 한 컷 한 컷 보는 것과 같이 초침 분침 시침이 분리된 채 각각 순차적으로 시각인식 되면서 시간의 개념을 형성하는 것이었습니다.”(63-64)

 

 

스님은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났을 때 수행을 하다보니 별 것이 다 보이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후 눈만 뜨기만 하면 시각대상의 개념형성 과정이 보였다는 것이다. 한꺼번에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순차적으로 인식됨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인식하고 있는) 이 세상은 동전의 양면처럼 두 개의 얼굴, 두 개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 개념 · 관념에 의해 형성된 세계와 개념화되기 이전의 실재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64)이라고 했다.

 

빤냐완따 스님은 경행예찬론자

 

빤냐완따 스님은 경행예찬론자이다. 처음에는 발을 들고 놓음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자는 것인지 전혀 몰랐으나 스승의 가르침대로 해 보니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체험은 좌선만 해서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빤냐완따스님에 따르면 좌선만으로는 부동의 삼매를 계발할 수 없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좌선으로 얻어진 삼매는 온실속의 화초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밖에 나가면 이내 시들어 버리듯이, 좌선에서 벗어나면 여지없이 깨져버림을 말한다. 그러나 행선을 통해 계발된 삼매는 강력한 힘을 지녀서 깨지지 않는다고 했다.

 

부처님은 행주좌와어묵동정 간에도 언제 어디서나 깨어 있음을 강조했다. 그래서 오라 수행승이여,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림을 성취하라. 앞으로 가건 뒤로 돌아오건, 올바로 알아차려라. 앞으로 바라보건 뒤로 바라보건, 올바로 알아차려라. 몸을 굽히건 몸을 펴건, 올바로 알아차려라.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지닐 때에도, 올바로 알아차려라. 먹거나 마시거나 삼키거나 소화시킬 때에도, 올바로 알아차려라. 대소변을 볼 때에도, 올바로 알아차려라. 가거나 서거나 앉거나 눕거나 깨거나 말하거나 침묵할 때에도, 올바로 알아차려라.”(M125.28)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빤냐완따 스님에 따르면 행선은 좌선과 일상생활수행의 중간에 위치한다고 했다. 행선은 지나치게 정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동적이지도 않는 수행을 말한다.

 

행선을 하면 많은 이점이 있다고 했다. 행선수행을 하면 일상생활속에서도 알아차림이 유지되는데, 이는 좌선수행할 때 집중력과 통찰력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좌선과 행선은 항상 함께 해야 하고, 그것도 동등하게 해야 함을 말한다. 행선과 좌선이 서로 도움을 주었을 때 상호보완속에서 더 깊은 통찰로 나아갈 수 있음을 말한다. 이것이 빤냐완따 스님의 경행예찬론이다.

 

 

2020-11-0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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