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회

여성은 세컨드(Second)가 아니다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1. 19. 16:31

 

여성은 세컨드(Second)가 아니다

 

 

페미니즘, 이 말을 접하면 부정적 인식이 앞선다. 불과 일이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일은 없었다. 페미니즘이라는 말 자체를 몰랐고 개념도 없었다. 단지 여성운동하는 사람들이 쓰는 용어 정도로 알았다.

 

부정적으로 본 페미니즘

 

페미니즘에 대하여 왜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 이는 최근 미투(Me Too)’운동과도 관련이 있다. 이름 있는 사람, 또는 존경하는 사람이 미투라는 이름으로 추락하는 것을 보았을 때 부정적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이다.

 

미투와 관련하여 문제 있는 사람도 있지만 억울하게 당한 사람도 많다. 그렇다고 페미니즘과 미투운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자연스런 과정으로 본다. 그럼에도 부정적인 생각이 지배하고 있는 것은 유튜브의 영향도 크다.

 

미투와 관련하여 추락하는 사람들을 볼 때 안타까웠다. 이는 남성이라서 그런 것이라기 보다는 잘못 적용되고 변질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유튜브에는 수많은 안티페미니즘 채널이 있다.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다. 자주 보다 보니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 생각이 앞서게 되었다,

 

페미니즘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알리는 채널도 있다. 또 미투운동에 대한 정당성을 알리는 채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부정적인 것이 지배한다. 접속하다 보면 대부분 부정적인 것이 걸려든다.

 

페미니즘운동과 미투운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하다. 선의를 가지려 하지만 한번 마음이 기울어 버리자 좀처럼 바꾸기 힘들게 되었다. 이런 때 불교계에서 페미니즘과 관련된 강좌가 열렸다. 성평등불교연대에서 주최하고, 종교와 젠더연구소에서 주관하고, 불교아카데미에서 후원하는 불교, 페미니즘과 만나다가 바로 그것이다.

 

20201118일 첫번째 강연을 시작으로 매주 열린다. 모두 5강으로 12월 16일 종강이다. 장소는 아파트먼트 기룬이다. 우리함께 빌딩 2층에 있다. 시간은 매주 수요일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진행된다.

 

 

불교와 페미니즘,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다. 오늘날 페미니즘은 매우 진보적이고 때로 과격한 운동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불교와 페미니즘이라니! 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몹시 궁금하다. 그래서 다섯 강좌 모두 등록했다. 한강좌당 수강료가 만원이지만 모두 신청하면 4만원에 가능하다. 가능하면 완주하려 한다.  이번 강연을 통해서 페미니즘에 대하여 어떤 인식의 변화가 생겨날까?

 

첫번째 강연이 열린 날

 

첫번째 강연이 열린 날 비가 왔다. 안양에서 여유 있게 출발했다. 오후 5시에 출발했다. 두 시간 전에 먼저 출발한 것이다. 퇴근길 극심한 교통혼잡을 감안한 것이다. 네비를 보니 1시간 15분이라 되어 있다. 그러나 두 시간 걸렸다. 도중에 길을 잘못 들어서 헤매기도 했다. 비를 뚫고 극심한 체증을 뚫고 지친 몸으로 간신히 시간에 맞추어 도착했다.

 

 

강연장 기룬은 최근 리모델링 되었다.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천정은 터져 있어서 마치 창자가 보이는 듯하다. 조명은 어두침침하다. 강사가 프린트를 읽기에 지장을 받을 정도로 침침하다. 편안히 앉아서 공연을 감상하는 용도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무미건조한 강의실 보다는 분위기가 훨씬 낫다.

 

첫번째 강연은 영성에 대한 것이다. 강연제목은 여성의 손의 상징과 영성의 관계이다. 강사는 이다감 선생이다.

 

 

이다감 선생은 서울불교대학원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자신을 소개할 때 신비주의자에 가깝다고 했다. 간화선, 위빠사나, 요가 등 해보지 않은 것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오랜 세월 이나라 저나라에서 영적쇼핑을 했다고도 말 했다.

 

이다감 선생이 말한 것을 받아 적었다. 노트하다 보니 18페이지가 되었다. 별도로 프린트물을 나누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받아 적는 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또 후기를 쓰기 위한 것도 된다. 강연이 끝나고 명함을 건네며 자료를 이메일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기다릴 수 없다. 노트한 것을 바탕으로 글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2의 성에 대하여

 

노트에 기록된 것을 모두 다 글로 표현할 수 없다. 프린트물을 한시간 반동안 읽어 가면서 설명했기 때문에 내용이 많다. 어쩌면 프린트물에 없는 이야기가 핵심인지 모른다. 직접 강연을 듣는 것은 사적 내지 개인사적 이야기를 듣는 재미도 있다.

 

강연제목은 여성의 손의 상징과 영성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불교와 페미니즘과 관련이 있을까? 그러나 잘 들어 보니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그것은 여성의 성에 대한 것이다. 이다감 선생은 이에 대하여 2의 성이라고 했다.

 

2의 성이 있다면 당연히 제1의 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히 남성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이다감 선생은 주민등록번호를 예로 들었다. 주민등록증에는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는 숫자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누구나 다 아는 것이다. 남성은 1번으로 구분되고, 여성은 2번으로 구분되는 것을 말한다.

 

주민등록증에서 생년월일 다음에 이어지는 번호가 있다. 1번으로 시작된다. 오랜세월 왜 1번으로 시작되는지 알지 못했다. 이것이 남성과 여성을 가르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성인이 되고 나서도 한참 후에 알았다.

 

여성들은 자신에게 부여 받은 번호가 2번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까? 대부분 ?”라고 의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 그건 당연하잖아요?”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는 여성을 제2의 성으로 받아 들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여성들은 저 이거 못해요.”라든가, “자신없어요.” 등과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강력한 주술처럼 말한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는 제2의 성이라는 딱지를 떼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손없는 처녀

 

이다감선생은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노트한 것을 읽어 보았다. 밑줄치고 색칠하는 등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파악하고자 했다. 강연을 단지 듣는 것으로 그친다면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후기를 작성함으로 인하여 되새기게 된다.

 

들은 것을 글로 남기면 여러 모로 이점이 있다. 먼저 두 시간 걸려 힘들게 달려 가서 두 시간 동안 들은 것이 보상 받는다. 무엇보다 강연을 두 번, 세 번 듣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 그래서 듣고 노트한 것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 더구나 기록으로 남기면 확실히 내것이 된다. 어느 강연장에 가든 기록을 남긴다.

 

이다감선생은 손없는 처녀에 대하여 강연했다. 여자에게 손이 없다고 한다. 이는 손목이 잘렸기 때문이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손없는 처녀에 대한 민담은 전세계적으로 200가지 버전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20가지 버전이 있다고 한다.

 

이제까지 한번도 손없는 처녀에 대한 민담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이런 민담이 엄연히 유통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보니 얼마나 무지한 줄 알게 되었다.

 

세상에는 알아야 할 것이 많다. 그렇다고 모두 다 알 수 없다. 이럴 때는 겸허히 자신이 모르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실제로 아는 것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라고 말했을 것이다.

 

손없는 처녀 이야기는 어떤 처녀가 어떤 계략에 의해 두 손이 잘린 채 집을 떠난다는 것을 줄거리로 하고 있다. 아버지가 악마와 약속하여 부자가 되었는데 그 대가로 처녀의 손목을 잘라서 손없는 처녀가 되었다는 것이다.

 

처녀가 손이 잘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강연자는 이를 가부장제와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다. 남성중심사회에서 순종적으로 살아야 하는 여자에 대하여 손잘린 여자로 본 것이다. 아버지에 의해서 손이 잘린 것이다. 여기서 손은 여성성의 상징이다.

 

두 손의 재생과정

 

가정에서 어머니는 순종적이다. 가부장적 아버지의 말에 꼼짝하지 못한다. 그런 어머니를 자식들도 혐오한다. 이는 전통적으로 가부정적 질서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여성성은 폄하 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손잘림 현상은 오늘날에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로서 개그맨 S의 아내로 살다가 이혼한 연예인 S를 들었다. 또 유명 작가 L의 아내로 살다가 졸혼을 선언한 여인을 예로 들었다, 모두 손이 잘린 채로 가부장적 권위아래에서 산 것이다.

 

손이 잘린 채로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고성제만 말씀했다면 염세주의자로 몰려 오늘날 까지 가르침이 전승되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민담에서는 잘린 손이 자라나는 과정이 있다. 어떤 극적인 과정에 의해 두 손이 복원됨을 말한다.

 

두 손은 어떻게 재생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이다감선생은 다섯 단계로 설명했다. 눈감음, 눈뜸, 알게 됨, 되새김, 통합, 참여를 말한다. 이에 대하여 융의 분석심리학을 도입했다. 그것은 자기(Self)’를 찾는 여행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마음 속에 있는 빛을 찾아 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 빛은 신성이 될 수도 있고 불성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아무리 하찮은 존재라도 마음 속에는 보석과 같은 고귀한 그 무엇이 있음을 말한다.

 

마음의 그림자와 자기실현

 

한때 융의 분석심리학에 심취하던 시절이 있었다. 불교에 정식으로 입문하기 전인 2000년대 초반의 일이다. 그때 이부영 교수의 3부작 그림자’, ‘아니마와 아니무스’, ‘자기와 자기실현을 즐겨 읽었다. 이부영 교수는 스위스 융연구원에서 분석심리학을 전공한 바 있다.

 

누구나 마음속에 그림자가 있다. 누구나 숨기고 싶은 마음의 어두운 측면을 말한다. 내면에 있는 또 하나의 자신을 말한다. 개인무의식의 영역에 있는 콤플렉스이다. 이는 열등감 덩어리들이라고 볼 수 있다. 유년기나 소년기, 청소년기 시절에 형성된 것일 수도 있다. 또 누구에게나 말 못할 비밀이 있을 수 있다. 모두 숨기고 싶은 마음의 그림자이다. 그럼에도 종종 튀어나와 당황하게 만든다.

 

그림자는 억압하면 할수록 커진다. 나중에는 자신을 집어 삼킬지 모른다. 그래서 융의 분석심리학을 보면 무의식을 의식화시키라고 했다. 무의식을 의식화 함으로써 자기실현이 된다고 했다. 이부영교수의 자기와 자기실현에서 자기에 대한 것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 , 불성과의 일치와 실현 등, 고등종교의 수행목표는 한결같이 융이 심리학적 견지에서 자기라고 부른 인간정신의 중심적인 것에 도달하는 것으로서 이런 생각은 인류의 역사 속에 이미 오래 전부터 제시되고 체험되어 왔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자기와 자기실현, 65)

 

 

융의 분석심리학에 따르면 자기실현은 자기에게 가까이 감으로써 실현된다. 여기서 자기(Self)는 그리스도, , 불성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이 세상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목적은 같다고 볼 수 있다.

 

종교인이나 철학자는 본질을 말한다. 본질은 하나인데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고 한다. 그래서 정상은 하나인데 올라가는 길은 여럿이다.”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오늘날 종교다원주의자들이 즐겨 쓰는 말이다. 그러나 초기불교에 따르면 이와 달리 한다. 열반의 실현에 대하여 자기실현으로 말하지 않는다.

 

자기(Self)는 어디에 있을까?

 

자기실현은 에고라는 소아를 버리고 자기라는 대아와 합일되는 것을 말한다. 융심리학에서는 대극합일이라 하여 의식과 무의식의 통합, 남성성과 여성성의 통합을 말한다. 그렇다면 자기는 어디에 위치해 있을까? 이부영 교수의 책 자기와 자기실현을 보면 의식과 무의식의 도표가 있다.

 

 

도표를 보면 자기는 여러 겹의 마음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있다. 의식, 개인무의식, 집단무의식 너머에 있다. 구체적으로 페르조나, 외부세계와의 관계, 자아, 그림자, 아니마와 아니무스, 자기의 순으로 마음의 층이 형성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자기는 마음의 코아라고 볼 수 있다.

 

자기는 남성속의 여성성인 아니마와 여성속의 남성성인 아니무스도 포괄하고 있다. 인류의 원형이라는 집단무의식도 포괄하고 있다. 자기는 자신의 에고가 아니라 전인류가 공유하는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것이다. 이를 종교인들이 말하는 궁극적 실재, 즉 그리스도, , 불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의식을 의식화하여

 

무의식을 의식화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에게 가까이 감을 말한다. 이를 융은 자기실현이라고 했다. 손잘린 처녀 이야기도 이와 같은 자기실현에 대한 것이다. 무의식의 영역에 있는 것을 의식화 했을 때 이를 개별화 과정이라 한다.

 

두 손이 잘린 처녀에게 두 손이 재생되는 것은 타인과 구분된 개별화 과정을 보여준다. 그래서 마침내 모든 의식이 통합되었을 때 자기실현이 된다. 이에 대하여 이다감선생은 데미안의 한 구절을 소개 했다. 이는 인간은 자기가 온전히 자기가 되는 순간 신성을 경험한다.”라는 말이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내면에 신성 또는 불성이 있다고 한다. 누구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이다감선생은 으로 설명했다.

 

이다감 선생은 성폭력 피해자도 상담하고 있다. 처음에 상담자들은 자신의 몸을 하찮게 여겼다고 한다. 열등감이 지배한 것이다. 그것은 제2의 성에 대한 열등감일 수 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했던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상담자들은 대담을 하면 할수록 변화과정을 겪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안에도 빛이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는 데미안에서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라고 설명된다. 나로 살아야 존재의 완성을 경험한다는 것으로 말이다. 이는 병아리가 부화하는 것과 같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 병아리 부화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이는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몸부림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라는 구절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마음의 그림자, 열등감 등을 깨야 함을 말한다. 자아라는 에고를 깨야 함을 말한다. 그러면 더 큰 세계로 나아갈 것이다. 이제까지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이는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것이고, 개별화를 통한 자기실현이라 볼 수 있다.

 

스스로 알껍질을 깨고 나와야

 

헤르만 헤세의 병아리부화이야기의 모티브는 놀랍게도 불경에 있다고 한다. 헤르만 헤세가 청년시절 삼촌집에 놀러 갔는데 맛지마니까야를 읽은 것이 동기가 된 것이다. 그때가 1900년대라고 한다. 한국보다 무려 100년 빨리 번역된 것이다. 맛지마니까야 마음의 황무지의 경’(M16)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 가르침이 있다.

 

 

예를 들어 수행승들이여, 한 마리의 암탉이 있는데 여덟 개나 열 개나 열두 개나 계란을 올바로 품고 올바로 온기를 주고 올바로 부화시키면, 그 알탉은 ‘오! 나의 병아리들이 발톱이이나 부리의 끝으로 껍질을 쪼아서 안전하게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할텐데.’라고 원하지 않더라도 병아리들이 발톱이나 부리의 끝으로 껍질을 쪼아서 안전하게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용맹을 수반하는 열다섯 가지의 조건을 성취하면 그는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으며, 올바로 깨달을 수 있으며, 위없는 안온을 얻을 수 있다.”(M16)

 

 

병아리부화의 비유는 니까야 도처에서 발견된다. 핵심내용은 스스로 알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이다. 이는 선종에서 말하는 줄탁동기(啄同機)와는 다른 것이다. 알에서 깨기 위해 알 속의 새끼와 밖에 있는 어미가 함께 알껍데기를 쪼아야 한다는 뜻이 아님을 말한다. 이는 경에서 어미닭이 ! 나의 병아리들이 발톱이이나 부리의 끝으로 껍질을 쪼아서 안전하게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할텐데.”(M16)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스스로 알껍질을 깨고 나와야 한다. 남이 알껍질을 깨 주는 것이 아니다. 어미 닭은 품어만 줄 뿐이다. 알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은 병아리가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아라는 에고도 자신이 깨야 한다. 남이 깨 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해결하는 것이다. 다만 누군가 도움은 줄 수 있을 것이다.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힘으로 깨고 나와야 한다.

 

여성은 세컨드(Second)가 아니다

 

불교와 페미니즘 첫번째 강연을 들었다. 이번 강연에서 충격은 제2의 성에 대한 것이다. 여성의 성은 두 번째라는 것이다. 주민등록증에 2로 표기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일상에서도 사회에서도 세컨드(Second)’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남성들은 모르는 것이다. 아니 당연히 여기고 있는 것이다. 공기처럼 너무 당연해서 문제거리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제2의 성으로 인하여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았다.

 

여성은 세컨드가 아니다. 남자와 여자는 성이 다를 뿐 똑 같은 인간이다. 욕계세상에는 암수의 구별이 있어서 성의 구별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오랜 세월 여성은 제2의 성으로 살아왔다는 것이다. 항상 제1의 성에 지배받고 억압받아 온 것이다. 손잘린 처녀이야기에서 가부장적 아버지가 이를 잘 말해 준다.

 

이 세상의 반은 남성이고 이 세상의 반은 여성이다. 어찌하여 태어나고 보니 누구는 남성이 되어 있고, 누구는 여성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윤회론적 관점으로 본다면 성은 바뀌게 되어 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오랜 세월을 거쳐서 일찍이 한 번도 어머니가 아니었던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없다.”(S15.14)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누구나 한번쯤 나를 낳아 준 어머니였다는 것이다.

 

한량없는 윤회의 과정에서 누구나 한번쯤 나의 어머니였을 것이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오랜 세월을 거쳐서 일찍이 한 번도 아버지가 아니었던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없다.”(S15.15)라고 했다. 윤회의 과정에서 누구나 한번쯤 나의 아버지였음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여 차별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제1의 성과 제2의 성의 차별은 있을 수 없다. 여성은 세컨드가 아니다.

 

 

2020-11-19

담마다사 이병욱